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사진
프렌치얼그레이
  1. 기본 카테고리
주간우수

이미지

도서명 표기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글쓴이
캐롤라인 냅 저
나무처럼
평균
별점8.7 (6)
프렌치얼그레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감정과 자기 기만에 치우쳤던 나의 자만이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공감하는 내용이 많았다. 나는 늘 언제까지나 이렇게 세련된 술꾼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주 천천히 점점 무너져가는 술꾼임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아이들 재워놓고 탁! 하는 맥주캔 뚜껑따는 소리, 냉장고에서 갓 꺼낸 얼음처럼 시원한 캔맥주 속에 갇혀있던 탄산이 뿜어내는 신령한 연기, 그리고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보리물이 역으로 올라오려는 가스를 억누른채 꿀렁꿀렁 넘어가는 그 까끌하면서도 압도적인 느낌. 그렇게 아이를 낳고 고된 육아의 현장을 위로해주는 하루 끝 감미로운 의식처럼 시작된 술 인생.

직장에 들어가 회식 후 술문화 중심에서 또 한 획을 그으며 대학교때와는 사뭇다른 차원의 진상을 새로운 컬렉션처럼 선보이면서도 매번 점점 더 대담해지고 유머러스해지는 술 자리가 즐겁기만했다. 밤새 술자리를 갖고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출근하고 전날 있었던 웃긴 일에 대해 상사와 동료들과 쿨하게 모닝 스낵과 커피를 홀짝이며 우린 프로답게 업무에 복귀했을 뿐. 

그런데 술이 일상 생활 속으로 점차 스며들기 시작하면 문제가 심각해질때가 있다. 어떤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을 보고 흠칫 놀라는 순간과 맞닥뜨리게 될 때 그렇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자러들어간 후 밤에 한 두 잔. 그러다가 저녁 준비하기 전에 기분을 업 시키고 힘을 내기 위해 한 잔, 그러다가 한 낮의 더위를 이기기위해 시원한 샤도네이 한 잔. 어머.. 이러다가 아침부터 와인병을 집어들게 되는 일이 벌어지지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와인이 등장하는 일상을 펼쳐놓은 면적의 경계가 굉장히 많이 좁혀가고 있었다.

캐럴라인 냅은 약 20년간 알코올 중독자로 살았다. 그녀가 술을 완전히 끊고 sobriety가 된 해는 1995년. 마지막으로 입에 술을 댄 것은 1995년 2월 19일. 그리고 이 책은 다음 해인 1996년도에 출간되었다.

AA (Alcoholics Anonymous) 중독 재활 모임에 나가는 것으로도 술을 끊을 수 없게 되자 아예 재활 시설 (rehab)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퇴원 후에는 AA모임을 성실히 나가면서 정말 죽을힘을 다하여 술의 유혹을 참아냈다. 안타깝게도 폐암으로 2002년, 42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 캐럴라인 냅.

그녀가 쓴 책을 읽다보면 얼마나 자신의 견고한 배경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지. 그것을 표현한 부분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완벽하고 멋진 배경만큼이나 복잡하게 꼬여있는 가족사 (외도, 알코올 중독, 원만하지 못했던 부모와의 관계, 캐럴라인에게는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가 하나씩 베일을 벗는다. 그 모든 것을 이렇게 솔직히 다 세상에 까발릴 수 있다는 것은... 진짜 술에 미쳐서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 자기 연민에 빠져서이거나, 혹은 술을 삶으로부터 철저하게 밀어내고 마주하기 힘든 모든 삶의 부조리함을 온 몸으로 오롯이 겪어내리라 결심하고 맨살을 드러낸 상처를 내보이며 고통과 맞선 자이거나. 캐럴라인 냅은 후자였다. 그래서 그녀가 마지막에 세상 앞에 술과 함께 도망치지 않고 당당히 서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렇게 감동이었을 것이다.

Insight is almost always a rearrangement of fact. A rearrangement of fact.
통찰이란 '사실을 재배열'하는 일이지.
사실 하나 : 나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
사실 둘 : 나는 절망적인 불행에 빠져있다.

나는 언제나 생각했다. 불행하기 때문에 술을 마신다고. 사실을 재배열해서 방정식을 뱐형시켜 보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나는 술을 마셔서 불행한지도 몰라.’

아버지의 인정에 대한 갈망. 그것을 얻기 위한 투쟁 속 굴레와도 같았던 부녀의 관계. 아버지도 알코올 중독자였고, 캐럴라인 냅과 비슷한 기질의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암에 걸려 투병 할 때 딸에게 던진 알쏭달쏭한 명제가 바로 통찰에 관한 저 한 문장이었다.

사실을 재배열 - 한다는 사실을 깊게 생각해보면 얼마나 인생에 많은 꼬인 상황들, 그로 인해 괴로움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들어맞는 말인가. 나는 이 부분을 많은 문제들 사이에 놓아보았다. 사실을 재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해결 되는 일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을 재배치하는 발상의 전환을 아예 모르거나, 알아도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거나, 지레짐작으로 나 자신이 아닌 상황 혹은 타인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탓을 돌리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 말이 쉽다. 사실을 재배열한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고 쉬운 것은 아니다. 재배열하고 난 후의 여정의 지난함과 고통은 말해 무엇하리.

술을 끊겠다고 마음 먹은 날 부터 실제로 술을 끊은 날까지, 캐럴라인 냅은 남자친구 마이클의 작은 오디오 방에 틀어박혀 드와이트 요컴의 <You’re the One>을 계속 들으며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이 책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이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그녀의 괴로움과 아픔이 한 번에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요동치는 것 같았다. 그녀 옆에서, 강박적이고 완벽에 가까운 지성을 갖고 있었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안정된 정서를 갖고 오랜 세월 따뜻하게 그녀를 감싸준 마이클 (Mark Morelli)과 냅이 사망하기 몇 주전에 결혼식을 올렸다고 하는데. 사진 작가인 Mark는 현재도 사진 작가로 활동한다고 한다. 이 책의 헌사도 냅의 부모님과 쌍둥이 언니 레베카 그리고 Morelli에게 라고 적혀있다. (오랜시간 Morelli와 완전 아버지랑 비슷했던 남자 줄리안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며 힘든 관계를 이어왔는데 냅이 정착한 사람은 Morelli였다.)

냅의 어머니인 Jean Wechsler Knapp 은 저명한 화가였는데. 남편이 암투병 중에 털어놓은 세세한 외도의 진실 (그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더 자세하게)을 알고서도, 또한 본인도 암에 걸린 상황에서 술의 도움없이 그림으로 당신의 고통을 표현한 대단한 사람. 냅은 어머니의 그런 면을 뒤늦게 존경하게 됐다고 한다. 그림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구글 검색으로도 Jean Wechsler Knapp의 작품들은 잘 나오지 않네.

이 책이 강력한 칼이 되어 술마시는 나 자신 그리고 나의 소중한 친구들을 내가 판단하지 않게 해달라고 수 없이 속삭였다. 난 여전히 술을 좋아한다고. 끝까지 세련된 술꾼으로 남고 싶다고. 친구들과 함께 시원한 맥주와 바삭한 감튀가 뿜어내는 고소하고 뜨거운 기름의 알람 그리고 분위기 좋은 새로 생긴 동네의 정겹고 편안한 와인바가 주는 감미로운 분위기를 여전히 그리워한다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실의 재배열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사실들이 재배열 된 후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생활 방식과 습관의 전환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좋아요
댓글
11
작성일
2023.04.26

댓글 11

  1. 대표사진

    kaurikimf

    작성일
    2024. 9. 9.

  2. 대표사진

    biblejje

    작성일
    2024. 9. 9.

  3. 대표사진

    남궁

    작성일
    2024. 9. 9.

  4. 대표사진

    어병

    작성일
    2024. 9. 9.

  5. 대표사진

    777777

    작성일
    2024. 9. 10.

프렌치얼그레이님의 최신글

  1. 작성일
    2025.2.24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2.24
    첨부된 사진
    20
  2. 작성일
    2025.2.24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2.24
    첨부된 사진
    20
  3. 작성일
    2025.2.24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25.2.24
    첨부된 사진
    20

사락 인기글

  1.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7
    좋아요
    댓글
    107
    작성일
    2025.5.7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2.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8
    좋아요
    댓글
    67
    작성일
    2025.5.8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3.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7
    좋아요
    댓글
    127
    작성일
    2025.5.7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예스이십사 ㈜
사업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