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속에저바람속에
  1. ㄴ세계문학(산)책

이미지

도서명 표기
내 방 여행하는 법
글쓴이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저
유유
평균
별점8.9 (11)
흙속에저바람속에

42일간의 방구석 여행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읽고



 



 



  길고긴 장마가 끝나자마자 불볕더위가 기승을 피우고 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 피서(避暑)하고 싶다가도 늘 그렇듯이 피서(避書)만 한 게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때마침 8월 북클러버의 주제가 ‘여행’이라서 어떤 책을 읽을까 하며 도서관 서가를 기웃거리다 자문자답해본다. 수많은 여행기 중 으뜸을 꼽으라면, 과연 어떤 작품을 선택할까? 18세기 초에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빼놓을 수 없을 듯한데, 18세기 말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라는 작가가 쓴 여행기(의 제목부터)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가 여행한 장소는 걸리버처럼 소인국도, 거인국도, 날아다니는 섬도, 말들의 나라도 아닌 '자기만의 방'이었다. 무려 42일간의 일정으로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알찬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담은 책 <내 방 여행하는 법>을 펼쳐본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제목에 반해 작가가 변죽만 울리다 마는 내용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군인이자 작가이며 화가인 저자의 이력이 고스란히 묻어난 글이 독자로 하여금 방구석 여행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 책은 그의 방구석 여행기이자 ‘가택연금기’라고 볼 수 있다. 1790년에 모 장교와 결투를 벌인 대가로 당대 법률에 따라 42일간의 가택연금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자기 방 여행에 관한 글을 쓸 계획이었던 그에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여행을 시도할 시간과 공간이 주어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준비할 건 별로 없으나 ‘상상력’ 하나만큼은 꼭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무료해져서 책을 덮게 될지도 모른다.



 




로마와 파리를 보고자 그 먼 길을 수고스럽게 떠났던 여행자들을 비웃으며 우릴랑 하룻길 조금씩 가자! 우리를 가로막을 게 무언가. 우리 자신을 기꺼이 상상에 내맡기고 그가 이끄는 대로 가면 될 것을.(16쪽)




 



  당시 법과 관습이 신체의 자유는 제한하였을지언정 그의 정신까지는 어찌하지 못했다. 저자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사유(思惟)와 회의(懷疑)라는 상상의 날개를 펼쳐 자유자재로 방을 날아다닌다. 이를테면 그가 방 안에 놓인 탁자와 의자에 머물며 편지를 쓰고 보관해둔 편지들을 읽으면서 젊은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이따금 나도 그러하다는 생각에 예나 지금이나 편지글이 주는 위로와 공감의 힘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또 침대에 누워 창밖의 풍경을 예찬하기를 넘어 ‘침대란 어머니의 산고 끝에 아이가 태어나고, 길고도 짧은 잠을 거듭 자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곳’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저자의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 방에서 지내는 일을 군대의 숙영(宿營)에, 어느 날 의자에서 넘어진 것을 역마차가 전복되는 사고에 빗대어 위트 있게 표현하기도 한다.



  책에는 저자가 화가로도 활동해서인지 유독 회화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침대를 오가는 길 위에서 벽에 걸린 미술작품들을 보며 자신의 견해와 그림에 얽힌 경험담을 들려준다. 회화와 음악이라는 두 예술 장르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지 논하는 부분에 이르러 그의 목소리는 최고조에 달한다.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줬는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으리라. 미지의 독자가 이 책을 읽고 그의 주장을 반박해보는 일도 독서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될 것 같다. 여기서 저자가 내놓은 퀴즈 하나를 풀어보자. 독자는 자기 자신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 말고 자신 있게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다른 그림이나 광경을 알고 있는가?(112쪽) 정답 역시 책에서 직접 확인하면 좋을 듯하다.



  과연 그는 무사히 42일간의 방구석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하였을까? 책을 덮으며 무대와 객석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 즉 ‘제4의 벽’을 넘나드는 주인공의 모노드라마 한 편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기 생각만 늘어놓는 일방통행이 아닌 독자에게 말을 걸고 또 궁리하게 만드는 작가의 문체 때문이 아닐까. ‘생각과 발견의 거리를 제공하고자 한’ 저자의 의도가 적어도 나에겐 적중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만일 그가 살아 있었다면 ‘내 방 여행하는 법’이라는 주제로 요즘 유행하는 너튜브 브이로그를 진행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잠시 해본다. 어쩌면 이 책이 다른 독자에게는 무료함을 이겨내기 위한 저자의 몸부림 혹은 일종의 정신승리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듯 ‘여행은 발견’이지 않는가. 익숙함을 떠나 낯섦과 조우하고 그 여정 속에서 우리가 몰랐던 자기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나를 찾아내기도 한다. 저자 또한 자기 방 안에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냈으며, 그 기록을 다음 여행자를 위해 남겨둔 것이 바로 <내 방 여행하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좋아요
댓글
1
작성일
2023.04.26

댓글 1

  1. 대표사진

    추억책방

    작성일
    2023. 8. 8.

흙속에저바람속에님의 최신글

  1. 작성일
    2025.5.6

    좋아요
    댓글
    1
    작성일
    2025.5.6
    첨부된 사진
    20
  2. 작성일
    2025.5.4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5.4
    첨부된 사진
    20
  3. 작성일
    2025.5.2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5.2
    첨부된 사진
    20

사락 인기글

  1.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7
    좋아요
    댓글
    101
    작성일
    2025.5.7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2.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8
    좋아요
    댓글
    60
    작성일
    2025.5.8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3.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7
    좋아요
    댓글
    118
    작성일
    2025.5.7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예스이십사 ㈜
사업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