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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
- 작성일
- 2024.3.21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 글쓴이
- 목정원 저
아침달
2022년 2월에 사서 2023년 10월에 읽은 이 책이 주말 내내 내 마음을 쥐고 흔들었다.
한 문단 읽고 나면 책 덮고 심호흡하고. 마음 가다듬고. 기어이 다시 읽을 작정을 하고. 그래야만 이어갈 수 있었다.
글자만 따라가다 보면 사유를 놓쳤다. 이 책을 깊게 받아들이려면 한 자 한 자 정성껏 읽어야 했다.
다 읽은 뒤 곧바로 다른 책을 펼쳤다가 세 페이지 만에 관뒀다.
대신 하루 내도록 이 책의 좋은 점을 생각했는데, 잠들기 직전에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가 밑줄 그은 문장은 모두 사람들의 움직임 뒤에 태어난 사유였다는 것을.
에세이를 읽을 때면 책을 쓴 당신 안에서만 가능한 확신들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이 고백하는 마음, 경험, 생각들은 언제나 사람이 실어다 준 것들이었다.
누군가를 만난 후 느낀 것. 누군가 권한 책을 읽고 생각한 것. 누군가의 무대를 보고 적은 것. 그런 것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얻은 것들은 일단 몸을 한 번 통과한 것이다.
내게 그것은 머릿속을 떠도는 상념만을 건져낸 것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명사가 아닌 동사, 라고 표현하겠다.
단어 하나로 맺을 수 있는 명사와 달리 동사는 움직임이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동사만이 지닌 힘이 있다고 나는 느낀다. (내가 동사보다는 명사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므로 동경을 품었을 거다.)
이 책의 동사를 소개한다.
47p.
동시대인이라는 말의 가장 적합한 정의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시대를 견디며, 시대를 견디지 못한 이들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그리하여 어떤 죽음들에 대한 기억을 설명 없이 나누는 사람들. 함께 웃는 사람들이기보다, 함께 웃지 못하는 사람들. 무언가가 좀처럼 웃기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세대에 따라 함께 지켜본 죽음이 다를 것이다.
2000년대 초반이라면 우리는 대체로 위 문장 속 죽음의 자리에 광주를, 삼풍을, 성수대교를 대입했겠다.
2014년을 건너온 우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세월호를 떠올릴 테다.
2022년 10월 이후 우리는 이태원을 ‘놀이’의 장소로만은 대할 수 없게 됐다.
새로운 비극이 자꾸만 늘어간다. 비극이다.
이 책이 위 문단으로 그쳤다면 나 역시 떠올리고, 마음 아파하고, 다시 일상을 살았을 텐데, 64페이지 후에 기어코 동사를 데리고 왔다.
작가는 연극이 끝나고 밤의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오래 서 있어도 지겹지 않도록 일렁이는 강물을 구경할 수 있는 이유로. 시간이 걸려도 일부러 돌아가는 노선인 버스를 기다리다가. 2014년 4월 기어코 울어버렸다. 그 배가 가라앉은 지 나흘쯤이 지난 후에.
거대한 슬픔 앞에서 울어버린 동사가 뭐 그리 대단하고 특별하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47페이지에서 111페이지에 도착할 때까지 작가는 꾸준히 '몸'에 대해서 얘기한다.
내가 데리고 사는 내 몸. 무대 위 몸. 거리를 지나가는 몸. 관념의 몸. 물리적 몸. 심리적 몸.
다양한 몸의 탐구를 펼친 후, 결국 그 몸들을 구할 수 없었다는 소식을 타국에서 들었을 때. 마침 그 앞에 강물이 펼쳐졌을 때. 평소에는 시간이 걸려도 일부러 돌아갈 정도로 아름다웠던 그 강물이 펼쳐졌을 때 느낀 감정을 '혼자 운 적이 있다'고 썼다.
나는 이런 고백 앞에서 함께 울지 않는 법을 모른다.
그게 내가 이 책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고, 추천하는 이유고, 이 글을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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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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