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카테고리

솔
- 작성일
- 2024.12.11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
- 글쓴이
- 고민지 외 17명
한겨레출판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은 한국여성학회 40주년을 맞아 기획된 책으로,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양상의 여성혐오와 페미니즘 운동을 정리한다. 흥미롭게 읽은 꼭지는 온라인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와 현재를 다룬 김수아의 〈온라인 공간을 횡단하는 여성들〉과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나타난 페미니스트들 사이 젠더 인식을 다룬 김보명의 〈젠더 이후의 젠더 정치학〉, 능력주의 개념의 성차별적 성격과 이것이 페미니즘에서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주의로 나타나는 양상을 다룬 엄혜진의 〈능력주의는 어떻게 구조적 성차별과 공모하는가〉이다. 머리말의 제안대로 김수아와 김보명의 글을 함께 읽으며 페미니즘 대중화가 남긴 딜레마를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엄혜진의 능력주의를 다룬 글 역시 최근 온라인 페미니즘 운동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온라인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와 현재
〈온라인 공간을 횡단하는 여성들〉의 저자는 안전한 공간을 찾으려 한 여성들의 역사와 여성들이 안전하게 모이면서도 포용적인 연대를 만드는 방법을 논한다. 그는 ‘여성시대’나 ‘메갈리아’를 비롯한 여러 온라인 여성 공간이 만들어진 이유를 1999년 헌법재판소의 군 가산점제 평등권 침해 판단 이후 온라인상에서 벌어진 여성에 대한 공격에서 찾는다. 당시 여성을 위협하는 온라인 공간의 문제가 대두되었으나 우리 사회가 해당 현상을 여성혐오로 개념화하지 못하면서 여성들은 스스로 안전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이를 계기로 안전한 온라인 공간을 찾으려는 여성들의 노력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메갈리아’ 이전에도 여러 유료 웹사이트나 ‘여성시대’ 등으로 대표되는 포털 사이트 카페 등 폐쇄적인 여성 공간이 만들어졌으며, 2010년대 중후반부터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더 공개적인 온라인 공간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자발적인 연결이 이루어졌다.
최근 SNS에서 일어나는 페미니즘 운동은 기존 사회 운동과 달리 시민단체와 같은 하나의 구심점을 필요로 하지 않고, 빠른 시간 내에 폭발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지난 8월 말부터 딥페이크 범죄 사실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X(옛 트위터)에서 페미니스트들은 딥페이크 강력 처벌을 요구하는 해시태그 운동을 벌였고, 해당 해시태그로 전 세계 트렌드 2위에 오르는 성과를 만들었다. 2018년에 벌어진 미투운동도 비슷한 예시로 볼 수 있다. 다만 디지털 행동주의는 기존 사회 운동과 비교해 지속성이 떨어지며, 단지 SNS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결국 사회 전환을 위해서는 기성 언론의 보도나 정책적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디지털 행동이 여러 소수자 개인의 주체적인 참여를 이끌어냄으로써 이들의 목소리를 가시화하고, 구조적 차별의 존재를 일깨우며, 오히려 레거시 미디어의 보도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의의를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언론이 SNS 여론을 기사 작성에 활용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고 개인들이 디지털 행동을 통해 입법 청원을 독려하는 등 정책 결정 과정에 개입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으로 볼 때 디지털 행동이 정치적 효능감을 높임으로써 사회 참여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온라인 페미니즘 운동의 딜레마 : ‘젠더 박살’과 자기계발
다만 온라인상 페미니즘 운동에서 보이는 젠더 배제적인 움직임이나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주의는 비판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젠더 이후의 젠더 정치학〉은 젠더 개념이 보수 개신교 반동성애 운동 흐름과 신자유주의적 안티페미니즘, 트랜스 배제적 급진페미니즘(‘랟펨’ *) 사이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오늘날 한국에서 보수 개신교 집단은 이성애중심적 가족 질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젠더 개념을 공격하고 안티페미니즘을 내세운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마주한 이 백래시가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다는 점을 짚는다. 19세기 후반 여성 참정권 운동에 반발한 남성과 중산층 백인 여성들, 1990년대 종교계가 내세운 안티페미니즘이 그 기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랟펨’ 사이에서 젠더는 해체 대상으로 규정된다. 이들은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젠더를 해체하며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범주를 ‘진정한 여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결국 ‘랟펨’의 젠더 정치학은 보수 개신교와 유사하게 본질주의를 강조하고, 트랜스젠더를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이들이 젠더 이분법을 해체하는 존재임을 간과한다. 여전히 SNS에서 ‘진정한 여성’ 범주를 주장하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기혼 여성과 좌파 운동권 여성을 거부하거나 페미니스트 행동 규범을 정하는 것과 같은 행위가 주된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셀 남성이나 보수 우파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적 안티페미니즘은 여성들이 과거에 비해 남성과 동등한 교육과 노동의 기회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포스트페미니즘’의 부상과 함께 등장했다. 이들은 성평등 정책이 사회 구조적 차별을 시정하는 것임을 무시하며 여성이 ‘태어난 성’을 기준으로 혜택을 받는다고 항의한다. ‘젠더’를 ‘섹스’로 오독한 것이다. 〈능력주의는 어떻게 구조적 성차별과 공모하는가〉는 특히 이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포스트페미니즘을 집중적으로 다뤄 능력주의가 성차별을 은폐해 왔으며 페미니스트들의 자기계발주의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밝힌다. 실제로 일부 여성들은 상위 계층 이동을 곧 성평등 실현으로 여기며 개인의 역량을 강화하고 경제적 삶의 질 향상을 꾀한다. 그러나 앞서 다뤘듯, 애초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여성의 성적 차이를 결핍으로 보는 문화를 비판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여성들을 오히려 공정 경쟁 질서의 위협으로 여겼다. 여성들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는 편견을 깨면서도 여성 일반에게 부과된 성역할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이중 구속에 시달리기도 했다. 저자는 최근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여성들이 능력주의를 내면화해 욕망을 추구하거나 피해자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는 경향에 우려를 표하면서도 페미니즘이 능력주의 사회 자체를 비판할 가능성을 기대한다.
*
나 역시 야망을 품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자는 분위기를 좇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내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이후 내 주변의 몇몇 사람들과 자기를 경영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꼈거나 지쳤던 경험을 공유하며 이것이 나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유리천장 문제로 여전히 고위직 여성의 비율이 낮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모든 여성이 높은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때 각 여성은 계층, 장애, 인종, 연령 면에서 차이를 지니는 존재이며 엄혜진이 언급했듯 개인의 노력과 성취에는 사회적 우연성과 운의 요소도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에게는 그것이 불가피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페미니즘 운동은 자기계발에 몰두할 수밖에 없게 하는 능력주의와 신자유주의 사회를 여성의 관점으로 비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할 때 성차별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차별을 묵인하는 사회 현실을 폭로하고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사회 구조를 전환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 꼭지의 저자는 온라인 공간의 래디컬 페미니즘을 칭하는 ‘랟펨’과 학문적 의미의 래디컬 페미니즘을 구분해 사용한다.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
- 글쓴이
- <김애라>,<김미현>,<김수아>,<김혜경>,<이지은>,<엄혜진>,<임소연>,<김보명>,<권현지>,<김주희> 저
- 출판사
- 한겨레출판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