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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alll
- 작성일
- 2024.7.29
멜라닌
- 글쓴이
- 하승민 저
한겨레출판

나는 이런 이야기를 기다렸다. 한반도 위의 내 자리가 아닌, 세계 속에서 한반도의 위치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를. 기막히게 상징적인 상상의 캐릭터(파란 피부)가 마주하는 세상은 낯선 듯 너무 익숙해서 긴장도 책장도 놓을 수가 없었다.
한국과 미국을 주 무대로 차별과 폭력, 인종과 계급 등에 얽힌 이야기 속에 탁월하게 삽입된 실제 사건들은 이야기에 설득력과 생생함을 부여하고, 악화일로로 치닫는 듯한 주인공의 상황이 과연 특이한 비극이 아니라 이곳저곳, 여기저기에서 지금도 벌어지는 일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암시를 주었던 듯하다.
- “차별은 그 시스템의 피해자만 인지할 수 있는 독가스 같은 거니까. 수십 번의 경험이 필요한 게 아니야. 몇 번, 어쩌면 딱 한 번의 끔찍한 경험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폐에 남기는 거야. 그리고 숨을 쉴 때마다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거지. ... 사실 차별은 곳곳에 놓인 지뢰밭 같은 거야. 딱 한 번의 폭발에도 우린 불구가 된다고.” (185쪽)
주인공 재일의 매력이 과연 어마어마했다. 파란 피부의 제이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사람들의 차별적인 언사를 마주하게 되는데, 감당하기 어려운 큰 사건들은 물론 먼지차별(microaggression)에서 느끼는 좌절감, 소외감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재일이가 보여주는 모습에서, 과연 이런 것이 기품 있는 태도가 아닌지 감탄했다. 재일은 무딘 사람이 아니다. 자기 앞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고, 반응한다. 다만 자신을 증명하려 무리하게 나서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상벌을 내리며 자기 의도를 밀어붙이지 않는다.
- 그만큼 자유로웠으나 그만큼 외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곳에 속할 수 있는 현자가 아니었다. 나는 개인이었다. 작고 어린 파란색이었다. (291쪽)
비슷한 맥락에서 마리 앤더슨 부인 역시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고등학생의 이민자 재일에게 편협할 수 있는 자신의 시각을 고백하면서 정면으로 대화를 요청하는 모습이 예의 바르고 단단했다. 이런 인물을 더 많이 보고 싶어졌다.
작가는 모델이 될 만한 사람들을 실생활에서 만나본 것인지, 《멜라닌》 속 인물들은 과장된 묘사 없이도 개성이 뚜렷하고 현실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 의자를 뒤로 눕혔을 때 뒷자리 승객이 신경질적으로 좌석을 걷어찼다. (42쪽)
- 루크에게 도움을 청했다면 공공 수영장을 이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세상 물정 어두운 풋볼 선수 출신 안전요원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173쪽)
'한국인스러운' 외모와 한국 국적을 가진 나는, 한국에서 재일이나 재일의 엄마를 차별하는 한국인의 입지와 미국에서 차별을 당하는 재일의 입지 사이 어디쯤에 있을까? 나의 무지라든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드는 혐오는 아마 더 시간과 공을 들여 다스려야 하겠지만... 최소한 나의 무지와 편견을 드러내지는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나만의 기품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을 두루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 사건은 진실과 무관하게 세 부류에게 상처를 줬다. 무슬림, 정신질환자, 파란 피부.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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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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