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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설


도서명 표기
변신
글쓴이
프란츠 카프카 저
열린책들
평균
별점8.8 (32)
불란서책방



한 집안의 아들로서 가족을 부양하던 잠자는 어느 이른 아침 벌레로 <변신>한 자신을 발견한다. 매일 변함없는 떠돌이 외판사원의 삶 자체가 이미 변신을 위한 불안한 꿈을 잉태하고 있었다. 자신을 희생하며 견고하게 다져왔던 가족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가족의 주된 수입원을 잃자 가족은 생존을 위해 각자 새로운 일거리와 주거를 찾는다. 더 이상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는 흉물이 된 아들이자 오빠는 즉각 혐오의 대상이 되고 밀폐된 공간에 갇혀 죽음을 맞는다.

<성>의 측량사로 마을에 들어선 K는 성의 관료체제와 마을 주민의 집단적 배척 속에 길을 잃고 밤길을 헤맨다. 어느 누구도 이 상황을 설명하거나 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 역시 상황을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거나 혹은 그런 의문조차 갖지 않는지도 모른다. 성의 관리로부터 받은 모욕적인 편지를 찢었다는 이유로 아말리아 가족에게 내려진 처벌과 격리의 주체 역시 분명하지 않다. 그 누구도 결정하지 않은 처벌이 공공연하게, 암묵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집행된다.


어떻게든 성에 들어가겠다는 K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고, 학교의 관리인으로, 그리고 마을 주민의 말 관리 일꾼으로 끌려가면서 소설은 미완성인 채로 남는다. 그의 사후에 미완성이라 알려지지 않았더라면 미완성으로 끝난 것인지 전혀 감조차 잡을 수 없다. 심지어 가장 근사한 마무리라 여겨질 때도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K는 마을에 정착하려고 애쓰다가 죽음을 맞는 것으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건에 연루된 <소송>의 당사자 요제프 K는 결국 법 집행의 '정당한' 절차를 거쳐 그 어떤 사유도 찾을 수 없는 '부당한' 범죄자가 되어 결국 처형당한다. <성>의 권력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공모하는 마을 주민들은 여전히 <소송>의 법 집행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과 <소송>의 관료 집단에서 ‘아이히만’과 같은 자연스럽고 평범한 악인의 탄생을 목격한 K는 <아메리카> 향한다.


<아메리카>에 도착한 K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다 서부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싣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이 역시 미완으로 남았다. ‘오클라호마 자연 대극장’에서 펼쳐지는 연출되고 조작된 서부의 역사 속으로, 마침내, 완전히, 실종되고야 마는 K. 전쟁의 광기를 피해 미 대륙으로 건너온 수많은 유럽의 작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K는 정체불명의 인물들이다. 카프카를 말할 때, 프라하의 유태인이자 독일어를 사용하는 카프카의 중첩된 정체성에 대해서 주목하지만 카프카 본인은 이 정체성의 탐문을 일찌감치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선택할 수도 없고, 자신 안에 이미 각인되어버린 중첩된 자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전략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K는 떠돌이들이다. 떠돌이를 위한 자리는 마련되지 않는다. 오직 떠돌며, 생존하는 것이 관건이다. 떠돌이들은 누구도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집요하게 묻지 않는다. 그들은 해석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갔고, 휩쓸리고, 거기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지만 모두 좌절을 경험한다. 자신이 왜, 거기에 있는지, 누구인지 따위는 질문에 포함되지 않는다. 기계와 노동으로 조직된 체계 안에서 고립된 개인에게 진실 따위는 필요치 않고 오직 생존의 윤리만 작동한다.

1883년에 프라하에서 태어난 유태인 카프카가 독일어로 그리는 이 암울한 제국의 풍경은 권력과 정치가 역사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배제한 채 오직 개인의 생존을 위해 내면화된 형태로 다가온다. 카프카가 그리는 이 출구 없는 세계에는 반드시 '이 곳에 출구가 있다', 라는 암시를 던지며 나타나는 그 누군가를 예고하고 있다.

고립무원의, 주변을 떠도는, 생존의 정치와 파편화된 권력에 익숙한 개인에게 비극적 출구가 열리는 순간을 채플린은 왜소한 몸이 펼치는 추적과 도주의 희극으로 구성했다. 카프카는 죽음의 결말과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역시 채플린의 떠돌이처럼 희극적인 K들로 출구 없음을 말하고 있다.


개인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아메리카>의 세계, 차이가 발견되었을 때 혐오로 돌변하는 <변신>의 세계, 권력을 무의식적으로 승인하며, 내면화하는 <성>의 세계, 개인의 구체적 진실이 사라지고 기계와 같은 체제의 부속품임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소송> 관료의 세계, 이 세계의 양분으로 무럭무럭 자라난 것은 파시즘이다.

카프카 독서는 지속적인 내적 저항을 유발한다. 이야기는 앞으로 전진하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예측불허는 긴장을 유발하지 않는다. 옆으로, 샛길로 자꾸만 미끄러지며 어떤 의도도 발견할 수 없다. 지난밤 꾸었던 꿈을 자동 기술하면 나올 법한 비논리와 환상 속을 헤맨다.

실패한 자신의 친구를 염려하며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게오르크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가 다리 아래로 몸을 날려 스스로에게 <판결>을 내린다. 하녀를 무뢰한의 손에 남겨놓고도 죽어가는 아이를 구원하지 못하는 <시골의사>는 혹한에 맨몸을 내던지고, 인간이 되기 위한 출구를 찾으려는 원숭이는 <학술원에의 보고>를 통해 자유란 선택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좌절한다.

"목표는 있지만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일 뿐이다."

카프카, 그의 세계에 머문다는 것은 인내하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그의 무의식에 접근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자연스러운 자기방어’, 이 내적 저항은 읽는 자로 하여금 그 자리에 머뭇거리게 하며, 음침하고 우울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미로의 세계, 모순과 불합리로 가득한 세계를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며 끓임 없이 읽기 중단을 요청한다.

이 중단의 유혹을 인내하며 앞으로 나가더라도 다시 돌아보고, 옆을 힐끗거리며, 읽기와는 상관없는 기억이나 경험으로 빠져든다.

결국 자기 자신과 “최후의 고독한 싸움”에 직면하는 순간을 맞을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다면.

카프카를 읽는다는 것은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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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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