- 藝術/旅行

waterelf
- 작성일
- 2022.4.16
제주는 잘 있습니다
- 글쓴이
- 엄지사진관 저
상상출판
도피로 시작된 생활자의 삶
비록 바가지 요금으로 ‘물가가 비싼 여행지1)’라는 오명(汚名)이 있다지만, 제주 여행은 외국어의 공포에 시달리지 않고, 손쉽게 일상에서 벗어나 ‘낯섦’을 즐길 수 있는 ‘해외’여행이다.
그런데 제주를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제주에서 살아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원생활의 낭만을 기대하며 귀농한 이들이 겪는 것처럼 이상과 현실의 갭을 처절하게 실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토박이가 귀향하는 것이면 한결 낫다. 하지만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곳으로 귀향한다면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도 여행지가 일상의 장소, 삶의 장소로 바뀌게 되었을 때의 묘한 아쉬움을 얘기하며, 여행지 제주에서의 삶을 포기했던 기억을 얘기했다.
나는 제주에서 살고 싶었던 옛날에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로 일하며 한 달을 지내본 적이 있었다. 바로 그 때 도민이 되겠다는 마음을 접었다. 내가 상상했던 이상적이고 포근하기만 했던 여행지가 일상의 장소가 되어버리니 묘하게 아쉬운 구석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제주를 힘들 때나 혼자 떠나고 싶어질 때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곳으로만 남겨두었다. [pp. 22~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제주에서의 생활을 선택했다. 왜 그런 것일까?
이 책의 저자는 제주에서의 삶이 시작된 계기를 도피라고 얘기하고 있다.
직업을 포기하기로 했을 때 무턱대고 여행을 떠났다. 비행기는 타고 싶었지만 별 어려운 과정이나 로밍 없이도 핸드폰이 수월하게 터지는 곳. 그래서 제주를 택했다. 여행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도피에 가까웠다. 주변 사람들에게 당당히 꿈이라고 말해왔던 나의 ‘꿈’을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감이 나를 제주로 이끌었다.
친구의 위로 문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순간, 부끄러워서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에 나는 제주에 있었다. [p. 17]
그뿐이었을까?
사실 제주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하며 자주 바닥을 쳤다. 더 잘살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왜 이런 꼴인가. 다니던 광고회사의 선배들이 그건 아니라고 뜯어말릴 때도 오히려 괜찮을 거라고 그들을 안심시키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후회는 나를 갉아먹기만 하므로, 그럴수록 이 악물로 잘 해내야만 했다. [p. 33]
어디에 있는지 보다 어떻게 있는지가 중요하다
어디에 있는지에 얽매이는 것은 낡은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현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변화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 것에 엮으려고 하는 거니까.
그래서 저자도
필름 사진은 잔인하지
한 롤을 쓰는 데 한두 달이 꼬박 걸리는데
막상 그 기다림을 거쳐 현상 스캔을 할 땐
당시 좋았던 순간이 좋지 않은 순간으로 바뀌기도 하고
따스했던 관계의 온기가 달라지기도 하지[p. 41]
라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자. 같은 제주라는 장소에서의 삶이라도 월급쟁이로서의 삶과 프리랜서의 삶은 다르다. 그래서 어지간한 회사라면 퇴사하겠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만류하기 일수다. 잘 알다시피 준비 안된 프리랜서의 삶은 고달프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퇴사를 조금 어이없는 이유로 선택했다.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돈 문제를 나도 모르게 뒤로만 미루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돈이 뭐가 중요하냐고 했던 낭만적인 사고는 20대 때나 통했다. 당장 먹고 사는 게 문제인데 낭만이 다 무슨 소용인가. 똑 부러지게 돈을 관리했어야 했는데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회피했다. 그 회피는 제주살이에 실패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절망감과 쪽팔림에 퇴사를 결정했다. 일을 위해 제주로 왔는데 그 일이 나를 괴롭혔고 결국 끊어내기로 한 것이다.
가족들은 다 괜찮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돌아가면 후회할 거라는 확신이 내게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후회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한 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2년만 더 이곳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천천히 적었다. 따박따박 월급을 받던 월급쟁이가 프리랜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따지고 보면 한 끗 차이인데 그 한 끗이 그렇게 겁났다. [pp. 26~28]
제주에서의 짧은 생각[斷想]
나는 줄곧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제주에 처음 입도해서 지내는 동안 내 기분은 자주 태도가 되었다. 전보다 더욱 예민해져 때로는 나조차 나의 예민함이 어려웠다. 제주와 서울의 시간은 상이하게 흘러간다. 천성이 부지런하다 못해 일하다 죽을 팔자인지 나는 느리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나태함을 견디지 못했다. 고요함에 적응하여 이제는 오후 7시 10분이면 집에 들어오는 일상을 보낸다. [p. 54]
“너 나한테 왜 백패킹 가자고 했어?”
“……”
“우리 집에 언제 가?”
“아직 아냐.”
“역시 캠핑은 나랑 안 맞아.”
이 지난한 캠핑과 백패킹 과정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내가 여전히 잘 쉴 줄 모른다는 것. 주말에도 꽉 채워 쉬는 것보다 ‘무엇’을 하는 편이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잘 쉬어야 그 에너지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인데 마음 편히 쉬지 못했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캠핑의 쉬어감을 제대로 누리진 못했다. 잘 쉬는 법을 찾아 긴 터널을 걷고 있다. 그래도 잘하고 있다. 여전히 도전하고 있으니까. [pp. 120~121]
많은 한국인들이 그렇듯 저자도 쉬는 법, 느리게 사는 법을 모르고 살았다. 아니 위에 인용한 문장처럼 그런 것들을 나태하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삶의 태도는 각자 가치관에 따라 다르기에 내가 뭐라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가치관을 건드리는 것은 선(線)을 넘는 행위니까. 하지만 저자가 제주에서 프리랜서로, 사진을 업(業)으로 해서 살아가기 이전의 삶은 우리들 월급쟁이들의 일반적인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TV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을 보듯 이 책을 읽게 되는가 보다.
매번 같은 지붕, 같은 골목길이라도 그 순간이 좋다. 온전한 순간을 누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반복되는 일상이 나에겐 어느 무엇보다 가치 있고 소중하니까. 누군가는 지루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느린 리듬의 고요함이 값지다. 카메라에 일상을 담겠다는 생각이 쌓이고 쌓여 나의 지구력이 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기록하며 아주 오래 걷고 싶다. [p. 131]
적어도 내가 행복해지길 바란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미흡함이 없는 전문가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도 가끔은 나도 엇나가고 싶다. 당장 오늘 끝내야 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지면 어떻게 될까 고민한다. 조금 더 애쓰고 조금 덜 여유롭거나, 조금 덜 애쓰고 조금 더 여유롭거나.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선택하며 살까. [p. 47]
왠지 이 부분에서 ‘제주 살이’에 적응한 듯한 저자의 모습이 보이는 듯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제주의 관광명소나 사적지(史跡地)의 얘기는 없어도 “제주는 잘 있습니다”라는 제목에서 ‘잘 있습니다’에 방점이 찍힌 듯한 일상이 담긴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에 읽은 다른 책도 SNS를 활자로 옮긴 듯한, 소소하면서도 일상적인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였다.
나이가 들수록 타인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이 어려워진다. 마음 맞는 사람보다 맞지 않는 사람이 더 선명히 보이고, 나를 지키기 위해 사소한 부분에서도 까탈을 부리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소통하고 관계를 맺으며 성장한다. 혼자가 좋을지라도, 대체로 홀로 시간을 보내더라도 우리는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다. 나는 친구나 사람의 소중함을 오롯이 혼자가 된 이후 제대로 깨달았다.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구나. 사람으로 버텨가는 것이구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나를 일으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마다의 위로를 건네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생긴다. [p. 161]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지위나 명성을 가질수록 타인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이 어려워진다. 아마도 그래서 이런 류의 책이 유행하는 것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바쁘고 힘든 하루가 행복하다. 여름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 된다. 즐겁게 나아가고 있음에 감사하며 겸손함을 잃지 않기로 다짐한다. 손님 한 분 한 분을 어떻게 사진에 남길지, 그들만의 분위기를 담을지 고민하기로 한다. 지난 일들에 집착하고 지난 사람들을 미워하며 그 순간에 갇히지 않기로 한다. [p. 35]
* 이 리뷰는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상상출판’으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1) 2020년 제주도 방문관광객 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여행경비 만족도가 2019년에 비해 21% 하락했고, 제주 여행에서 불만족했던 점으로 비싼 물가를 대답한 비율이 54.9%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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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