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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덕의 불운
글쓴이
D. A. F. 드 사드 저
열린책들
평균
별점8.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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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말 19세초 시대의 반항아로서, 그의 작품은 당시에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나, 수많은 저작물이 억압되고 매장된 역사를 지닌 인물 '싸드'. 그러한 그의 사상과 저작물이 빛을 발한 건 20세기 이래인데, 인간 욕망의 긍정과 신성에 대한 부정이 자연스러워진 시대부터라 할 수 있다.



'사디즘'으로도 익숙한 그의 이름과 사상을 귀동냥으로나 접해보다 처음으로 읽은 싸드의 작품 '미덕의 불운'은 왜 당시에도 그의 작품이 억압되고 금지될 수밖에 없었는 지를 알 수 있게 하는, 현대를 사는 내게 조차 너무나 강렬하고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작품 내 자극성 자체는 그만큼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현대엔 워낙 많다 보니, 그 자체로는 견딜 만 하였고, '사디즘'과 관련된 그의 이름, 귀동냥으로 들은 그의 사생활, 그리고 그가 서술한 '서문'으로도 충분히 '쥐스띤느'의 불행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더 그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명저로 꼽히는 문학 작품에 이렇게 노골적이고 잔인하며, 성적인 묘사가 이뤄진다는 점은 현대에도 온갖 불행을 겪는 인물들을 다룬 소설들을 떠올려보면 여전히 파격적이었다. 200년도 더 된 소설이면서 번역된 글임에도 또 얼마나 몰입감이 있는지, '쥐스띤느'를 억압하는 악덕의 인물들이 너무나도 역겹고 가증스러웠다.



하지만, '쥐스띤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의 '정당화' 논리를 깨기란 여간 쉽지 않다. 극단으로 치우쳤을지언정, 분명 악덕의 논리들은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이래, 근대 문명에 이바지한 논리들과 닮은 부분이 있으며, 종교적 미덕과 신성, 섭리에 대한 거부, 그리고 개인의 욕망에 따라 자유로이 사는 삶에 대한 주장 또한 니체 이래 수많은 현대 철학과도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다.



그에 반해, '쥐스띤느'의 미덕이란 그녀가 얼마나 순진하고 순박하고 순수하며 신실한 지를 보여줄 뿐, 그 자체는 '미덕'이라는 이름에 비해 아무런 힘이 없다. 미덕은 그녀를 끊임없이 불행으로 몰고갈 뿐이고, 악덕을 제압하고 몰아내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신실한 쥐스띤느의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결말과 '악덕'의 화신처럼 삶을 구가해 온 언니 '쥘리에뜨'의 갑작스런 회개는 더더욱 쥐스띤느가 절대적 가치로 여겨온 '미덕'을 초라하고 우습게 만든다. 여기에 '싸드'의 생애까지 고려 했을 때, '미덕의 불운'은 미덕을 숭상하는 자들이 겪는, 예수가 겪은 것과도 같은 필연적인 '고난'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미덕' 그 자체에 대한 조롱이라 생각한다.



'신'과 '종교적 섭리'에 기댄 노예와 같은 '미덕'은 '악덕'에 압도될 수 밖에 없다. 싸드가 보기에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인간의 욕망'에 기댄 '악덕'은 끊임없이 융성하고 번영한다. 그렇다면, 싸드는 '미덕'을 조롱하고 '악덕'을 찬양한 것일까? 분명 싸드는 개인이 자유롭게 '인간의 욕망'에 따라 사는 삶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악덕'을 바라였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소설에서 묘사하는 '깡그리 썩은 세상'은 악덕이 만연하는 세상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싸드는 <미덕의 불운>에서 '미덕'을 조롱하고 비판했을지언정, '악덕'을 옹호했다 보는 것은 비약이다. '싸드'가 바랐던 것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긍정이다. 악덕 행위의 근간이 되는 '인간의 욕망' 그 자체를 악덕으로 인식하는 것은 '신' 따위에서 비롯된 '미덕'이라는 가치에 기초한다. 이는 수많은 신에 대한 논증들처럼, 순환 논증과도 같다. 신과 섭리를 거부하고, 그에 파생된 기존의 '미덕'을 파쇄함으로써 '인간 욕망'에 대한 긍정이 이뤄지고, 이를 기초로 '신성'이 아닌 '인간 중심'의 '미덕'을 세울 때 비로소 '악덕'이 그 자신의 번영을 구가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음을 인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p.7 철학의 승리는, 섭리가 인간과 관련하여 스스로에게 설정한 궁극적 목표에 이르기 위한 길을 덮고 있는 어두움 위에 빛을 던져 주는 데 있을 것이며,



p.8 따라서 철학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유형의 궤변을 경계함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며, 아직 일말의 선한 원칙을 간직하고 있는 부패한 영혼에게 제시된 불운한 미덕의 예들이, ······ 그 썩은 영혼을 선의 길로 인도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줌은 절대 불가결한 일이다.




서문에서 '신', '종교적 섭리'가 아닌 '철학'이 중요함을 밝히는 점, '일말의 선의 원칙'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언급으로 보건대, 싸드는 '인간 욕망'에 기초한 '미덕'과 이를 인도하고 악덕의 궤변을 논파하며 미덕의 가치를 세우는 '철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단 점에서 그가 신성에 대한 부정과 인간 욕망에 대한 긍정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없이 큰 불행들을 겪는 '쥐스띤느'의 미덕을 조롱하는 듯한 싸드의 이야기는 어느 한 지점에서 비로소 '쥐스띤느'의 미덕이 새롭게 느껴진다. 바로 소설 후반부 '뒤부와 부인'과 나누는 대화에서이다. 이 대화에서 뒤부와 부인은 여느 악덕의 인물들처럼 아주 간사한 논리들로 '악덕'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며, '미덕'을 비난하고 쥐스띤느에게 '악덕'을 따르기를 종용하는데, 쥐스띤느는 이를 반박한다.




p. 193 "······저의 의식은 어린 시절부터 부인께서 말씀하신 그 편견들을 극복하는 데 익숙해지지 못하였는데, ······무슨 자격으로 부인께서는, 그 짜임새가 당신의 생각과는 다른 저의 생각이, 당신과 똑같은 사유 체계를 수용하기를 요구하십니까?"




작품 후반부에 이르면 쥐스띤느는, 물론 여전히 '신'과 '섭리'를 이야기하나, 그녀가 따르는 미덕은 더이상 '신'에 기초한 미덕이 아닌, 자신의 욕망에 따른 '미덕'이다. '미덕'의 내용 그 자체가 변화한 것이 아니라, '미덕'의 기원에 대한 그녀의 인식이 재편된 것이다. '신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인간은 따라야만 하고, 따라서 네가 틀렸다'와 같은 절대적 진리에 대한 신뢰와 이분법적 사고의 '미덕'이 아니다. 개인의 삶과 경험에 기초하여, 개인의 욕망에 따라 선택하여 순종하는 '미덕'이다. 다시 한 번, 번영을 이루지 못하든,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개인의 욕망에 따라 자유롭게 사는 삶을 추구하는 '싸드'의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역자가 해설에서 인용한 '여우 이야기'를 재인용하며, 싸드를 평가해보고자 한다.




p.231 <내가 학교에서 얻어들은 바에 의하면, 지혜로운 말은 미친 자의 입에서 나온다 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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