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문단 클럽

똥강아지
- 작성일
- 2024.4.29
광인
- 글쓴이
- 이혁진 저
민음사

사랑이 넘쳐 범람하는 소설.
그러다 그 사랑이 끝났을 때,
사랑이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의 간극을 이기지 못해
한없이 쓸쓸하게 하는 소설.
충만과 공허가 모두 감정이라면...
감정의 팽창으로 두근거리는 것이 익숙한 F들에게 추천하고픈 책이다.
이 책에서 나를 충만하게 했던 것들.
1. 위스키를 촉각할 수 있는 문장.
p.89
맨 처음 마신 건 약간의 알코올 냄새와 함께 버번 캐스크 특유의 아세톤 향이 났다. 하지만 아세톤 뚜껑을 열었을 때 코를 쑤시듯 들어오는 향이 아니라 약간의 레몬 향이 더해진, 인공적이면서 관능적인 향이었다. 이를테면 레몬을 까고 난 빨간 매니큐어 바른 손톱이나 초록색 라임을 짓이긴 진홍색 에나멜 하이힐 같았다.
위스키를 손으로 만지는 느낌.
손끝으로 스민 위스키가 모든 감각을 깨우는 것 같은 표현.
술을 못 마시는 것이 이렇게 억울할 줄이야...
2. 삶을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
p.137
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면 모든 게 쉽고 가벼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문제들은 어렵고 복잡해졌다. 가진 것도 지킬 것도 적은,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가 늘 더 쉽고 더 가벼웠다.
p.499
인생이란 희극도 비극도 아니고 촌극이라는 걸. 짤막짤막한, 아무 의미도 깊이도 없고 그저 지푸라기 잡듯 지폐를 붙잡아 보려 서로 밀치고 깨물고 할퀴고 때리는, 도대체 왜들 그렇게 천박하고 구질구질하게 사느냐는 말밖에 안 나오는 촌극
p.619
당연한 일들은 실은 당연해 보일 뿐 조금도 당연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살고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곳이 세상이었다.
삶도, 세상도 그래서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아무것도 당연하지 않지만 당연한 듯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사는 건 힘들고 괴로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연애소설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삶에 대한 고민이 많아..
곳곳에 밑줄을 치게 된다.
당연하지 않지만 당연하게 사는 오늘이라...
3. 결국 이 책은 사랑.
p.7
이별이 현실의 포도송이라면 이별의 기억이란 그걸로 담근 와인이고 이별 노래란 그 와인을 증류한 브랜다, 코냑 같은거죠.
p.121
사랑할 수 있는 때도 사랑할 수 있는 대상도 늘 있는 게 아닌 걸, 사랑은 끝나면, 그냥 끝나, 뭔가가 죽어 버리는 것처럼. 다시 한다고 해도 예전같이, 그 열기와 진동으로 사랑할 수는 없지. 깨진 그릇 이어 붙인 것처럼 늘 자국이 남고 그건 사라지지 않아. 못 본 척할 수 있을 뿐, 언젠가 다시 충격을 받으면 균열은 늘 거기에서 시작해. 그걸 조금씩 조금씩 알아 간 거야. 정말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질 때처럼.
p.161
감정이라는 건, 마음이라는 건 왜 한 겹이기만 하질 않을까. 왜 좋은 건 좋기만 하지 않고 싫은 건 싫기만 하지가 않을까.
p.180
사랑이란 어쩔 수 없이 그랬다. 분명하고 열렬하지만 그만큼이나 선별적이고 차별적이다. 사랑은 늘 오려 낸 것처럼 선명하니까. 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뭇잎점의 이파리들처럼 똑같아 보이지만 실은 삶과 죽음만큼 전혀 다른 상태, 다른 무게니까.
40대에 이렇게 미치게 사랑할 수 있을 줄이야.
나의 40대가 갑자기 기대로 물들어가는데.. 이를 어쩐다..
이 책을 감정을 모두 빼고 본다면.
그저 클리셰 가득한 막장 드라마에 걸맞을 뿐이다.
그런데 감성 충만! 진하고 긴 문장이 이 책을 살렸다.
긴 문장이 충만하게 하고 그 문장이 끝났을 때 공허해졌다.
덧) 곧 일주일 휴가. 이런 날을 보내고 싶구나.
p.158
이렇게 날씨 좋은 날이면 선선한 잔디에 누워 책을 읽었다고. 텀블러에 채워 온 위스키를 홀짝이면서. 그러다가 노곤해지면 얼굴에 책을 덮고 눈을 붙였다.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뜨듯해진 뺨에 닿던 서늘한 책장의 감촉, 날숨의 위스키 향에 섞여 든 종이 내음, 얇은 옷감 사이로 살갗을 간질거리던 햇살의 가느다란 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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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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