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라이팅(리뷰)

짜라투스트라
- 작성일
- 2006.12.1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
- 글쓴이
- 프리드리히 니체 저
책세상
“신은 죽었다(니체), 니체 넌 죽었다(신), 너희 둘 다 죽었다(청소 아줌마).” 싱거운 웃음을 만들어내는 화장실 낙서다. 그만큼 니체를 잘 모르더라도 누구나 ‘신은 죽었다!’ 이말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루터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의 경구나, 맑스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포이어바흐 테제 11번만큼이나, 원문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오해돼서 사용되어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니체는 그의 저서 전반에 걸쳐 신의 죽음이란 ‘복음’을 전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한다. 『즐거운 학문』의 광인이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차라투스트라와 같이.
그러나 니체는 말년의 저서에서 단순히 신의 죽음을 알리거나 그리스도교 비판을 넘어, 예수를 구원하고자 노력한다. 스스로 복음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느껴서일까, 이후 니체는 자신의 필명을 ‘십자가에 못 박힌 자(the Crucified)’로 바꿔 사용한다.
예수의 죽음 이후, 사도 바오로를 위시로 성경은 무한한 해석을 거듭하며 차차 예수가 전하려 했던 바와 멀어져간다. 이렇게 그의 사상이 변조되기까지엔 사제들의 노력이 한 몫 한다. “구약성서 곳곳에서 그의 십자가가 암시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나뭇조각, 막대기, 사다리, 가지, 나무, 버드나무, 지팡이가 단순히 언급되기라도 하면 이것은 십자가에 대한 예언을 의미했다.『아침놀』”
이처럼 그들은 모든 것을 종교적인 것으로 해석하며, 죄와 벌, 경건함과 보상이라는 것에 세계를 한정짓는다. 결국 비약적인 해석은 더욱 심해져 즐거움에 죄의식을 불어넣고, 원죄와 양심의 가책을 사람들에게 심어줌으로서 자신의 삶을 부정하게 하였으며, 지상의 삶을 평가절하하며 죽음과 사후세계만을 숭배하게 만들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로마, 8;6)” 삶의 부정, 삶의 비방, 육체의 경멸, 죄 개념을 통한 인간 가치의 저하와 인간의 자기 모독이 일상화된 것이다.
니체는 예수야 말로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온 자라고 말한다. 그 복음이란 바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멀게 만드는 죄가 없어졌다는 것(원죄), 그리고 참된 삶, 영원한 삶이 바로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를 오해해 왔다. 그는 하느님에게 향하는 길이 ‘회개’도 아니고 ‘용서의 기도’에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으며, ‘지상의 삶’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율법학자들과 대립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구원해줄까.
그것은 자신을 기적에 의해서든 보상이나 약속에 의해서든 입증하지 않는다. ‘성서’에 의해서는 더욱 아니다. 그리스도 교인을 구별 짓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행동하고, 행동이 달라서 구별된다. 예수의 삶은 이러한 ‘실천’이었다. “오로지 복음적인 실천만이 신에게 인도하며, 복음의 실천이 바로 ‘신’이다.(p.259)” 삶의 실천,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변화인 것이지, 새로운 신앙은 아니다.(p.260)” 매 순간의 실천이 기적이고, 믿음에 대한 보상이자 증거이며 하느님의 나라인 것이다.
결국 삶 속에서 실천을 통해 변화를 느낄 때, 우리는 ‘영원’하다고 느낄 수 있고 ‘천국’에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천국은 마음의 특정한 상태이다. 지상의 위 또는 죽은 다음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다. 신의 나라는 마음속의 특정한 경험이다.(p.261)” 마지못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원한과 가책으로 가득 찬 ‘노예’에게는, 삶 자체가 지옥이고 시험이며 행복은 죽은 다음에나 맛볼 수 있는 금단의 열매이다. 반면 기쁨으로 충만하고 긍정으로 넘쳐흘러 늘 베푸는 ‘귀족’의 삶은 매 순간이 천국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기적은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다. 기다리지 마라. 지금 이 순간을 삶의 가장 멋진 순간으로 만들라.『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십자가에 매달린 도적의 말은 이러한 복음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삶의 실천’을 통해 구원받고 하느님과 하나 되었음을 느끼는 것, 그럴 때 비로소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도적에게 예수는 말한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도적은 이미 천국에 있는 것이다.
유일신의 영광이 끝없이 찬미된다는 것. 그것은 신이 위대해지는 것이 아닌 인간이 왜소해지는 것이다. 예수가 원죄의 사함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가져왔을 때에는, 자신의 삶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며 삶을 긍정하고, 죽은 뒤가 아닌 삶 속에서 행복을 찾기를 바라여서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예수가 전하려 했던 ‘기쁜 소식(복음)’의 본질이 아니었을까.
이후 천년왕국은 예수의 재림이나 최후의 심판과 같이 종말을 통해서 보여 지지 않았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는 역사 안에서 행동하고 역사적 존재들과 함께 관계를 맺었다. 신성함이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역사) 가운데서도 영적인 삶이 진전되고 완전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영원한 삶은 지금, 영원한 삶은 여기이다. 성육신(成育神)이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바와 같이 우리는 이미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가르침처럼 삶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이미 영원한 삶에 도달한 것이다. 예수 스스로도 성경에서 말하지 않던가.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루카, 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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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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