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리뷰

테일러수입푸드
- 작성일
- 2024.11.19
희랍어 시간
- 글쓴이
- 한강 저
문학동네
그것이 다시 왔어.
희랍어 수업을 듣는 도중에 여자는 말을 잃어버린다.
여자는 왜 말을 잃어버렸을까.
아니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여자가 희랍어 수업을 듣는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그저 외국어에 대한 흥미일지도 모르겠다.
희랍어 강사인 남자는 유전병으로 시력을 잃어간다. 말하지 못하는 여자와 볼 수 없는 남자.
둘은 소소한 갈등을 겪으며 인연이 시작된다.
여자가 말을 잃은 것은 처음이 아니다. 처음은 열일곱 살이었다. 소녀의 말의 상실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는 뺨을 때리는 것과 같은 '폭력'으로 나타났다. 여자는 남편과 이혼 후 양육권 다툼에 져서 아이를 빼앗긴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암으로 떠나보낸다. 언어는 표현의 도구로, 감정을 포착하지 못할 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 그 필요성은 소멸한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또 다른 표현 방식을, 표현 도구를 찾는 것과 같다. 여자의 인생에서 상실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의 한계가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의 '말의 상실'은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다. 점점 말과 그 스스로를 잃어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넓게 퍼트리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마음을 계속해서 밀고 나간다. 침묵하며 수축한다. <채식주의자>에서 나타난 영혜의 육식 거부와도 결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폭력성의 누적으로 인간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처럼, 폭력을 동반하는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을 한다는 것은 현상을 포착해 형식으로 풀어내는 것이고 거기에는 말로써 현실을 납작하게 누르는 폭력성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시야를 잃어가는 남자의 물리적 상황과 감정적 상황 모두 흐릿한 상황에서 이데아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보인다. 남자는 현실 너머 이데아의 세상을 믿으며 동굴 속에서 생각하는 철학자다. 그러나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는 동굴 속에서 방황한다. 그는 어릴 적 "태어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이데아와 모든 존재의 뒤편에 물 위의 환한 그림자처럼 떠올라 있는, 모든 존재가 수천의 눈부신 꽃으로 피어나 세계를 싸안고 있는, 열여섯 살의 내가 온 힘으로 붙들었던 화엄"을 생각한다. 이는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세상에 대한 소극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그의 사상을 유추할 수 있는 건 그가 어릴 적 보르헤스의 소설과 <화엄경>에 빠졌다는 내용에서다. 보르헤스의 작품에서는 무엇이 진실이고 허구인지 모르며 우리는 미로 속에 빠져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늘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한다. 눈앞의 이익과 욕망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자각하고 눈을 뜨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한다. 종합적으로 남자의 세상은 꿈속에서의 탈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 반기를 드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의 어릴 적 친구 요하임과 그의 동생이다. 요하임은 꿈이 아닌 물리적 실재의 시간에서, "불붙은 채 소멸에 맞서는 생명"을 맨손으로 만지고 싶어 했다. 오랜 투병생활로 죽음과 가까이 있던 요하임은 "아름다움은 오직 강렬한 것, 생생한 힘이어야 한다고",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된다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건 죄악이라고" 이야기한다. 남자에게 눈이 멀면 점자를 배우라고, 지팡이를 사용하는 방법을 미리 익히고, 리트리버를 키우라고 말한다. 삶에 맞서란듯이. 남자의 동생은 자신의 사상을 확실히 말하지 않았지만 죽음에, 고통에 슬퍼하며 즉각적으로 대응할 줄 알았다. 그것이 병아리 삐비일지라도 말이다. 죽은 병아리를 그저 갖다 버리라는 말에 아버지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고집불통 기차 화통이었던 동생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용기를 주고 있는 듯하다. 요하임은 왜 철학을 공부하느냐는 남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고대 희랍인들에게 덕이란, 선량함이나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생각해 봐.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 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러니까 바로 나같은 사람이야말로,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니겠니?
112p
남자는 이 세상의 유한성, 인간의 슬픈 몸, 상처 입은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 누군가를 껴안도록 태어난 몸을 인지한다. 한편으론 그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태어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이데아를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소멸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많은 죽음들이 묻혀 분해되어 차가워진 무덤들 위에서 또 다른 온기를 가진 인간이 서있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세상은 반복된다. 상실은 이데아를 향한 투쟁의 종결이자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그러나 상실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이 사유할 수 있다. 그것이 요하임의 말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급격한 발전을 이루는 계기는 건물에 들어온 새를 돌려보내려다 남자가 어두운 계단에서 구르는 사건이다. 남자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을 때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절망 속에 있었다. 그러다 여자가 나타나 그를 도와준다. 이 상황은 소설 혹은 남자 인생의 전반적인 모습에 비유되는 듯하다. 새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감정과 같은 자신이 다루기 힘들었던 대상으로 보인다. 계단에 굴러떨어진 모습과 어둠 속에서 피투성이로 주변을 더듬는 모습은 이데아를 갈망하지만 여전히 답을 찾을 수 없는 남자의 상황처럼 보인다. 그의 안경마저 세상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었다. 그는 여자가 오는 것을 느끼고 살려달라고 외쳐야 했는데, 살기 위해선 계속해서 외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은 여자가 어릴 적 죽어가는 백구가 껴안는 자신을 물었던 기억을 상기시킨다. 남자 혹은 여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이런 악다구니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껴안는다는 것은 고통을 동반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백구의 일화가 의미 있는 이유일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집에서 가족 이야기를 하는 남자의 얼굴 속에서 새 같은 무언가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새. 무언가가 살아 움직이며, 때론 갑자기 튀어 오르는 새. 여자가 "거기 숨으면 안 돼, 밖으로 나가야지"라고 다그친 새이자 그녀의 마음이기도 한 것.
'수난을 겪다'는 뜻의 동사와 '배워 깨닫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거의 흡사하지요? 그러니까 지금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언어유희로 두 가지 행위가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85p
남자는 자신이 눈이 완전히 먼다 해도 지혜를 얻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본다는 것과 깨닫는 것은 어떤 관계인가. 한강은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사람이 사물을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다. 하지만 시선은 다르다. 시선은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 너와 내가 만나는 것이다. 이는 어릴 적 남자와 시선을 맞추려고 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잘 나타난다. 어린 남자의 아버지가 정말 싫어했던 것은 남자의 눈이었다. 남자의 아버지는 나중에 실명을 하는데, 아버지는 눈이 있어도 시선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이미 볼 수 없는 눈이었던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희랍어 강의 시간 거구의 대학원생이 남자에게 질문한다. 본다는 단어와 신적인 것의 단어의 유사성을 말하며 신적인 것이 "본다는 동사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신은 보는 존재이거나. 시선 그 자체인 건가요?"라고 묻는다. 시선의 신성함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이해한다는 말을 쉽게 뱉는 상담사와 다르게, 남자는 여자를 이해한다고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시선을 맞춘다. 시선이란 무엇인가.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 설명하고 있다. 남자는 시야를 잃어갔지만 시선을 던지길 시도했다.
시야를 잃어간다고 해서 아름다움까지 빼앗기는 것은 아니다. 배워 깨달음은 수난과 고통을 동반한다. 남자는 안개 같은 세상, 꿈같은 세상에서 진실한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지만 아름다움은 어려움, 고결함을 포함하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다. 인간의 나약함과 꿈속에서의 방황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여자는 침묵함으로써 세상에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시선과 시선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그녀는 다만 바라본다. 바라보면서, 바라보는 어떤 것도 언어로 번역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 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43p
선하고 슬퍼하는 신. 그리고 신은 시선 그 자체. 선하고 슬퍼할 줄 아는 혼은 남자의 오류를 감싸 안는다.
우리의 삶 속에서 기억과 감정들, 모든 것이 파편화 된다. 여자는 삶의 파편들을 털어낼 뿐이었다. 우리는 그것들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와 수축하며 용기를 잃은 여자.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보듬어 저 깊은 곳에서 폭발한다.
파편들이 합쳐지는 순간. 여기가 나아가는 지점이다.
ㅡ
소설은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놓여있는 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보르헤스는 인간과 언어의 불완전성을 말했고
남자와 여자에겐 각각의 세계 사이에, 혹은 둘 사이에 칼이 놓여있었다.
두 사람은 결국 의미에 대한 폭력성을 가진 언어가 아닌 시선으로, 칼을 껴안으며 나아간다.
폭력 속에서, 또 그 자체로 나약한 인간이지만 한강은 그럼에도 우리가 누구도 해칠 수 없는 혼을 갖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게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묻는다. 중간태의 의미. 우리가 덧붙여 말하지 않아도 다른 의미를 포용할 수 있다는 것, 폭력을 동반하지 않고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행위 하는 것은 결국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변화하려면 결국 나 또한 변화해야 한다는 것. 누구의 인생이든 여자와 같이 '무언가'가 찾아오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우린 무엇을 보고 살 것이며 어떤 세상과 인간, 삶에 어떤 시선을 던질 것인가. 남자가 강의에서 매력을 느낀 잠재태 방식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앞으로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번쯤은 시선을 주고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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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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