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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듀엣
글쓴이
김현 저
한겨레출판
평균
별점9.5 (17)



<고스트 듀엣> | 김 현



한겨레출판 | 13500원



한 줄 평 | 현대시를 소설로 구현해보기



 



 




시인이 소설을 쓴다면?




 



<고스트 듀엣>. 유령이 된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춤출 것만 같은 제목이다. 적당히 아름답고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주인공들은 약간 구질구질하고,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은 계속 튀어나와 뇌를 괴롭힌다.



 



책을 다 읽고 이틀간 고민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설일까. 나만 의미를 못 찾은 걸까. 이 소설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표지만 봐도 숨이 턱 막히던 차에 드디어 깨달았다. 이 소설의 의미는 거대한 의미가 없다는 데에 있다. 이는 현대시가 등장한 맥락과도 일치한다.



 



현대시는 거대한 목적을 거부한다. 계몽, 이념을 미뤄둔 채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것에서 시 알(卵)을 찾는다. 성별, 성 지향성, 연령, 장애 때문에 화자가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이 화자로 등장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개인적인 건 시가 아니다’라고 하지만, 현대시는 특정 계급·성별·성 지향성이 ‘보편적’이라는 규정에 대한 의도적인 거부에서 태어났다. 김현 작가가 ‘시인’으로 데뷔했다는 점을 참고하면, <고스트 듀엣>의 현대시적인 내용과 형식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비(非)퀴어보다 퀴어가 많은 소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책을 펼쳐보자. 상민, 형우, 주미, 석찬, 승남, 영수, 일형, 현상…. 소설 내에서 퀴어로 ‘명명’된 인물이다. 미처 눈치채지 못한 인물까지 포함하면 퀴어가 아닌 인물보다 퀴어인 인물이 더 많다. 소설에서 퀴어들은 서로 사랑하고(“그러니까 나야, 축구야?” “나는 너를 생각하면서 뛰어. 그럼 하나도 안 힘들거든.”) 남들에게 들킬까 봐 두려워하고(“나는 우리가 사귀는 걸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사실, 나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만나지도 못하게 될까 봐, 무서워.”) 조롱 받고(“야, 너 남자 좋아하냐?” “뭐?” “똥꼬충이냐고.”) 은어를 사용해 자조한다(“근데 주미한테 네 사진 보여줬을 때 주미가 너 안 만난다고 했어. 알아?” “알아, 주미는 긴 머리 부치 안 좋아하잖아.”). 작가가 퀴어를 묘사할 때의 거리감은 매우 가깝다. 문학에서 퀴어와 죽음은 신기할 정도로 잘 엮이는데, 이 가까운 거리는 관습화된 퀴어-죽음 연결의 거부감을 상쇄시킨다.



 



이 소설을 더욱 현대시로 만드는 지점은 '불친절한 설명'에 있다. 사람들이 떼거리로 나오는데, 작가는 이름과 한줄소개만 틱 던져놓고 가버린다. 표제작인 <고스트 듀엣>을 예시로 들어보자. 주인공은 상민과 형우다. 형우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상민은 형우를 홀로그램으로 회상한다. 이제 형우 얘기를 시작할 타이밍인데, 갑자기 퀴어 친구 ‘주미’가 등장한다. 그래, 조연 등장 타이밍이구나. 이제 주미 서사가 깊어지려나 했더니 ‘석찬’이라는 친구도 있단다. “석찬이 보고 싶었다. 석찬은 상민이 대학에서 만나 유일하게 관계를 이어온 친구로 주미의 연인이었다……(p.69)”



 



모든 소설은 설득이다. 주인공에게 몰입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해줘야 하는데, 이 소설은 일부러 그러지 않는다. 우리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당장 어제 한 행동도 “내가 왜 그랬지?”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렸을 때의 꿈과 전혀 상관없는 일터에서 에너지를 얻고, 또 소진한다. 소설처럼 착착 정리되고, 쏙쏙 이해되는 인생은 없다. 맥락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길 바라는 건 독자의, 나의 욕심이다.



 



잘 읽히는 소설은 아니었다. 평소 자주 읽던, 정이 가는 류도 아니었다. 하지만 현대시의 특성을 소설에서 볼 수 있어 즐거웠다.





 




좋은 문장 모음




 



그 시절의 주미가 독서실 책상에 써 붙여놓고 한 번도 떼지 않은 문장이 있었다.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상민은, 그래서 오늘도 무너졌군, 하며 잠든 주미를, 우는 주미를, 넘어진 주미를 자주 놀렸더랬다. 주미가 푹 자고 웃으며 일어나길 바랐다. 왜 하필 그런 문장이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어째서 무너지고 무너졌다는 말을 우리는 붙들고 있었을까. (p.67)



 



넷은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상민의 집에 자주 모여 놀았다. 같이 영화 보고, 음악 듣고, 밥 먹고,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잠들었다. 한 사람의 집을 한 사람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자 집 이름도 ‘사루비아네’로 지었다. 여린 마음으로 피워낸 사랑을 너에게 주겠다는 김광석 노래에서 따온 거였다. (p. 70)



 



원준은 가람이 어떤 애였냐면, 운을 떼고도 한참이 지나 오늘부터 사귀는 걸로 할까, 고백했다. 도연은 그 저녁의 온도와 습도, 분위기에 상관없이 그러자고 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애도할 수 있는 사람이면, 자기 곁에 두고 싶었다. 역시 선이 고운 사람, 이라고 도연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마음을 스스로 대견하게 여겼다. (p.228)



 



“그러니까 나야, 축구야?”



철희 입장에서는 자못 비장한 밸런스 게임의 결과는 싱거웠다. 수호는 경기 때처럼 위기의 순간에 더 침착했고, 수비와 공격에 모두 능한 선수답게 철희를 품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정답을 말했다.



“나는 너를 생각하면서 뛰어. 그럼 하나도 안 힘들거든.”



(p. 247)



 



나는 우리가 사귀는 걸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사실, 나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만나지도 못하게 될까 봐, 무서워.



철희는 알리고 싶은 게 아니라 숨기고 싶지 않은 거야, 쓰던 말을 모두 지웠다. 무서워, 라는 세 글자가 마음에 덜컥, 걸려서였다. 무섭구나, 무섭지, 무서워, 중얼거리면서 철희는 무서움을 이기는 말을, 무서움을 물리칠 말을 빨리 찾아서 수호에게 건네주고 싶었다. 미안해, 라고 쓸까. 아니야. 세 글자로는 부족해. 철희는 두 손을 모아 코와 입을 가린 채 아- 하고 낮게 소리 낸 후에 마음을 세우고 메시지를 남겼다.



보고 싶어.



무서워, 미안해, 라는 말보다 한 글자가 더 많은 말. 그러니까 뭐가 있어도 있겠지 싶은 말. (p. 252)



 



마음은 어디에도 둘 수 있는 거라서 그 반짝거림에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마음은 하나가 아니기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는데도 콧노래를 부르며 가는 행인에게, 작은 카페 창가에 앉아 돋보기를 끼고 신문을 읽는 사람에게도 마음을 두었다.



(p.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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