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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4.9.7
나를 위한 신화력
- 글쓴이
- 유선경 저
김영사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신화 이미지는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프로메테우스였다. 고통스런 얼굴, 피가 뚝뚝 흐르는 가슴, 주변을 돌고 있는 독수리. 인간에게 불을 전해줬다는 이유로 그리 되었다고 했다. 신이 금지한 걸 어기는 자가 받는 벌. 충격적이었다. 삽화를 그린 이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굳이 신이 아니라 어른이 금지한 일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뿐인가. 시시포스, 아라크네, 불화의 여신이 준 황금사화... 겹겹이 쌓인 의미 같은 건 생각도 못하고 정신없이 읽어낸 이야기들.
그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교만하면 벌 받는구나, 법을 어기면 큰일나는구나 정도로 나름 합리적인 답을내릴 때도 있었지만, 제우스의 눈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고통 받는 요정이나 공주들은 그저 불쌍하다는 생각밖에는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대한민국에서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살면서 신화를 이야기하기엔 너무 여유가 없었다.
20여 년 전 그리스 로마신화가 만화로 나왔을 때는 잊고 있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아이를 핑계로 구매했지만 내가 더 열심히 읽었다. 이후로도 신화를 재해석하는 작품을 종종 접했다. 책, 영화, 뮤지컬, 드라마... 느끼지 못했을 뿐 신들은 언제나 주변에 존재하며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인생에 끼어들고 있었다.
이번에 읽은 유선경 작가의 《나를 위한 신화력》에도 수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모두 알만한 그리스 신뿐만 아니라 북유럽, 인도, 중국의 신도 적지 않게 나오고 분량은 적지만 한국의 신도 있다.

대상과 대상, 대상과 사물,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이 결과를 좌우한다. 그러니 승리의 여신이 약속한대로 당신은 할 수 있지만, 당신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지 않다. 잘 된다 해도 온전히 당신 덕이 아니고, 잘못된다 해도 오로지 당신 탓이 아니다. 세상은 너무나 변화무쌍해서 당장은 완벽한 초기 조건 같아도 내일은 아닐 수 있기에 우리는 미래를 두고 절대 정확한 답을 얻어낼 수 없다. 이런 미래를 두고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의지가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다이몬의 몫이다.
본질적으로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를 예측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지혜다.
(p.88)
Just You Can Do It!
수많은 자기계발서마다 주문처럼 하는,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정말 할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이 책의 답은 ‘그렇다’ ‘아니다’가 아니라 ‘예측불가능’이다. 저자는 수많은 변수가 있는 미래를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양자역학의 이론까지 응용하며 설명한다.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계획을 잘 세우고 노력한다고 해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법적인 신분제가 사라진 지금 이런 주장은 성공하지 못한 자의 자기변명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인생의 굴곡을 팔자소관으로 치부하던 시대를 야만으로 보듯 말이다.
“이 악한 것아! 목숨을 보존하되 이렇게 늘 매달려 있거라. 이 벌은 너로 끝나지 않고 네 후손들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 말을 마친 여신이 헤카테의 독초 즙을 아라크네에게 뿌렸다. 즙이 닿자마자 아라크네의 머리털이 빠졌고 코와 두 귀도 없어졌다. 머리도 몸통도 아주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손가락은 다리처럼 길어져 옆구리에 붙었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배가 되었다. 거미가 된 아라크네는 지금도 제 몸에서 실을 뽑고 베를 짜면서 거기에 매달려 있다.
--오비디우스 지음, 《변신 이야기》
(p.146~147)
베짜기 재주를 뽐내던 아라크네는 아테나 여신의 노여움을 받아 거미가 되고, 일곱 아들, 일곱 딸을 두었다고 기세가 등등하던 니오베는 자식을 모두 잃고 슬픔에 못 이겨 돌이 되었다.
인간이 하는 일마다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는 신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무섭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교만하면 신이 노하실거야’, ‘자식자랑은 하면 안 돼’ 하는 식으로 말이다.
신화 속에서 살인이 흔히 벌어지는 사건이고 별다른 처벌 없이 지나가는 걸 보면 교만에 대한 응징은 아무리 봐도 과해 보인다.
왜 그랬을까?
살인이나 절도 같은 범죄는 어떤 사회에서나 당연히 단죄했을 테니 굳이 신이 끼어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만’이나 ‘모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법으로 정해 벌주기는 애매해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예민한 문제가 아닌가.
신은 법으로 다루기 곤란한 사건에 개입하여 잘못한 인간에게 동정심이 들만큼 잔인한 벌을 내린다. 신화 속에서 신이 내리는 가혹한 벌은 인간의 법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라도 반드시 인과응보가 따른다는 믿음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 신념 덕분에 악덕을 경계하고 또한 어리석은 이웃도 용서하는 아량을 베풀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인간의 생로병사가 투영된 다채로운 신화를 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엮어낸 《나를 위한 신화력》. 신화의 특성상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글쓰기와 어휘력 관련도서를 펴낸 작가답게 풍부하고 적확한 어휘를 사용하여 설명한다. 게다가 신화의 이해를 돕는 고야의 <아들을 먹는 크로노스>, 폼페오 바토니의 <시간이 노년에게 아름다움을 파괴하라 명하다>, 라그르네의 <에오스와 티토노스>등의 훌륭한 그림들은 읽는 즐거움에 더해 보는 즐거움까지 전해주고 있다.
#나를위한신화력 #유선경 #김영사 #책리뷰 #독후감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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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