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카테고리

stonecoldsc
- 작성일
- 2022.4.18
전쟁일기
- 글쓴이
- 올가 그레벤니크 저/정소은 역
이야기장수
부끄러운 고백들부터 해야겠다. 내게 우크라이나라는 나라의 첫 번째 기억은 학창 시절 지리 수업 때 교과서에 언급된 부분이었다. 텅스텐이 많이 나는 나라라고 쓰였던. '나든가 말든가, 그게 뭐 어쨌다고' 하며 넘어갔다. 졸업 이후 '위닝 일레븐'이라는 축구 게임이 한창 인기를 끌었고, 우크라이나는 그 무렵 '무결점 스트라이커'라 불리던 쉐브첸코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텅스텐의 나라에서 그 존재감만 훨씬 커졌을 뿐이었다.
이후로는 그 존재감마저 퇴색되다가 올해 초, 그 나라는 전 세계에 전쟁 국가로 이름나게 되었다. 러시아와의 역사를 이런 저런 책들과 영상으로 찾아보다 언급했던 저 기억들이 부끄러움으로 도지면서 그들을 위해 뭐라도 해야지 싶던 즈음에 이 책을 알게 되었고 해서 고민 없이 구입했다. 사은품으로 배송 받은 우크라이나 팔찌를 착용한 채로.
작가의 말에서부터 눈에 확 들어오는 문장이 있다.
"때론 상황들이 우리보다 강할 때가 있다"
특히 이 책의 작가처럼 앞으로의 삶을 늘 구체적으로 계획하며 사는 이들에게 그런 상황은 그 자체로 지옥과 같을 터. 누군가 그랬다지. 신이 있다면 우리네 인간을 가장 비웃을 때가 바로 우리가 계획이라는 걸 세울 때라고.
당장에 들려오는 포격과 총 소리는 작가로 하여금 30여 년의 삶을 10분 안으로 정리하게 만들었다. 10분 내로 그 자리를 떠야 하는데 그 시간 안에 챙겨야 할 것들을 다 챙기고 버려야 할 것들은 다 버려야 했다. 그리고 그 버림 가운데엔 가족이 있었다.
일기 후반부에는 매우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이건 옳지 않아. 사람은 '민족 소속'이 아닌데."
폴란드에서 사는 러시아 여성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날의 일기다. 그녀는 폴란드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데 전쟁이 터지자 수많은 이들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고. 그 말을 들은 저자가 일기로 남기며 쓴 말이다. 저자에게 그녀는 '수호천사'였다고 이어서 덧붙인다.
책이 얇고 그나마도 그림 일기라서 읽는데 오래 걸리는 건 아니지만 여운이 오래 남기 때문에 그 어떤 벽돌책보다도 어렵고 두껍게 읽힐 수도 있다. 저자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그와 같은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의 무사 안녕을 기원할 뿐이다. 이것 밖에 할 수 없음이 다시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