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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몽
- 작성일
- 2025.4.23
엄마 생물학
- 글쓴이
- 이은희 저
사이언스북스
이 책의 저자를 알게된 것은 중학교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우리 엄마는 주요 일간지에서 추천하는 책들을 꼬박꼬박 사다주는 사람이었다. 아마 맞벌이를 하느라 자식 교육에 신경을 못 쓰고 있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책들 사이에 <하리하리의 생물학 카페>도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책은 꼭 읽었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권유에 말 잘 듣는 딸이었던 나는 몇 달에 걸쳐(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내용이 많았다) 겨우 이 책을 완독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해 열린 교내 과학경시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생물학을 전공한 과학 선생님이 문제를 도맡아 출제한 덕분이었다.
그 추억의 책을 쓴 저자가 이번에는 <엄마 생물학>을 펴냈다. 책을 받아들자 시간의 흐름이 손으로 만져지는 것 같았다. 20대의 신입 연구원이이었던 저자도, 중학생이었던 나도 엄마가 되어 저자와 독자로 다시 만났으니까 말이다.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가 신화를 중심으로 생물학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책이었다면, <엄마 생물학>은 저자가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을 거치면서 겪은 이야기를 생물학으로 설명한다. 학생때는 과학 공부를 도와준 저자가 이제 엄마됨을 생각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고마운 일이다.
특히 흥미롭고 유용했던 이야기는 시험관 시술에 관한 내용이었다. 저자는 시험관 시술로 첫째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첫째 아이를 가질 당시 냉동했던 배아를 5년 2개월 후에 해동해 쌍둥이 남매까지 얻는다. 첫째와 둘째, 셋째의 나이는 5년차가 나지만 사실 이들이 수정된 시간은 똑같았던 셈이다. 배아를 '폐기'한다는 말에 꽂혀 시험관 시술에 한 번 더 도전한 저자의 선택도 놀라웠고, 이만큼 진보한 과학기술에도 감탄이 나왔다.
이 이야기를 난임병원에 다니는 친구에게 전해주었다. 생물학자가 쓴 책을 읽었는데, 냉동 배아를 5년만에 해동해서 건강한 쌍둥이를 낳았대. 친구의 눈이 크고 동그래졌다. 정말이야? 이후 나는 시험관 시술이 현대에는 자연스러운 출산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이나, 배아는 엄연히 ‘세포군’이니 유산에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등의 책에서 본 지식을 버무려 위로를 건넸다.
최근 여러 차례 유산을 겪으면서 친구는 늘상 우울해 했다. 맛있는 밥을 사줘도, 갖고 싶다는 물건을 선물로 보내도, 울적하다는 한 마디에 곧장 달려가 온종일 시간을 함께 보내도 엉엉 울거나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전보다 편안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배아를 많이 냉동해놓으면 나도 몇 년 후까지 시술에 도전할 수 있겠지? 왠지 시간을 번 것 같은 기분이야.”
따뜻한 위로는 문학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큰 착각이었나 보다. 과학은 구체적인 위로를 한다. “괜찮을 거야”라는 말은 공허하지만 “진짜로 괜찮아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는 다른 차원의 힘이다. 임신과 출산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든, 아이를 낳고 키우는 중이든, 여성의 몸으로 살아가는 개인이든 <엄마 생물학>은 현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구체적인 위로가 될 것이다.
*책 속 문장
여성의 몸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 분명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여성은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며, 사고하는 존재입니다. (중략) 보조 생식술을 시도하는 여성들은 고쳐야 하는 기계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의학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p. 42
자연에는 손만 있고 눈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손과 눈이 모두 다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이라면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로 ‘인간다운’ 대처법이 될 겁니다. p. 64
대개의 세포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 우직하게 버티며 묵묵히 자기 일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생물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예외를 만드는 존재라서, 때로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세포도 존재합니다. 바로 자궁 내막 세포가 그렇습니다. p. 67
그런 아픔에 공감하고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이들은 시술을 받은 이들이었으며, 시술을 하는 이들은 이런 종류의 아픔에 대체로 무감했습니다. p. 77
임신은 기본적으로 1인용으로 설계된 몸을 태아라는 플러스 알파와 공유하는 과정입니다. 필연적으로 인슐린 분비 증가와 인슐린 저항성 증가 같은 부담을 모체가 짊어지게 됩니다. p. 103
온갖 금기들에 도전하지 않는 것이 금기로 여겨지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깨어지지 않는 부조리한 금기들은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월경과 관련된 말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날’, ‘매직’ 같은 단어나, 난임 카페에서 쓰이는 ‘홍 양’ 같은 단어를 쓰는 게 고작입니다. 그나마 획득한 명칭이 ‘생리’라는 단어입니다. p. 125
어쩌면 우리는 여성에게 있어서는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만이 진짜 내 자식’이라는 고정 관념에 짙게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과학이 진짜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분야는 자궁 이식이 아니라, 인공 자궁일지도 모릅니다. p. 180
자원이 풍부하고 환경이 안전해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무사히 자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 아이를 많이 낳지 않아도 유전자가 존속될 것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으니 아이를 덜 낳습니다. 인간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은 자연스러운 경험일 수 있지만, 반드시 안전하지는 않거든요. p. 205
#엄마생물학 #반짝부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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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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