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ㄴ아무튼, 서평

흙속에저바람속에
- 작성일
- 2022.12.10
아무튼, 잠
- 글쓴이
- 정희재 저
제철소
잠이 (말을 걸어) 오는 이야기
<아무튼, 잠>을 읽고
자장가는 아이를 재울 때 부르는 노래다. 나이가 들면 개인의 취향에 따라 무음, 백색소음, 클래식, 발라드, 팝송 등 다양한 장르로 바뀌게 된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어서 잠이 오길 바라는 우리의 마음일 것이다. 그렇게 자장(磁場)과도 같은 잠자리에 누워 자장자장 잠을 청하는 우리에게 잠은 마치 눈꺼풀을 한없이 아래로 끌어당기는 자력처럼 다가온다. 아무튼 시리즈의 53번째 책의 주제가 ‘잠’이라는 얘기를 듣고 <아무튼, 잠>을 읽기가 조금 망설여졌다. 언제나 그렇듯 아무튼 시리즈의 책들이 가진 크기와 무게는 허리디스크 질환자가 누워서 독서하기에 안성맞춤이지만, 읽다가 꾸벅 졸다가 책을 떨어뜨리진 않을지, 아니면 그 충격도 감지 못하고 곤히 잠에 빠져드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도입부에서 만난 “인생은 눕고 싶어 하는 시간과 누워 있는 시간으로 구성돼 있다”는 문장에 저자보다 더 격하게 공감하며 역시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을수록 독자의 두 눈은 오던 발길을 돌리는 잠을 건성으로 배웅하고, 잠에 관한 저자의 생각과 경험이 펼쳐져 있는 활자들의 밭을 헤쳐나갔다.
하루 내내 섣부른 마음이 튀어 나가지 않도록 단속하고 견딘 끝에 받은 보상. 밤은 지친 인간을 감싸는 검은 붕대이자 효과 빠른 진통제다. 밤이면 새장에 검은 천을 씌워주듯, 우주가 어둠의 장막을 늘어뜨려 인간을 진정시키는 시간. 대다수에게는 부활이 보장된 안전한(?) 죽음의 시간이기도 하다.(75쪽)
잠은 무죄라고 외치는 저자는 이십대 후반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떠난 티베트 여행에서 만난 한 스님에게서 “난 잠자리에 들 때가 젤 행복하더라.”라는 ‘길티 플레저 고백’을 듣고서야 여태껏 잠자는 대신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책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죽으면 실컷 잘 텐데 왜 아까운 시간을 잠으로 낭비하냐!”, “네 시간 자면 합격하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라는 말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잠에 대해 관대하지 못한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잠에 관한 과학적 근거와 연구결과를 토대로 반박할 수 있는 요즘이지만, 여전히 잠은 함부로 쓰기보단 꼭 필요할 때를 대비해 아껴둬야 할 무엇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잠을 절약(節約)하는 데에 개인의 지극한 의지도 한몫을 하겠지만, 자의든 타의든 각성제와 같은 약품의 힘을 빌어서라도 잠을 쫓겠다는 의지로 표출되었던 저자의 개인사와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되돌아보면서 ‘잠의 절약사(節約史)’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는 고교 1학년 첫 중간고사 성적표에 적힌 등수를 본 뒤 충격과 함께 ‘타이밍’을 먹었다. 그보다 한 세대 앞선 1960~70년대에 타이밍은 수많은 노동자의 ‘인권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수면권’도 빼앗아간 약품이기도 했다는 사실에 가슴 한 편이 답답해졌다.
잠을 쫓기 위해 카페인과 각성제를 찾는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저자는 고용량 카페인 음료나 에너지 드링크류를 마시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더 간단하고 독하게 잠을 억압하기 쉬워진 시대라고 진단한다. 어른들이 수면(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고 성공과 행복의 조건을 혁신적으로 성찰하지 않는 한 다음 세대도 만성 수면 부족 사회에서 무리하며 분투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여 꼬집는다. 나 또한 그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라도 잠을 절약할 게 아니라 ‘절약(節藥)’, 즉 잠을 절약하기 위한 약을 끊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잠 덕후도 장비병을 겪는다는 점이 퍽 흥미로웠다. 그동안 아무튼 시리즈에서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의 장비병을 다스리기 위해 자원과 시간을 투자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자도 꿀잠을 위한 ‘수면사원’에서 자기만의 침실과 침구류를 구비하는 데에 진심을 다한다. 이릍테면, 자다가 몸이 배겨 무의식적으로 끌어안기도 하고 몸에 닿는 게 거슬려서 침대 구석으로 뻥 차버려도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며 한 번도 저자를 거부한 적 없는 ‘보디 필로’, 앱과 연동되어 수면 습관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체크해주었으나 앱이 기록한 잠에 대한 기록을 갱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오히려 수면의 질을 낮추는 역설을 보이며 '그냥 베개'로 다운그레이드된 ‘스마트 베개’ 등이 있다.
불면증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잠이 간절하게 필요한 인감임을 잊어야 한다. 잠을 의식해서 잠 못 드는 자신과 대치해선 안 된다. 불면의 불안을 곱씹을수록, 잠을 갈구할수록 각성 수준은 높아진다. 알면서도 금기 사항을 정확히 어기고 있다. 맙소사. (110쪽)
언제나 불면 말고 숙면을 바라는 우리에게는 각자만의 잠자는 습관이 있다. 자기만의 루틴을 지켰음에도 불면의 밤을 맞이한 저자는 새벽 2시부터 ‘아침에 가까운’ 5시까지 한 시간 단위로 떠오른 불면에 관한 단상을 들려준다. 마침내 샬럿 브론테, 마크 트웨인, 빈센트 반고흐 등 불면증에 시달렸던 유명인들의 이름을 떠올릴 즈음에서야 그는 잠이 들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내 인생에서 가장 미치도록 자고 싶었던 때가 떠올랐다. 다름 아닌 고3 수능시험 전날이었다. 시험을 앞두고 고사장을 미리 둘러본다는 이유로 오전 수업만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밀려드는 졸음과의 사투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한 시간 넘게 잠을 자버린 것이었다. 그 결과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새벽 5시가 되어서야 선잠에 빠졌다가 곧 고사장으로 향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따금 찾아오는 불면의 밤이면 그때를 생각하면서 ‘만약에’라는 가설을 세우고 또 무너뜨리며 잠을 갈구하곤 한다.
우리에게 자는 동안 맹수나 적에게 공격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던 유전자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친해져서 안심하기 전까지는 무방비 상태의 모습을 잘 보이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에게 잠든 모습을 보인다는 건, 개체 보존의 본능을 잊어도 좋을 만큼 상대를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다.(42쪽)
그동안 무수한 낮과 밤에 같은 공간에서 두 사람(혹은 그 이상)이 같이 자면서 잠에 대한 본능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잠을 자는 행위에 숨겨진 신뢰감은 책을 읽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저자는 그때 그 시절의 연인을 추억하며, 또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와 혁명단의 전속 사진가였던 알베르토 코드라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누군가에게 잠든 모습을 보이는 것’의 의미를 짚어준다. 이 대목에서 『중심:마음을 지키는 중국 그림의 힘(김선현 저, 자유의길, 2019)』이라는 책에서 만난 「이상적 깊은 잠 理想的?睡(수이지안구오 隋建國 作)」과 함께 서평을 통해 잠과 죽음에 대해 썼던 단상이 떠올랐다.
[출처 : www.baidu.com]
중국 근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 저 천하 금수강산이라는 카펫 위에 단잠을 자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영면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저자의 말처럼 잠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어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오는데 순서가 있지만 가는데 순서는 없다는 말을 애써 외면한 체, 우리는 기본적 욕구와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온 힘을 쏟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면 죽는다는 것을 실감하는 때가 온다고 한다. 웰빙 시대를 지나 웰다잉 시대를 살아야하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중심:마음을 지키는 중국 그림의 힘』 서평 中)
‘잘 자고 일어나 잘 살고 싶다’는 저자의 작지만 큰 소망이 담긴 <아무튼, 잠>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잠을 억압한 앞잡이가 (수면계의) 파수꾼이 되기까지의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살다보면 알고도 어쩔 수 없이 수면을 억압하는 앞잡이 노릇을 자처할 때도 있을 테지만, “숙면 없이는 최소한의 내면조차 가질 수 없다”는 그의 말처럼 잠은 누구에게나 불가역적이고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를 본받아 ‘수면계의 파수꾼’이 되어 '적어도 잠이 부족해서 기품과 연민을 잃는 일은 없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저자의 마음과 실천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책을 덮으며 아이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에 낮잠과 밤잠을 지켜보던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어느 낮과 밤에는 일과 육아에 지쳐 아이를 재우다 같이 자기도 했지만, 누군가의 잠을 파수(把守), 즉 경계하여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보람찬 일인지를 잊고 살았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자기는 물론 타인의 잠을 지키며 돌보는 ‘잠 파수꾼’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베갯맡에 놓아둔 <아무튼, 잠>이 오늘밤에는 또 어떤 잠이 '말을 걸어' 오는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