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의 서재(수리중)

흙속에저바람속에
- 작성일
- 2024.12.8
흰
- 글쓴이
- 한강 저
문학동네
서늘하고도 따스한 것에 관한 이야기
<흰>을 읽고

<흰>에 대한 리뷰를 쓰겠다고 결심한 겨울에 내가 처음 한 일은, 소설속 '나'처럼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흰'이라는 글자를 입 안에 넣고 이리저리 굴려 보니 자음과 모음이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게 느껴졌다. 입 밖으로 하나씩 내뱉다 이윽고 이 낱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 고스란히 목구멍으로 삼켰다. 하지만 거듭 책장을 넘기다 책속 곳곳에서 이것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여기에 흰 눈을 한 움큼 집어 뭉치듯 한 글자씩 꺼내 놓는다.
ㅎㅣㅡㄱ, ㅎ ㅗㄱ, 혹. 이 소설은 '나'가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지 두 시간만에 죽었다는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혹(或) 계속 살아남아 '그녀'로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흰' 것들의 이미지와 물성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인생마다 주어진 시간의 총량이 다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감히 언니와 같이 못다 핀 어린 생명을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이라고 혹독한 비유를 할 수 있다면, 언니의 그 '찰나의 개화'가 '나'가 '그녀'라는 존재를 복원하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해석할 여지는 있을 것이다.
ㅎㅡㅣㄱ, ㅎㅜㄱ, 훅. 귓가에 계속 맴도는 훅(hook) 송처럼 이 소설에서도 돌고 도는 요소들을 만나게 된다. '눈'이라는 소재와 그것에 관한 단상들이 언니와 '그녀'를 연결하는 '고리'로 작용한다. 길을 걸으며 몰아치는 눈보라로 인해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 '그녀'의 모습 위로 눈꺼풀이 닫힌 채 누워 있는 언니가 겹쳐 보인다. 특히 두 시간 가량 호흡을 반복하던 언니의 마지막 날숨을 '그녀'가 들숨으로 이어받는 장면이 내 머릿속에서 맴돈다. 그 순간의 언니와 '그녀'는 언어를 배우지 않았기에 "죽지 마. 죽지마라 제발."이라며 연신 속삭이는 어머니의 말뜻은 물론, 무엇보다 각자가 삶 또는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는지도 알지 못했을 터라 가슴 한 편이 먹먹해진다.
ㅎㅡㅣㄴ, ㅎㅜㄴ, 훈. 그 장면을 좀 더 살펴보면, 어머니의 음성이 품은 의미는 모를지언정 생에 대한 본능은 강렬해서 언니와 '그녀' 둘은 훈(薰)훈한 공기가 느껴지는 곳, 바로 어머니의 곁을 필사적으로 찾았을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의 간절한 목소리 속에도 따스한 기운이 배어 있음을 감지하여 그 진원지로 귀를 기울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생사의 갈림길 위에서 공기반 소리반으로 이뤄진 훈기가 불어오는 가운데,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나마 삶에 대한 갈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으리라 짐작된다.
ㅎㅣㅡㄴ, ㅎㅏㄴ, 한. 그토록 짧았던 전생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는 것일까. 여전히 살아있는 '그녀'에게 죽음이란 사랑하는 사람과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일처럼 느껴진다. 다행스럽게도 원한(恨)과 원망 사이에서 벗어나 다시 삶을 사랑할 마음을 추스르는 법을 알고 있다. '나' 역시 언니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다거나 언니의 한을 풀어주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언니와 함께 서로 기대어 일상을 나누며 사는 삶에 대한 바람과 상상으로 '그녀'를 그려내 언니에 대한 '나'만의 사랑과 애도를 나타내는 듯하다.
ㅎㅡㅣㄴ, ㅎㅓㄴ, 헌. 무릇 새것은 낡아서 헌것으로 변하게 되는 운명을 가진다. 생명체 역시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음과 죽음을 향한 삶을 살아간다. 어느해 '그녀'는 본가의 이웃집 마당에서 어떤 연유에서인지 짖지를 않아 주인의 눈 밖에 난 흰 개를 만난다. 여기서 잠깐 넌센스 퀴즈 하나를 풀어보자. 개는 개인데 짖지 않는 개는 무엇일까? 나도 백지를 낼 순 없기에 흰 눈처럼 온 세상을 덮어 추한 것들을 가려준다는 의미로 '가리개'라고 쓰면서 아무 소리 없이 작게 패인 '보조개'를 지어보인다. 그녀에 따르면 정답은 '안개'이다. 부옇게 떠있는 아주 작은 물방울 때문에 사물이나 사람을 흐리게 때로는 희게 보이도록 만드는 특성에 빗대어 그녀는 흰 개를 안개라 부른다. 그 해 겨울 헌 안개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ㅎㅣㅡㄴ, ㅎㅗㄴ, 혼. 앞서의 안개는 먼 이국땅 바르샤바에도 자욱하게 피어나고, 그곳에서 '그녀'는 또 다른 안개를 마주한다. 멀리서는 마치 흰 눈에 덮인 도시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칠십여 년 전 독일군의 공습으로 일어난 먼지로 뒤덮인 폐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흰 도시와 닮은 구석이 있다. 한 차례 망가졌다가 회복된 이들답게 상처를 그저 덮어두려는 마음이 아닌 흰 종이 위에 새로이 그림을 그리듯 아픔을 치유하고 다시 일어서려는 마음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 점이 소설을 '그녀'가 흰 도시를 거닐며 거리에서 만난 혼(魂)령들에게, '나'가 '그녀'의 전신인 언니의 혼에게 바치는 진혼곡처럼 여겨지게도 만든다.
ㅎㅣㅡㄱ, ㅎㅏㄱ, 학. 어느 여름날 서울에서 '그녀'가 학(鶴), 곧 흰 두루미를 보며 왜 흰 새가 다른 색의 새와 달리 아름답고 기품있으며 심지어 신성하게 느껴지는지 의문을 가진다. 시간이 흘러 흰 도시에서 고뇌에 빠져 걷던 '그녀'의 머리 위에 흰 새가 내려앉아 날개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주고 이내 날아간다. 흰 거즈 같은 흰 새의 날개에 흰 연고라도 발라둔 것일까, 아니면 새가 떠나며 '그녀'의 근심마저 물고 가버린 것일까. 어찌됐든 '나'가 그토록 천착하던 '흰 것'의 효용이 흰 새와 '그녀'의 만남에서도 확인되는 순간이 아닐까.
<흰>에 관한 나의 흰소리는 여기까지다. 어느 동화 속 한 오누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떨어뜨렸던 빵 부스러기가 사라진 까닭이, 만일 숲속에 동물들이 먹어치워서가 아니라 먹색 어둠이 깔려 보이지 않아서였다면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 독자로서 제대로 책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워 어둠과 불안을 떨쳐내고자 속으로 큰소리라도 치면서 흰 종이에 씌여진 검은 활자와 남은 빈 자리에 한강 작가가 뿌려 놓은 흰 부스러기를 주워나갔다. 책을 덮으며 내 손에 쥐어진 흰 것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서늘하고도 따스한 초 한 자루가 몸을 낮추어 스스로를 태우고 있다. 이제 이 흰 것을 다른 독자에게 건네고 싶다.

- 좋아요
- 6
- 댓글
- 1
-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