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책 #하리뷰

나는 그저 이동하는 인간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느 때보다도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겨울데자뷔
#최유수
#민음사

최유수의 책은 대부분 독립출판물이라 도서전이나 동네서점에서 구입했었다. 민음사에서 출간한 이 책이 반가운 이유였다. 독립출판계의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했던가.

각설하고, 나는 겨울의 풍경을 좋아한다. 눈이 펄펄 날리는 풍경이나 앙상한 나뭇가지와 색을 잃은 모든 풍경들이 삭막하면서도 차분하게 해서 좋다. 눈이 내리면 더 좋은데 세상이 전부 하얗게 변하는 그 순간이 마법같기 때문이다.

최유수는 추운 겨울, 그것도 가장 춥다는 러시아로 떠난다. 언젠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싶다는 열망에 시달렸던 적이 있었다. 열차를 타고 추운 겨울의 공기를 느끼며 몇날 며칠을 달려 유럽으로 가고 싶었다. 떠나고 싶어 환장했으나 떠나지 못했던 시절에는 그렇게 상상 속에서 늘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 설국열차가 떠오르는 시베리아의 벌판을, 바이칼 호수를 상상하며. 상상은 현실이 되지 못했고 결국 이렇게 남의 여행기로 대신하게 된다.

최유수의 뒤를 따라가듯 함께한 이 길은 포근하지도 않았지만 춥지도 않았다. 발걸음이 무거워질만큼 묵직한 문장들에 자주 쉬고 자주 머물러 있어야 했다. 최유수의 문장은 늘 그랬다. 가벼운 듯 시작했으나 늘 묵직하게 다가와 나를 짓누르고 결국엔 주저앉힌다. 그렇기 때문에 또 최유수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시린 마음을 붙들고 들여다본 시간은 결국 나의 겨울이었던 것 같다.

덧) 최유수의 겨울 사진들이 가득하다. 하드커버의 양장본이 무겁다. 무광이면 더 좋았을 것 같다.



p.42-43 몇 개의 문장을 연달아 쓴 다음 거기서 시제를 지워 본다. 문장 속에서나마 시간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울타리의 바깥쪽으로, 우리가 영원이라고 부르는 세계 쪽으로,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몇 걸음을 내딛어 보는 것이다. 안쪽과 바깥쪽의 시간이 어떻게 다르게 흐르는지 알고 싶어지고, 거기에 있다고 짐작될 뿐인,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어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가 본다. 그러면 먼저 내딛은 한쪽 발이 빛의 불길에 새하얗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p.198-199 울퉁불퉁한 진흙과 단단한 눈 덩어리가 한겨울의 갯벌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어 밟을 때마다 갈라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마침내 고대하던 순간이다. 바이칼 호수 위를 걷고 있는 나. 나를 불시에 집어삼켜 버릴지도 모르는 무시무시한 얼음 덩어리를 밟고 있는 나. 발아래 얼음 조각들이 무참히 부서진다. 신중한 걸음과 건조한 파열음의 반복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