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haine80
- 작성일
- 2005.12.5
강희제
- 글쓴이
- 조너선 D. 스펜스 저
이산
조너선 스펜스는 그의 책에서 강희제의 모습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과거의 현명한 군주를 이야기하는 책들이 일반적으로 그들을 미화하여 사람들은 과거의 군주국가에 관한 환상을 지니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결여된 절대왕정시대는 명백히 제도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군주가 강희제와 달리 폭군이라면 절대왕정국가에서는 그를 견제할 어떤 장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펜스의 책에서 우리가 더 관심 있게 봐야할 부분은 절대왕조시대의 현명한 황제 강희제가 아니라 이성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인간적인 지도자 강희제인 것이다.
우리는 강희제가 통치하는 청의 모습을 통해서 당시 유럽인이 갖고 있던 오리엔탈리즘의 오류를 알게 되었다. 사실 계몽주의나 합리주의가 널리 확산된 곳이 유럽이기는 하나 유럽을 제외한 많은 국가에서도 자기들만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럽인들은 ‘나’와 다른 ‘모두’는 암흑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자신들의 방식대로 그들을 일깨워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나라들을 방문하기 이전에 이미 이런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모습이 정확히 보일 수 가 없다. 그들이 자랑하는 이성으로 유럽인들은 왜 아시아인들의 생활습관이 자신의 것들과 다른지 분석하지 못한 채 오류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강희제가 보여준 모습은 유럽의 계몽주의자를 능가할 정도로 이성의 이점을 받아들이고 따르고 있었다. 한 때 자신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명의 황제에 대한 역사 편찬에서도 오직 냉철한 정확성만을 강조한 강희제에게 절대왕정이 지닌 비합리적인 요소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을 본다면 유럽인이 지닌 선민의식이 얼마나 비합리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강희제는 유럽의 편견을 뛰어넘음과 동시에 유럽의 한계, 더 나아가 현대사회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성은 절대선이라 믿던 유럽인들은 결국 합리적인 이성이 만들어낸 기계로 서로를 죽이는 비합리적인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현대 사회역시 이성을 바탕으로 더 큰 물질적 이득과 효율성만을 강조하면서 물질주의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를 압도하게 되는 비합리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강희제는 이들과 달리 이성이라는 가치를 명백히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P.238)"라고 이야기 한다.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거대 담론에 휩싸여 그것을 신봉한 것이 아니라 그는 단순히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방법을 추구하며 나라를 다스렸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맹목적 이성이 갖게 되는 한계를 바라볼 수 있었고 감성의 요소를 적절히 사용한 것이다. 니체의 이야기도 등장하기 훨씬 전 과도한 이성의 문제점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필요하면 이성의 한계-의학이 할머니를 더 이상 치유할 수 없다는 것-를 받아들이고 감성의 요소-하늘에 기도를 드리는 것-로 감정을 발산하는 그의 모습은 오직 이성에만 매달리고 있는 유럽인과 현대인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 넘는다.
니체는 훗날 이성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유럽을 치유한 의사에 비유된다. 미국이 급속한 속도로 합리주의에 대한 맹신이 퍼져나가 경제 대공황은 물론 정신적 공황을 겪은 것과 달리 유럽에는 니체와 프로이드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이성의 한계를 깨닫고도 많은 사람들이 공황을 탈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강희제가 어떻게 청의 기틀을 마련하고 아들과 손자가 이어갈 청의 황금시대를 시작한 황제가 된 것인지 잘 보여준다. 그는 기존의 청에 존재하고 있던 비합리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성의 중독성도 잘 경계했기 때문에 꽤 오랜 기간 청에는 니체와 같은 의사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죽은 사람의 고통을 생각해 승리자의 칭호를 거부하는 강희제를 훗날 니체가 만나게 된다면 니체는 그를 유럽의 편견과 이성의 불합리성을 뛰어넘은 진정한 초인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우리는 강희제가 통치하는 청의 모습을 통해서 당시 유럽인이 갖고 있던 오리엔탈리즘의 오류를 알게 되었다. 사실 계몽주의나 합리주의가 널리 확산된 곳이 유럽이기는 하나 유럽을 제외한 많은 국가에서도 자기들만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럽인들은 ‘나’와 다른 ‘모두’는 암흑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자신들의 방식대로 그들을 일깨워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나라들을 방문하기 이전에 이미 이런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모습이 정확히 보일 수 가 없다. 그들이 자랑하는 이성으로 유럽인들은 왜 아시아인들의 생활습관이 자신의 것들과 다른지 분석하지 못한 채 오류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강희제가 보여준 모습은 유럽의 계몽주의자를 능가할 정도로 이성의 이점을 받아들이고 따르고 있었다. 한 때 자신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명의 황제에 대한 역사 편찬에서도 오직 냉철한 정확성만을 강조한 강희제에게 절대왕정이 지닌 비합리적인 요소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을 본다면 유럽인이 지닌 선민의식이 얼마나 비합리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강희제는 유럽의 편견을 뛰어넘음과 동시에 유럽의 한계, 더 나아가 현대사회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성은 절대선이라 믿던 유럽인들은 결국 합리적인 이성이 만들어낸 기계로 서로를 죽이는 비합리적인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현대 사회역시 이성을 바탕으로 더 큰 물질적 이득과 효율성만을 강조하면서 물질주의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를 압도하게 되는 비합리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강희제는 이들과 달리 이성이라는 가치를 명백히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P.238)"라고 이야기 한다.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거대 담론에 휩싸여 그것을 신봉한 것이 아니라 그는 단순히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방법을 추구하며 나라를 다스렸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맹목적 이성이 갖게 되는 한계를 바라볼 수 있었고 감성의 요소를 적절히 사용한 것이다. 니체의 이야기도 등장하기 훨씬 전 과도한 이성의 문제점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필요하면 이성의 한계-의학이 할머니를 더 이상 치유할 수 없다는 것-를 받아들이고 감성의 요소-하늘에 기도를 드리는 것-로 감정을 발산하는 그의 모습은 오직 이성에만 매달리고 있는 유럽인과 현대인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 넘는다.
니체는 훗날 이성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유럽을 치유한 의사에 비유된다. 미국이 급속한 속도로 합리주의에 대한 맹신이 퍼져나가 경제 대공황은 물론 정신적 공황을 겪은 것과 달리 유럽에는 니체와 프로이드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이성의 한계를 깨닫고도 많은 사람들이 공황을 탈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강희제가 어떻게 청의 기틀을 마련하고 아들과 손자가 이어갈 청의 황금시대를 시작한 황제가 된 것인지 잘 보여준다. 그는 기존의 청에 존재하고 있던 비합리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성의 중독성도 잘 경계했기 때문에 꽤 오랜 기간 청에는 니체와 같은 의사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죽은 사람의 고통을 생각해 승리자의 칭호를 거부하는 강희제를 훗날 니체가 만나게 된다면 니체는 그를 유럽의 편견과 이성의 불합리성을 뛰어넘은 진정한 초인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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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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