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수 리뷰

추억책방
- 작성일
- 2024.2.12
말러
- 글쓴이
- 노승림 저
arte(아르테)
2022년 개봉해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OST로 사용한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러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지만 말러의 음악은 내게 결코 쉬운 음악이 아니었다. 평소 즐겨듣는 클래식 음악들과 달리 교향곡 1번 「거인」 등 말러가 작곡한 대부분의 음악들은 어릴 적 컴컴한 동굴 속에서 느꼈던 두려움과 무거움을 떠올리게 했고,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에서 환희를 느끼게 했던 기악과 합창의 만남을 말러는 교향곡 2번, 3번, 4번(소프라노 솔로), 8번 교향곡에서 경험하게 했는데,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에서 느꼈던 감정과는 다른 낯설음과 난해함을 느끼게 했다.
책 한 권으로 말러의 심오한 음악 세계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말러에게 빠져 들게 되는 리트머스 같은 책을 만났는데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서 31번째로 나온 <말러>다.
그동안 국내 최대 인문 기행 프로젝트인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서 출간한 다수의 책을 읽어왔지만 이번 <말러>편은 여행기에 가까울 정도로 저자 노승림이 방문한 도시와 자연을 자세하게 묘사 한 것이 특징인데, 말러를 좋아하는 독자 뿐만 아니라 여행기를 즐겨 읽는 독자라면 더 없는 행복과 감흥을 전해 줄 책이라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말러의 흔적을 이정표 삼은 여행기에 가깝다. 다행히 모차르트나 베토벤에 비해 말러의 유산은 가필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도 그가 즐기던 자연 경관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방문한 도시와 자연을 필요 이상으로 자세히 묘사한 까닭은 이 책을 가지고 또 다른 여정을 떠날 독자들을 작게나마 배려하기 위해서다. - 프롤로그 중, p.15
오스트리아 그린칭에 있는 말러의 묘지부터 시작한 저자 노승림의 여정은 말러가 유년시절을 보낸 체코 이흘라바를 거쳐 지휘자로서 발돋움을 했던 독일 함부르크, 지휘자로 명성을 날렸던 오스트리아 빈을 비롯해 창작의 산실이었던 오두막이 있었던 세 곳(아테르제, 마이에르니히, 토블라흐), 마지막 예술혼을 불 사른 미국 뉴욕까지 말러의 발자취를 빠짐없이 따라가고 있다. 특히 말러가 휴가 때면 오로지 작곡을 위해 은둔했던 대자연 속에 있는 오두막을 찾아가기 위해 말러가 그러했듯이 저자 노승림이 저전거를 타며 마주한 대자연의 정취를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저자와 말러가 분명 다른 세계에 존재함에도 마치 서로 교감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광활한 풍경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자연은 다음 순서로 눈 대신 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빙하가 흘러 내려오는 물소리와 소프라노 같은 새소리, 바람에 첨벙거리는 호수의 희롱 소리, 나무와 나무 사이를 솨솨거리며 가르는 바람 소리는 다양한 악기가 동원된 한 편의 관현악곡처럼 들려왔다(중략). - p. 247
앞서 서두에 언급했지만 말러의 음악은 난해할 뿐만 아니라 왠지모를 무거움과 어두움이 느껴지는데, 말러의 인생과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말러는 유년시절 방에서 함께 생활하던 동생들이 병으로 숨을 거둔 후 시신으로 관에 실려나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봐야 했고(열 네 명의 형제 중 절반이 어린 나이에 사망한다), 가장 우애가 좋았던 동생의 자살, 알마와 결혼해 낳은 두 딸 중 첫째 딸 마리아가 다섯 살을 못 채우고 성홍열과 디프테라아로 세상을 떠나는 등 '죽음'은 말러에게 강박관념처럼 평생을 따라다닌다. 더구나 말러 자신도 심장병 진단을 받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급격히 쇠약해 지는데 말러가 선배 작곡가인 베토벤, 슈베르트, 드보르자크 등이 9번 교향곡을 작곡하거나 작곡 중 사망한 것을 보고 9번째에 작곡한 교향곡을 9번 교향곡 대신 '대지의 노래'로 이름 붙인 것에서 보듯이 말러에게 '죽음'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느끼게 된다.
말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알마 말러다. 알마는 빈 사교계에서 발을 들이며 클림트, 쳄린스키 등 연상의 여러 남자들을 만나는 등 팜므파탈의 모습을 보이는데 지인이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처음 만난 말러와 사랑에 빠져 4개월만에 결혼을 하게 된다. 말러와의 결혼생활 10년 중 8년 동안은 당시 유럽 최고의 지휘자였던 말러의 아내로서 본분을 다하지만 첫째 딸인 마리아가 성홍열로 죽자 우울증에 빠지며 그동안 억누르던 팜므파탈의 모습을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여행 중 만난 네 살 연하의 건축 지망생 그로피우스와 불륜을 저지르더니(말러는 알면서도 묵인했다고 한다) 말러 사후에는 일곱 살 연하의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와 열애를 하다가 헤어지고 다시 그로피우스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강렬하게 사랑했던 그로피우스와도 결국 이혼을 하고 불륜 관계였던 당시 연하의 무명 소설가 베르펠과 3번째 결혼을 하며 남셩 편력이란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던 알마는 말러보다 50년이나 더 살다가 유언에 따라 두 번째 남편 그로피우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열여덟에 요절한 딸 마논과 합장된다.
말러는 미완성으로 남은 교향곡 10번 자필 스케치 악보 중 4악장 마지막 페이지에 알마의 이름과 그녀를 은유하는 시를 갈기갈기 적어 놓은 낙서를 해 놓았다고 하는데 사랑했던 아내 알마의 불륜을 지켜보면서 느꼈을 말러의 복잡한 심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하겠다.
말러는 당대 최고의 지휘자라는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청중과 평단의 혹평 속에서도 자신과 사회의 모순을 똑바로 마주하기 위해 노력하며 꾸준히 작곡을 이어나갔으나 끝내 세기말 청중들에게는 외면을 받았다. 하지만 1960년대 미국의 명지휘자이자 말러 스페셜리스트인 번스타인에 의해 자신의 교향곡 2번의 표제처럼 화려하게 '부활'을 하며 지금까지 영화의 OST 등 다양한 경로로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언급했듯이 새롭되 새롭지 않은 말러 음악의 진면목을 알고 싶은 독자라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말러>는 놓치지 말아야 책이다.
우리가 말러의 음악에 적극적으로 열광할 수 있는 까닭은 그와 동시대 청중보다는 더 성숙했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직시할 수 있을 만큼 용감해진 것은 아닐까? 혹은 그런 용기를 그의 음악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 에필로그 중,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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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