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자리

유한필승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0.11.2
이 기사를 읽고 뜬금없이 '임춘애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포스팅을 하게 된 것은. 이 기사가
1986년 아시안게임 육상경기에서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며 육상의 불모지 한국에서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던 '라면소녀' 임춘애는 당시 우승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어요. 우유 마시는 친구가 부러웠고요."
이 같은 사실이 전해지자 많은 국민들은 안타까움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일화는 지금도 아련하다.(하략)
라고 시작하기 때문입니다다. 이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어요, 우유 마시는 친구가 부러웠고요."라는 인터뷰는 1986년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에 빛나는 임춘애 선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영화 '넘버쓰리'의 '송강호'가 생각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강조하고싶은 것은 이 헝그리 정신에 관해서야 헝그리....배가 고프다는 뜻이지
헝그리.. H.U.N.... 뭐 니들 일주일째 짱깨 컵라면 만으로 이렇게 때우는 거 잘알어.
물론 흰쌀밥에 고깃국 먹고 싶겠지..응?
그걸 참는 것도 일종의 훈련이야 훈련..응?
니들 한국복싱이 왜 잘나가다가 요즘 빌빌 대는 줄 아나..?
다 이 헝그리 정신이 없기때문이야 헝그리 정신이.옛날엔 말야
다 라면먹고두 진짜 라면만 먹고두 챔피언 먹었어
홍수환..홍수환..어..엄마 참피언 먹었다...다 라면먹고.....
또 복싱뿐만이 아냐..응? 그 누구야.....현정화..현정화 걔고 라면먹구...
라면만 먹고두 육상에서 금메달 3개씩이나 따버렸어....
임춘엡니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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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아시안게임 육상경기에서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며 육상의 불모지 한국에서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던 '라면소녀' 임춘애는 당시 우승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어요. 우유 마시는 친구가 부러웠고요."
이 같은 사실이 전해지자 많은 국민들은 안타까움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일화는 지금도 아련하다.(하략)
라고 시작하기 때문입니다다. 이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어요, 우유 마시는 친구가 부러웠고요."라는 인터뷰는 1986년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에 빛나는 임춘애 선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영화 '넘버쓰리'의 '송강호'가 생각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강조하고싶은 것은 이 헝그리 정신에 관해서야 헝그리....배가 고프다는 뜻이지
헝그리.. H.U.N.... 뭐 니들 일주일째 짱깨 컵라면 만으로 이렇게 때우는 거 잘알어.
물론 흰쌀밥에 고깃국 먹고 싶겠지..응?
그걸 참는 것도 일종의 훈련이야 훈련..응?
니들 한국복싱이 왜 잘나가다가 요즘 빌빌 대는 줄 아나..?
다 이 헝그리 정신이 없기때문이야 헝그리 정신이.옛날엔 말야
다 라면먹고두 진짜 라면만 먹고두 챔피언 먹었어
홍수환..홍수환..어..엄마 참피언 먹었다...다 라면먹고.....
또 복싱뿐만이 아냐..응? 그 누구야.....현정화..현정화 걔고 라면먹구...
라면만 먹고두 육상에서 금메달 3개씩이나 따버렸어....
임춘엡니다 형님....
나가있어!
사실 1986년에 아시안 게임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임춘애 선수가 직접 그런 말을 했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을겁니다.
결코 기대하지 않은 육상에서 장거리 달리기로 3관왕을 거머쥔 그녀는, 가난한 편모슬하에서 우유도 못마시고 라면만 먹고 뛰어서 금메달을 딴, 당시 시대가 바라는 그대로의 영웅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헝그리 정신의 현신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3관왕이 알려지면서 우유회사에서 우유를 드럼으로 보내왔다는 이야기도 당시의 열기를 생각하면 있을법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영웅 만들기'였습니다, 애초에 임춘애 선수가 '라면만 먹고'와 '우유도 못 먹고'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그녀는 전혀 '헝그리'하지 않았습니다.
임춘애 선수의 가정이 가난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육상을 시작해서 6학년 때 소년체전 6백미터 3위로 이름을 알린 그녀는 중2 전국 중고대회 8백미터 우승, 고1 전국체전 1천5백미터 우승 등, 그외 국내외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던 엘리트 육상인이었습니다. 물론 86 아시안 게임을 위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국가대표로 뽑힐 정도였죠.
1986년이 우리나라가 지금만큼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정도 성과를 내는 선수를 코치나 학교가 라면만 먹여가면서 운동을 시킬리가 있겠습니까? 당시 한국전력에서 장학금을 받았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습니다.
실제 인터뷰는 전담 코치였던 김번일 코치의 발언이고 사실은 '코치 사모님이 간식으로 라면을 끓여 주셨다.'라는 정도였는데 '라면만 먹고'로 뒤바뀐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체력강화를 위해 즐겨 먹었던 것은 도가니와 삼계탕 그리고 뱀탕'이었다고 합니다.
우유의 경우에는 더 극적인데, 우유를 먹고 운동하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우유를 마시지 못한 것은 마실 우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유를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체질 때문이었습니다. 유당 불내증이죠. 그래서 우유회사에서 선물로 보내온 우유가 처치곤란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기자들 뿐만 아니라 기사를 보는 우리들도 '헝그리 정신의 영웅'을 보고 싶었던 것인지, 그녀의 진실에는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절정은 짧았습니다. 고관절 부상 후유증이 대학 들어와 더욱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대학 들어와서 키가 무려 8cm나 자란 탓에 달리기 폼도 바뀌고 고관절 통증도 더욱 커졌다고 합니다.
88올림픽 최종 성화봉송주자로 뽑혔던 그녀는 예선 탈락 등의 저조한 성적을 보여 86년의 그녀를 기억하던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돈 맛을 알게 되니 뛰지를 못한다'라는 '배에 기름이 껴서 뛰지를 못한다'라는 '헝그리 신화'에 대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이 라면신화는 그녀에게 큰 상처를 안깁니다. 1997년의 위 인터뷰 기사에서 '지금이라면 괜찮을텐데 그때만 해도 사춘기였잖아요.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는 얘기가 그렇게 부끄러울수 없었어요. 나를 동정하는 시선도 싫었구요. 더군다나 전부 거짓말이었거든요. 그때까지 난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해 적이 없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분에 넘치게 많은 장학금을 받아서 돈 걱정은 해보지 않았어요.'라고 이야기 할 정도였으니......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이유가 처음 만났을 때 라면이나 우유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라는 말도, 역시 과장이긴 하겠지만 수긍이 갑니다.
지금도 간혹 그녀의 기사가 소개되곤 하지만, 위에도 인용한 1997년의 기사는 그녀가 보험 설계사가 되었을 때, 그리고 2004년에 외제차 딜러가 되었을 때 기사가 대부분입니다. 애초에 숫기가 없어 지도자 과정를 포기한 그녀라, 보험 설계사 시절을 스스로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는데 도움이 되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외제차 딜러도 6개월 정도 하고 그만두었는데, '인터뷰 하느라 차를 팔 시간이 없었다'라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지금은 수지 쪽에서 '청학동 임춘애 칼국수'집을 운영한다고 하는데(구글에서 임춘애로 검색하면 관련 검색어로 임춘애 라면과 임춘애 칼국수'가 뜨는군요...) 얼마전의 인터뷰 기사에서는 임대계약이 만료되 접을까 한다고 하는군요. 현재 그녀는 초등학교에서 학교전문코치로 육상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라면소녀는 와전된 얘기... 도가니탕, 뱀탕까지 먹고 뛰었죠 (문화일보)
가장 최근 인터뷰 기사를 하나 링크합니다. 살짝 '이제는 말할 수 있다'분위기의 기사인데, 시작이 "또 라면 이야기하실 거면 만나지 않겠어요.”입니다.
이 인터뷰 기사를 보면 김번일 코치가 악독코치로 비쳐질지도 모르겠지만, 저시절의 코치는 저정도가 '스탠다드'였습니다. 요즘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지만요......
그래도 이 포스팅 자료 찾으며 본 '뺨을 때려 고막이 찢어진 사건'을 징계도 없이 살짝 미담처럼 써놓은 87년 기사에서는 격세지감을 느꼈습니다. 그녀를 둘러싼 환경에서 제일 '헝그리'했던 부분이 아닌가 싶네요.

사실 1986년에 아시안 게임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임춘애 선수가 직접 그런 말을 했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을겁니다.

그녀의 3관왕이 알려지면서 우유회사에서 우유를 드럼으로 보내왔다는 이야기도 당시의 열기를 생각하면 있을법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영웅 만들기'였습니다, 애초에 임춘애 선수가 '라면만 먹고'와 '우유도 못 먹고'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그녀는 전혀 '헝그리'하지 않았습니다.
임춘애 선수의 가정이 가난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육상을 시작해서 6학년 때 소년체전 6백미터 3위로 이름을 알린 그녀는 중2 전국 중고대회 8백미터 우승, 고1 전국체전 1천5백미터 우승 등, 그외 국내외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던 엘리트 육상인이었습니다. 물론 86 아시안 게임을 위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국가대표로 뽑힐 정도였죠.
1986년이 우리나라가 지금만큼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정도 성과를 내는 선수를 코치나 학교가 라면만 먹여가면서 운동을 시킬리가 있겠습니까? 당시 한국전력에서 장학금을 받았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습니다.
실제 인터뷰는 전담 코치였던 김번일 코치의 발언이고 사실은 '코치 사모님이 간식으로 라면을 끓여 주셨다.'라는 정도였는데 '라면만 먹고'로 뒤바뀐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체력강화를 위해 즐겨 먹었던 것은 도가니와 삼계탕 그리고 뱀탕'이었다고 합니다.
우유의 경우에는 더 극적인데, 우유를 먹고 운동하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우유를 마시지 못한 것은 마실 우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유를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체질 때문이었습니다. 유당 불내증이죠. 그래서 우유회사에서 선물로 보내온 우유가 처치곤란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기자들 뿐만 아니라 기사를 보는 우리들도 '헝그리 정신의 영웅'을 보고 싶었던 것인지, 그녀의 진실에는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습니다.

88올림픽 최종 성화봉송주자로 뽑혔던 그녀는 예선 탈락 등의 저조한 성적을 보여 86년의 그녀를 기억하던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돈 맛을 알게 되니 뛰지를 못한다'라는 '배에 기름이 껴서 뛰지를 못한다'라는 '헝그리 신화'에 대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이유가 처음 만났을 때 라면이나 우유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라는 말도, 역시 과장이긴 하겠지만 수긍이 갑니다.
지금도 간혹 그녀의 기사가 소개되곤 하지만, 위에도 인용한 1997년의 기사는 그녀가 보험 설계사가 되었을 때, 그리고 2004년에 외제차 딜러가 되었을 때 기사가 대부분입니다. 애초에 숫기가 없어 지도자 과정를 포기한 그녀라, 보험 설계사 시절을 스스로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는데 도움이 되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외제차 딜러도 6개월 정도 하고 그만두었는데, '인터뷰 하느라 차를 팔 시간이 없었다'라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지금은 수지 쪽에서 '청학동 임춘애 칼국수'집을 운영한다고 하는데(구글에서 임춘애로 검색하면 관련 검색어로 임춘애 라면과 임춘애 칼국수'가 뜨는군요...) 얼마전의 인터뷰 기사에서는 임대계약이 만료되 접을까 한다고 하는군요. 현재 그녀는 초등학교에서 학교전문코치로 육상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라면소녀는 와전된 얘기... 도가니탕, 뱀탕까지 먹고 뛰었죠 (문화일보)
가장 최근 인터뷰 기사를 하나 링크합니다. 살짝 '이제는 말할 수 있다'분위기의 기사인데, 시작이 "또 라면 이야기하실 거면 만나지 않겠어요.”입니다.
이 인터뷰 기사를 보면 김번일 코치가 악독코치로 비쳐질지도 모르겠지만, 저시절의 코치는 저정도가 '스탠다드'였습니다. 요즘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지만요......
그래도 이 포스팅 자료 찾으며 본 '뺨을 때려 고막이 찢어진 사건'을 징계도 없이 살짝 미담처럼 써놓은 87년 기사에서는 격세지감을 느꼈습니다. 그녀를 둘러싼 환경에서 제일 '헝그리'했던 부분이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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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