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ㄴ세계문학(산)책

흙속에저바람속에
- 작성일
- 2023.8.5
내 방 여행하는 법
- 글쓴이
-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저
유유
42일간의 방구석 여행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읽고
길고긴 장마가 끝나자마자 불볕더위가 기승을 피우고 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 피서(避暑)하고 싶다가도 늘 그렇듯이 피서(避書)만 한 게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때마침 8월 북클러버의 주제가 ‘여행’이라서 어떤 책을 읽을까 하며 도서관 서가를 기웃거리다 자문자답해본다. 수많은 여행기 중 으뜸을 꼽으라면, 과연 어떤 작품을 선택할까? 18세기 초에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빼놓을 수 없을 듯한데, 18세기 말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라는 작가가 쓴 여행기(의 제목부터)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가 여행한 장소는 걸리버처럼 소인국도, 거인국도, 날아다니는 섬도, 말들의 나라도 아닌 '자기만의 방'이었다. 무려 42일간의 일정으로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알찬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담은 책 <내 방 여행하는 법>을 펼쳐본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제목에 반해 작가가 변죽만 울리다 마는 내용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군인이자 작가이며 화가인 저자의 이력이 고스란히 묻어난 글이 독자로 하여금 방구석 여행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 책은 그의 방구석 여행기이자 ‘가택연금기’라고 볼 수 있다. 1790년에 모 장교와 결투를 벌인 대가로 당대 법률에 따라 42일간의 가택연금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자기 방 여행에 관한 글을 쓸 계획이었던 그에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여행을 시도할 시간과 공간이 주어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준비할 건 별로 없으나 ‘상상력’ 하나만큼은 꼭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무료해져서 책을 덮게 될지도 모른다.
로마와 파리를 보고자 그 먼 길을 수고스럽게 떠났던 여행자들을 비웃으며 우릴랑 하룻길 조금씩 가자! 우리를 가로막을 게 무언가. 우리 자신을 기꺼이 상상에 내맡기고 그가 이끄는 대로 가면 될 것을.(16쪽)
당시 법과 관습이 신체의 자유는 제한하였을지언정 그의 정신까지는 어찌하지 못했다. 저자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사유(思惟)와 회의(懷疑)라는 상상의 날개를 펼쳐 자유자재로 방을 날아다닌다. 이를테면 그가 방 안에 놓인 탁자와 의자에 머물며 편지를 쓰고 보관해둔 편지들을 읽으면서 젊은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이따금 나도 그러하다는 생각에 예나 지금이나 편지글이 주는 위로와 공감의 힘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또 침대에 누워 창밖의 풍경을 예찬하기를 넘어 ‘침대란 어머니의 산고 끝에 아이가 태어나고, 길고도 짧은 잠을 거듭 자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곳’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저자의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 방에서 지내는 일을 군대의 숙영(宿營)에, 어느 날 의자에서 넘어진 것을 역마차가 전복되는 사고에 빗대어 위트 있게 표현하기도 한다.
책에는 저자가 화가로도 활동해서인지 유독 회화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침대를 오가는 길 위에서 벽에 걸린 미술작품들을 보며 자신의 견해와 그림에 얽힌 경험담을 들려준다. 회화와 음악이라는 두 예술 장르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지 논하는 부분에 이르러 그의 목소리는 최고조에 달한다.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줬는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으리라. 미지의 독자가 이 책을 읽고 그의 주장을 반박해보는 일도 독서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될 것 같다. 여기서 저자가 내놓은 퀴즈 하나를 풀어보자. 독자는 자기 자신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 말고 자신 있게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다른 그림이나 광경을 알고 있는가?(112쪽) 정답 역시 책에서 직접 확인하면 좋을 듯하다.
과연 그는 무사히 42일간의 방구석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하였을까? 책을 덮으며 무대와 객석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 즉 ‘제4의 벽’을 넘나드는 주인공의 모노드라마 한 편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기 생각만 늘어놓는 일방통행이 아닌 독자에게 말을 걸고 또 궁리하게 만드는 작가의 문체 때문이 아닐까. ‘생각과 발견의 거리를 제공하고자 한’ 저자의 의도가 적어도 나에겐 적중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만일 그가 살아 있었다면 ‘내 방 여행하는 법’이라는 주제로 요즘 유행하는 너튜브 브이로그를 진행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잠시 해본다. 어쩌면 이 책이 다른 독자에게는 무료함을 이겨내기 위한 저자의 몸부림 혹은 일종의 정신승리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듯 ‘여행은 발견’이지 않는가. 익숙함을 떠나 낯섦과 조우하고 그 여정 속에서 우리가 몰랐던 자기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나를 찾아내기도 한다. 저자 또한 자기 방 안에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냈으며, 그 기록을 다음 여행자를 위해 남겨둔 것이 바로 <내 방 여행하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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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