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자란 환경은 내 몸속 뼛속 깊이 박혀 있다. 엄마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좋은 면도 있고 아버지의 엄하고 가부장적인 습성도 배어 있다. 스무 살부터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려고 애썼고 많은 부분 바꾸었지만 가부장적인 습성이 이따금 불현듯 고개를 든다. 앞으로도 내내 이를 고치려고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주인공은 중학생으로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누나, 동생과 함께 산다. 부활절에 볼프강네 집에 밀가루 반죽으로 빚은 듯한 오이 모양의 생명체가 나타난다. 자기는 지하실에 살고 있는 쿠미-오리 2세 대왕으로 신하들의 반란으로 내쫓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치적 망명을 요구한다. 가족들은 자칭 오이대왕을 탐탁찮게 여기지만 아버지는 예외다. 오이대왕을 극진히 대접하며 오이대왕이 권위를 되찾을 수 있도록 적극 나선다. 오이대왕은 아버지의 환심을 사려고 가족들 비밀을 훔친다. 엄마는 아버지 몰래 비싼 물건을 사들였고, 누나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일기장을 갖고 있으며, 볼프강은 형편없는 점수를 받은 수학 시험지에 아버지의 서명을 받아 가야 한다. 오이대왕 때문에 평범한 가족이 문제 가족으로 불거진다.

아버지는 내가 껌을 씹는 것도 싫어하고 내 옷들도 너무 요란스럽다고 했다. 학교 성적도 아버지가 보기에는 형편없었다. 도무지 집에 붙어 있는 법이 없고 어쩌다 집에 있을 때는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본다고 혼냈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을 때는 어른들 말씀에 끼어든다고 나무랐고, 내가 어른들 말씀에 끼어들지 않는다 싶으면 이번에는 또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을 꼬치꼬치 캐묻기나 한다고 짜증을 냈다. 그래서 내가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으면 허구한 날 빈둥거린다고 꾸짖었다. (101쪽)

아버지가 오이대왕을 반긴 까닭은 가부장적인 생각이 통하기 때문이었다. 오이대왕과 아버지는 어린아이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독립한 하나의 인격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오이대왕과 아버지의 비극은 예정되어 있다. 문제로 불거진 식구들의 문제는 오이대왕이 사라지고 아버지가 생각을 바꾸면 자연스레 해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