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the
  1.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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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logue - 아리엘 에리, 실종 ->



 "…비가 오네."


 후텁지근한 여름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리듯, 차갑게 식은 하늘에서 비가 소복소복 내렸다. 길을 걷던 여성은 기름 먹인 케이프와 가죽 스커트로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여성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3마일 정도를 더 걸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은 가빠지는 호흡을 하얀 숨결로 뱉으며 정비가 잘 된 도로에 들어선다.


 "여 아가씨! 말 좀 물읍시다. 머리카락 은색에 눈 파란 여자아이 하나 못 보셨소?"


 종이와 잉크 따위를 가방에 가득 넣고 걸음을 옮기던 행상이 길가에 멈추고 그녀에게 물었다. 점점 빗줄기가 굵어진다.


 "모르겠는데. 혹시 그 여자애 댁 딸이야?"


 "하! 그럴 리가. 전쟁 통에 부모 잃고 떠돌다가, 자기 동생이랑 같이 이 마을에 머무른 여자아이로 통하던데? 아무튼 아가씨, 마을 들를 참이면 듣기 좋고 썩 재밌는 농담 하나 둘 준비해 둬. 마을에 있는 마법 학교에 들렀는데, 가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이 그 여자아이 행방만 물어보더군! 난 말주변이 없어서 그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못해줬지 뭔가 하하!"


 "충고 퍽이나 고맙군. 다음에 마주치면 잉크라도 한 병 살게."


 여성은 행상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며, 사뭇 굵어진 빗줄기가 단단하게 다져진 돌바닥을 투둑투둑 때리는 그 길을 걸었다. 행상도 등 돌려 자기 길을 떠났다. 서로가 멀어졌음에도, 빗줄기 속에 오고 가는 행인들 모두가 "기다란 은발에 깊은 바다처럼 파란 눈동자를 가진 예의 바르고 착하며 또 예쁘기까지 한 소녀" 의 행방을 물었다. 답은 없다.


 여자아이, 아리엘 에리의 행방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 -

- .


 "유피…기분은 좀 어때요?"


 책상 앞에 앉아 바이블을 필사하던 신학 클래스의 견습 수사 루체(Luce)가 고개를 돌려 그리 물었다. 질문을 받은 여자아이, 아리엘 유피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윤기를 뽐내는 분홍빛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 유피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법으로 밝히는 등불 아래, 그 파르스름한 흰 빛 아래 유피의 노란색 눈동자는 잘 다듬어 반짝이는 황동빛 광채를 머금는다. 


 까만 잉크 엎지른 것 같은 루체의 긴 머리칼이 살짝 열린 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렸다. 루체는 귀 뒤로 앞머리를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걸을 때마다 루체의 보드랍게 부푼 가슴이 위로 아래로 가볍게 출렁였다. 자신이 믿는 절대자 앞에 정갈한 모습으로 설 때마다 입는 스카풀라리오가, 도리어 스스로의 "여자 몸" 을 더 드러내는 사실을 루체는 아는 것일까, 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상체를 감추듯 받친다.


 "다들 너무 잘 해줘서…에헤헤, 정말 고마워 루체 언니. 나 너무 슬퍼서 어쩔 줄 몰랐는데, 그래도 이젠….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더 좋아."


 차오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유피는 애써 웃었다. 그 모습이 루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언니였던 "아리엘 에리" 의 실종 이후, 학교에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홀로 집에 틀어박혀 울기만 했던 그 아이…루체는 그 모습이 너무나 가슴 아파, 유피가 교내의 기숙사로 오는 것을 도왔다. 거기서 유피는 또래인 메리(Mary)와 엘리제(Elise)의 도움을 받아 전보다 자주 웃고 밝은 모습을 비추긴 했지만, 일어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유피는 루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맙다 말하는 것이다.


 "이리 오세요 유피…. 아프고 외로우면 언제든 제 가슴에서 울어도 좋아요……."


 루체는 가볍게 유피를 안았다. 두 팔로 그 동그랗고 가녀리며 또 파들파들 떠는 어깨를 감싸고, 큰 가슴에 울먹이는 유피의 얼굴을 묻어주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또 좋은 향기, 유피는 헤어진…아니 없어진 언니의 자리를 느끼면서도, 언니와 동갑내기 소녀인 루체의 품이 "아리엘 에리" 를 떠올리게 만들어,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흑, 으흑…으아아앙!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나…미안, 미안해…나, 언니가 보고 싶어…흑……."


 "괜찮아요, 아픈 걸 숨기지 않아도 된답니다……어마, 저도 모르게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요, 아, 아하하."


 유피를 품은 루체도 눈물을 글썽였지만, 곧 손끝으로 눈물을 거두고 더욱 힘을 주어 유피를 끌어안았다. 


 "야호! 오늘 수업 드디어 끝! 어라라? 너희 둘이 사귀는 사이? 나, 나 못 본걸로 할게!"


 4인실의 문을 열고 발을 들이던 메리가, 유피와 루체의 모습을 보고는 당황과 함께 고개를 휙 돌렸다. 그 곁을 또각또각, 구두 소리 규칙적으로 울리며 엘리제가 스쳐 안으로 들어섰다. 양갈래 묶은 금발, 그 중에서 오른쪽 갈래를 살짝 매만지며 엘리제는 둘의 분위기를 살핀다. 그렇게 엘리제는 흐느끼는 유피와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루체의 모습을 보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윽고, 둘의 간격이 살짝 멀어지고 엘리제는 메리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흥, 누가 봐도 루체가 유피를 위로하고 있었잖아.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이래서 너란 애는…."


 엘리제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메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곧 알았다는 듯이 활짝 편 손바닥에 가볍게 말아 쥔 주먹을 부딪쳤다. 


 "아항 그렇구나! 그럼 말 나온 차에 나도 유피 위로해 줄까아?"


 울음을 이제 막 그치고 고개를 든 유피에게 메리가 사박사박 걸었지만, 곧 엘리제가 메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돌아보는 메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가로젓는 엘리제의 모습뿐이었다. 


 "뭐야 왜 그래애? 혹시 너 먼저 위로 받고 싶어서 그래?"


 메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탐스럽게 부푼 빠알간 곱슬머리를 매만지더니, 곧 엘리제의 머리에 손을 얹어 머리카락을 막 헝클었다. 장난기 느껴지는 그 손길에 엘리제는 화가 치밀었지만, 유피 앞에서 소리를 빽 지를 순 없어 한숨을 한 번 더 내쉴 뿐이다.


 "하…너란 애는 정말 이해를 못하겠네. 넌 마법보다 사람 마음이나 분위기 읽는 법, 그리고 매너를 먼저 배워야 해. 으우, 이래서 내가 너 같은 애랑 엮이는 걸 처음부터 꺼렸는데. 내 말 알아들었지? 그럼 이제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나 하지 그러니?"


 엘리제는 귀찮은 듯 손사래를 쳤지만, 메리는 그런 엘리제의 허리를 꼭 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부볐다.


 "매너어? 암튼 넌 생각 없지? 그럼 내가 위로 받을 거다 뭐! 우후후 부들부들하고 포근한 이 느낌이 딱이야! 완전 위로되네?"


 "이, 이게 무슨 짓이야…어, 얼른 놓지 못해? 쪼그맣고 가슴도 작은 게 힘은 왜 이렇게 세! 어, 얼굴 치워! 으…!"


 메리의 얼굴을 밀어내려는 엘리제와 그런 엘리제에게 바싹 붙는 메리의 모습을 보고 유피는 무심결에 웃음을 흘렸다. 자존심 높고 도도하지만, 메리와 함께 있으면 그 페이스에 말려 자기도 모르게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는 그 아이. 이런 친구들과 함께라면……그렇게 유피는 입을 꾹 다물고 허리를 편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언니도 자신이 축 늘어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본다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 생활은 즐겁고 행복한 거예요…유피, 내일부터는 등교할 수 있겠죠?"


 루체의 말에 유피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흩날려 방안 가득 풀꽃과 닮은 은은한 향기를 풍긴다.


. -

- .


 "여기 오면서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받았거든. 내 대답은 같아, 그런 여자애 몰라." 


 여성은 가죽 상점의 무두질쟁이 영감에게 심드렁하게 답하며 몸에 묻은 빗물을 상점 입구에서 털었다.


 그랬다. 외지인들은 사람 하나의 실종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혹 약초 도매상이나 스크롤 필사 도구 중개상, 그리고 무두질 잘 된 가죽 갑옷을 지어 입은 헌터나 레인저 같은 외지인이라면 아리엘 에리의 행방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여기며 물음을 던졌지만 답은 똑같았다. 마주친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으며, 알지도 못한다.  


 사람들의 소득 없는 문답이 몇 번 오가고, 빗줄기가 기세를 늦춘 무렵 마법 학교의 소환 카테고리 클래스 수석이었던 쿠나(Kuna)가 끈을 잡았다.


 "이번엔 찾았다고? 옳지 잘했어." 


 그녀가 소환한 다람쥐 모습의 마력 생명체가 숲을 돌아다니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주인에게 위치를 알렸다. 그렇게 쿠나는 숲길을 헤치고 걷고 또 걸어 넓은 화원에 도달했다. 마법 다람쥐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두 발로 서서 주변을 둘러보다, 오른쪽 앞발을 들어 저 먼 수풀을 가리킨다. 


 쿠나는 마력 생명체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고, 다시 자신의 주변을 쳐다봤다. 저기나 여기 모두 인적이 드물었다. 아니, 사람의 발길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이렇게 외딴 곳에 펼쳐진 넓은 공간…이름 모를 들풀과 꽃들, 그리고 약용 식물이나 허브 따위가 흐드러지게 자생하는 곳…쿠나는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다만, 왠지 여기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약초가 필요한 사람이 종종 들를 만한 곳이니까, 약학과 치유 마법을 수학하던 에리가 들를 확률도 낮지 않다. 


 "역시……." 


 수풀 속에서 쿠나는 낡고 헤진 약초 바구니와 굽 낮은 가죽 구두 한 켤레를 찾아냈다.


 마법 다람쥐는 그 앞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쿠나의 어깨에 올라서서 앞발을 비볐다.


 쿠나는 에리가 남긴 물건을 찬찬히 살피고, 미미한 마력의 흔적을 감지한다. 그 아이 물건이 확실하다. 실종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마력의 잔향이 남아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별다른 재주라든가 기교는 없지만, 마력의 절대량은 고위 마법사를 압도할 정도였으니까, 학교에서도 교원들의 주목을 받은 아이가 바로 아리엘 에리, 그 아이다. 


 "뭐야 이건…마력이 더 있잖아? 에리…것이 아니야." 


 에리의 것이 아닌, 다른 마력 또한 느껴진다. 쿠나는 마법 다람쥐의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입술을 깨문다. 


 이곳에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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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시간을 앞두고 마법 학교 도서관 내부의 소회의실에서 정적이 감돌았다. 


 "많이 유감스러운 일을…여러분께 말씀드려야겠어요. 마음을 다잡아주세요." 


 사서장 베라(Vera)는 불안으로 떨리는 얼굴을 애써 감추고, 테이블 위에 놓인 구두 한 켤레와 약초 바구니, 그리고 왕실 도서관에서 빌려온 두툼한 책 한 권을 쳐다보았다. 까만 프레임 안경을 코끝에 걸친 애니(Annie)가 굳은 얼굴로 책을 펼쳤다. 인력으로 제어가 힘든 "마물" 들의 생태 따위를 기록한 왕국 공식 금서, 그 책에 "아리엘 에리 실종 사건" 의 책임자가 기록되어있다.


 펼쳐진 책에 실린 삽화를 마주한 약학 및 치료 마법 학과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찰흙을 섞어 반죽해 구운 흑연으로 그린 그 그림은, 거대한 촉수 마물의 모습이 틀림없었다. 암컷을 탐하며 무한히 번식을 반복하는, 마물.  


 "이 촉수 마물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어디에서 왔는지 모릅니다, 만 근처 부지의 숲 깊이 봉인해놓은 그 마물인 것은 확실합니다. '생식 기능을 갖췄으면서 마력을 지니고 있는 암컷' 에게 이끌리는 것이 특징인 마물로서, 그러한 암컷으로 번식 활동을……뭐, 그렇게 됐습니다. 본 문헌에 따르면 마물에게 붙잡힌 암컷은, 아 이 경우엔 아리엘 에리 양이 되겠군요. 말을 다시 정돈하지요. 안타깝게도 에리 양은 촉수 마물에게 붙잡혀 생식 활동을 위한 그릇, 아니 '촉수의 못자리' 가 되었다고 판단하는 게…이성적인 관점으로 보입니다." 


 말을 마친 애니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소환학과장 리이나(Lyeenah)와 교무 주임, 교구장 루아 주교와 문헌 정보 학과장, 왕궁 서기와 재무 회계 담당자, 촌로와 노동 조합 위원장, 그렇게 모인 관계자들은 난색을 표했다. 아무도 예상을 못했던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마을 단위에서 처리할 수 없는 일에 자신들이 부딪쳤다는 것에 모두가 주목했다. 규모가 크고 외부인의 왕래가 잦다 해도 결국 일개 마을일 뿐이다.


 섣불리 자신들끼리 나섰다가 사후에 책임 소재를 묻기는커녕, 사전에 관계자 모두가 마을과 함께 사라질 것을 걱정해야 한다. 


 "네…이렇게 일이 일어났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어요. 왕성에 직접 연락을 넣어 구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모두 인정하십니까? 이견 없으시면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물론, 국왕 전하께 갖출 예의와 우리 모두의 자필 서명도 필요하겠지요. 펜이 없으신 분께는 사서 애니에게 언질을 주시고, 가지고 계신 분은 지금 서명 부탁드립니다." 


 베라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다시 소회의실에 고요가 드리우고, 사각사각 종이 위를 스치는 펜촉 소리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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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체, 내 이야기를 잘 들어보렴."


 베일 아래로 드러난 교구장의 암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분명히 중요한 일을 고해야 하는, 그렇지만 그것이 듣는 이에게 충격을 줄 것이 확실할 때에 사람들은 저런 태도를 보인다. 상냥하고 아름다우며 또 지적인 교구장 루아(Lua)에게서 불안을 느낀 견습 수사 루체는 심호흡을 한 번 한다. 사안이 중한 것이 분명하다.


 "네 루아 주교님…저는 어떤 얘기도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단다. 후후…안 좋은 얘기를 네게 할 때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운을 떼었지 아마. 내 나쁜 버릇이란다, 이해해줘." 


 "좋은…소식부터 들을게요."


 오른손에 묵주를 쥔 루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굽혀 루체와 눈높이를 맞췄다. 올리브 나무를 깎아 다듬어 만든 묵주알이 파르르 떨렸다. 얼굴을 들어 루아와 시선을 마주친 루체는 차분히 그녀가 전할 소식을 기다린다.


 "아리엘 유피의 언니, 아리엘 에리의 행방을 알았단다. 소환 클래스 수석인 '쿠나' 라는 아이가 큰일을 해줬어. 마을 근처 깊은 숲에 숨겨진 화원 근처라고 하는구나. 에리는 일단…살아있단다.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고 해. 걱정을 할 정도는 아니야, 그래…이 다음은 나쁜 소식 차례겠구나. 에리는 추악한 마물에게 붙들려 있단다…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그렇게 문란한 행위를 여자아이에게 강요하면서…번식에 미친 촉수 마물이 지금 아리엘 에리를 붙잡고 있어. 선생님들이랑 나,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부디 유피가 상처 입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 사실을 알려주렴. 나, 비겁한 어른이라서 루체한테 정말 미안해."


 이야기를 마친 루아는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글썽였다. 루체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준다. 보드랍게 퍼지는 온기가 서로를 위로한다.


<계속>



   

 <Prologue - 아리엘 자매, 재회 ->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고 자유 시간, 기숙사 내부 4인실에서 떠들썩한 분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가라앉았다.


 차분히 메리의 머리카락을 빗어주는 엘리제와, 가만히 앉아 엘리제의 우아한 손길을 느끼며 두 눈을 감고 이름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는 메리, 창밖에 뜬 푸른 달을 황동빛 광채 드리운 노란 눈동자로 담고있는 유피, 필사를 마친 책에 커버를 씌우는 루체, 그렇게 모두에게 평온이 감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루체가 유피에게 사박사박 걸어가는 그 순간 아늑함이 깨진다.


 "응, 루체 언니? 무슨 일이야?"


 부쩍 핏기를 되찾은 옆얼굴에 파르스름한 달빛을 받으며 유피가 물었다. 루체는 천천히 창가까지 걸어가 창을 반쯤 닫고, 열린 틈에 손등을 내밀어 불어오는 바람을 잠시 맞았다. 차게 식기는 했지만 아직은 미지근하고 또 끈적한 바람이다. 


  "주교님께서 에리의 행방을 확인했다고 해요. 에리는 지금…힘든 시련을 겪고 있어요.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만나러 가고 싶어요. 유피도 저와 같은 마음일 거예요. 하지만, 하지만……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한 번에, 그리고 수월하게 얻을 수 있지는 않아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해서……."


 유피는 의자에서 일어나 루체를 올려다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에서 눈물이 흘러, 유피의 뺨을 타고 내렸다. 루체는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손끝으로 유피의 눈물을 닦아준다.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어, 그치만…나, 언니랑 이제 만날 수 있다는 거야? 그렇지? 루체 언니…?"


 엘리제가 향나무 빗 든 손을 멈추고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메리도 엘리제의 손길이 더 느껴지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피와 루체를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을 깨, 이윽고 유피와 루체 두 소녀는 서로를 두 팔 벌려 안았다. 메리도 이번만큼은 그 둘을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다, 엘리제의 손을 가볍게 잡는다. 엘리제는 메리가 또 장난을 치려는 것이 아닌가 싶어 눈을 흘겼지만, 사뭇 심각한 그 옆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맞잡은 손이 함께 움직여, 두 소녀는 두 소녀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이리 오세요 유피…그리고 엘리제, 메리. 모두 아리엘 에리의 안녕을 위해 기도해요."


 모두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가고 고요를 차분하게 몰아내는 루체의 기도 소리가 방을 가득 채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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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밤이 깊어 모두가 잠들 시간이 되어 침대에 들었을 무렵, 유피는 언니의 파랗고 예쁜 눈을 떠올리며 시리도록 푸르게 뜬 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병에 담긴 물약을 가볍게 들이켰다. 근육을 풀고 신체의 긴장을 누그러뜨려 수면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약물이었다. 언니인 에리를 잊지 못해 잠을 못 이루는 유피에게 특별 처방된 그 수면제는, 달콤한 첫 맛 뒤에 아픔과 닮은 씁쓸함을 전한다.


 "…언니. 정말 많이, 무지 보고 싶어…읏, 흑."


 눈물을 누르고, 울음을 누르고, 그렇게 유피는 루체의 곁에 누워 그 크고 포근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새근새근, 소녀들의 가늘고 긴 호흡만이 들리는 불 꺼진 밤에 유피는 눈을 꼭 감았다. 언니가 돌아오면……정말 좋을 거야. 기숙사에서 같이 지내는 메리, 엘리제, 그리고 루체 언니도 모아서 축하를…그렇게 생각에 잠긴 유피는 곧 약 기운이 들어 스르르 잠든다.


 똑.


 또독.


 쿡.


 차가운 호수에 빗방울 떨어져 이는 잔물결처럼, 유피의 머릿속을 무언가가 천천히 헤집었다. 침묵을 가장한 소란, 그리고 점점 더 똑 또독 물 떨어지는 소리가 점차 콩 콩 크게 울려퍼졌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몽롱한 감각 속에서 유피는 지금 들려오는 소리가 꿈속의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렇게, 유피는 눈을 뜬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비명과 닮은 외침, 그리고 쿵쿵 쾅쾅 물건들이 울리는 소리다.


 "큰일이야! 어서 일어나렴!" 


 유피가 잠을 청했던 다인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사감 세실리아(Cecilia)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파직, 마력의 스파크가 바짝 튀어 등불이 환하게 켜지고, 우당탕 퉁탕 뭔가가 쓰러지고 엎어지는 소리가 밖에서 울려퍼졌다. 콰장창, 뭔가가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약에 살짝 취했던 유피는 루체의 품에서 힘겹게 벗어나,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요? 네? 세실리아 선생님?!"


 엘리제가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를 높였다.


 세실리아는 엘리제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나머지 아이들의 상태를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이제 막 눈을 비비며 깨어나는 메리의 모습과,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피의 손을 꼭 잡아주는 루체의 모습, 그 모두가 제자리에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린 세실리아는 후우 한숨을 급히 내쉰다.


 "우웅…대체 웬 소란이야? 다들 일어났어? 벌써 아침인가? 하암…."


 메리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하품을 하던 그때, 쿠르릉 대지를 울리는 힘차고 거센소리와 진동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꺗! 하고 메리가 휘청거리자 엘리제가 재빨리 다가가 그 아이를 부축했다. 가쁘고 뜨거운 숨이 서로의 뺨에 닿고, 그렇게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긴장이 모두에게 전염된다.


 "칠칠치 못한 건 이런 때도 여전하구나, 메리 너란 애는 정말."


 "헤에…너도 사실 무서우면서." 


 바들바들 떠는 엘리제를 이번엔 메리가 감싸 안았다. 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메리의 다급하면서도 규칙적인 고동이 귀에 들리자 엘리제는 곧 마음을 살짝 놓았다. 루체는 세실리아의 눈치를 살피다, 무릎을 굽혀 유피와 눈높이를 맞춘다. 유피의 부르르 떠는 노란색 눈동자에 루체의 다급한 얼굴이 비친다. 


 "아리엘…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어요. 옷 보관함에…숨을 수 있겠어요? 소란이 가라앉으면 그때…다시 만나요." 


 루체가 묵주를 오른손에 감아쥐며 왼손으로 옷가지 따위를 보관하던 나무 상자를 열었다. 유피는 그 이상한 제안에 고개를 저었지만, 사방에서 번지는 다급한 외침과 우당탕 쿵쾅 울리는 소리에 겁을 먹고는 상자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상자의 뚜껑이 닫혔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언니를 만날 거야, 그렇지? 유피는 속으로 희망을 품었지만…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 생각은 사라지고 만다. 


 바깥이 보이지 않고, 고개를 제대로 들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공간에서 가녀린 그 여자아이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마음을 마비시킨다. 


 "꺄? 꺄아아앗!" 


 모두의 안전을 확인하고 몸을 문쪽으로 돌리던 세실리아는, 크고 두껍고 또 유연한 분홍빛 촉수에 휘감긴 채 비명을 지르며 끌려갔다. 그리고 다른 촉수 가닥들이 그 위로 한데 엉겨 붙었다. 마치 쩍 벌린 괴물의 아가리가 사람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세실리아의 흔적이 사라지고 곧장, 촉수들의 무리는 미처 숨거나 도망치지 못한 아이들을 집어삼키고 있다. 거칠고 난폭하게 해변을 겁탈하는 파도처럼, 촉수가 기숙사를 덮친다. 


 "…무서워, 무섭다고. 하지만 하지만…너 같은 애 앞에서 떨고 싶지는 않아!"


 엘리제는 메리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압도적이고도 잔혹한 폭력 앞에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억누르며 똑바로 섰다. 오기나 배짱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가만히 서서 벌벌 떠는 것은 엘리제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메리는 그런 엘리제의 떨리는 손을 꼭 잡아주고, 가볍게 웃어준다.


 루체는 옷 보관함을 바라보며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제발, 유피를 지켜주세요. 그렇게 몇 번이고 되뇐다.


 "…응?, 꺄아앗! 놔, 놓으라고!" 


 전혀 주시하고 못하고 있던 아래쪽, 그렇게 촉수 가닥들은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침투하여 엘리제의 가느다란 발목을 휘감았다. 저항은 무의미했다. 바닷속 수초처럼 하늘거리던 그것은 여자아이의 촉촉한 살결과 부드럽게 부풀듯 발산하는 마력에 반응하여 단단하고 튼튼하게 굳었다. 거인의 손아귀에 잡힌 것처럼, 엘리제는 바닥에 엉덩이를 찧고는 그대로 질질 끌려간다.


 "엘리제! 내, 내가 구해줄…어라라?"


 다급하게 손을 뻗는 엘리제와, 그 손을 꼭 잡은 메리. 그런 상황을 촉수는 예상이라도 한 것일까, 메리의 가녀린 목과 잘록한 허리에 제법 두꺼운 촉수가 휘감긴 후 가볍게 졸라서 바닥에 무릎 꿇린다. 아흑, 가벼운 신음과 함께 눈물을 찔끔 흘리는 메리는 곧 엘리제와 함께 4인실 밖으로 끌려나간다. 


 "얼른 도망치지 그랬어! 이 바보…!"


 바닥에 등을 대고 질질 끌려가는 도중에도, 엘리제는 오기를 넘은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이미 체념이 묻어나온다.


 "아, 아하하…나, 엘리제 정말 좋아하는 걸. 헤어지면 싫어…." 


 발그레한 장밋빛 뺨에 투명한 눈물을 떨구며, 메리는 엘리제에게 그렇게 말했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그 말에, 엘리제는 정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렇게 끌려가 도착한 곳에서도…메리가 있어주니 외롭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고…그런 이상한 생각만을 하며, 엘리제는 눈을 질끈 감는다.


 "넌 정말…내가 할 말이 없게 만들어. 언제나……."


 그렇게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쿠당카당, 책장이 쓰러지고 책상이 우지끈 부서졌다. 기도를 마치고 벽에 기대어 성호를 긋던 루체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압도적인 폭력의 파도 앞에 기도는 아무런 힘을 주지 못했다. 유피 앞에서 감추고 숨긴 그 진실이, 지금 자신을 불태우러 오는 느낌이 들어 루체는 도저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또르르, 눈물이 루체의 발갛게 물든 뺨을 스쳐 나무 바닥에 톡 토독 떨어진다. 


 "안녕, 유피…. 행복…해야 돼요." 


 유언처럼 남긴 그 말, 그렇게 루체도 촉수에 팔과 다리가 휘감겨 끌려가버렸다. 원피스 형태의 수사복 아래로 드러난 루체의 허벅지로 촉수가 스멀스멀 기어 뱀처럼 휘감겼다. 분홍색의 그 근육 덩어리들은 거칠게 루체의 사지를 묶고, 입을 봉한다. 그리고, 눈가에서 샘솟는 눈물마저 혀와 같은 부속지로 핥아 훔친다.


 "언니…언니……." 


 웅크려 떨던 유피는 다시금 온몸에 번지는 약효 탓에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잃었다. 부디 이 모든 일이 꿈이었으면, 자기가 언니를 정말로 무지 엄청 보고 싶어서, 잠깐 정신이 불안해져서 꾼 악몽이었으면…그렇게 유피는 덧 없는 희망을 품는다.


 그 희망의 행방은, 알 수 없다. 


. - 

- . 


 쁘쯔, 쯔즛. 


 풀벌레 우는 소리에 유피는 정신을 차렸다.


 찌뿌둥한 몸을 겨우 가눠 상자의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듯 기숙사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듯 불길한 고요만이 남았다. 


 "메리!…엘리제! 쿠나! 세실리아 선생님! 루체…언니! 베라 사서님! 제발…내, 내 목소리가 들리면…대답을 좀……!"


 힘없이 걷는 소녀 아리엘 유피는 아랫배 울리는 허기를 느끼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이의 이름을 있는 힘껏 외쳤다. 하지만 그 외침 모두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소녀의 귀를 때릴 뿐이다. 기숙사를 나와 식당으로도 향했지만, 당직을 서는 선생님이나 아침이 오기도 전에 화덕 불씨를 살리는 조리장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다급해진 유피는 마법 학교로 달렸다. 마치 약속이라도 하고 자신을 단체로 놀리는 것처럼 건물 내부의 어느 교실이든 그 어떤 학생이나 선생님의 모습도 유피의 눈에 띄지 않는다. 숨이 가쁘게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채로 유피는 달리고 또 달리다 활짝 열린 도서관 입구에서 풀썩 주저앉고 만다. 


 책장이고 탁자고 모두 엉망진창으로 쓰러져있고, 무뚝뚝하지만, 마음씨가 곱고 배려심 깊은 사서 베라의 모습도 없다. 


 유피는 나무 의자의 부러진 다리를 지팡이 삼아 짚어 겨우 일어섰다. 그렇게의자 다리를 벽에 세워두고 유피는 걸었다. 학교 부설 예배당에도 주교 루아의 모습은커녕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궁금증과 함께 따르는 두려움에 시달린 유피의 호흡은 더욱 거칠게 바뀐다.


 후우.


 하아.


 아.


 숨쉬기가 힘들 만큼의 긴장이 한 차례 지나가고, 텅 빈 마법 학교의 입구에 서서 유피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또 내쉰다. 


 "우…응? 언니, 언니 목소리 들린 거 같아……." 


 마법 학교 입구 부근까지 걸었다 멈추곤 호흡을 가다듬던 유피는, 곧 뭔가에 홀린 듯 걸음을 재촉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침착하게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그 걸음에는 확신 비슷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유피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유피가 걷는 길은 자신의 언니 "아리엘 에리" 가 자취를 감췄던 그 비밀의 화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깊은 숲을 헤매듯 들어가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숨겨진 오솔길을 걷는 그 걸음은, 농밀한 꿀의 향기를 풍기는 거대하고도 은밀한 함정으로 향하는 걸음이었다.


 하지만, 아리엘 유피가 그 사실을 알아봤자 의미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귀에는 그립고 그리운,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언니의 목소리가 확실히 들려오고 있으니까. 


 해가 뜨기 전, 달이 지고 가장 어두울 그 시간에 유피는 언니가 있었던 약초와 풀꽃으로 수놓인 화원에 도착했다. 걸음과 걸음 사이 촉촉한 이슬이 소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간지럽히고 또 차갑게 어루만졌다. 지칠 줄 모르고 걷던 유피는 어스름하게 반짝이는 저 너머를 바라보고, 노란 눈동자 가득 빛을 품는다. 


 언니, 그렇게 보고 싶던 언니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 


 "언니! 언니이! 나, 나…!" 


 유피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뛰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그렇게 부드럽고 그리운 실루엣으로 달렸다.


 어둠 속의 빛처럼 떠오른 그 그림자, 아리엘 에리가 틀림없다.


 뛰어가고, 그렇게 온몸을 던지듯 날려 작은 소녀는 언니의 품에 안겼다.


 거짓말도 아니었고 이상한 꿈도 아니었다. 유피는 언니의 냄새와 언니의 온기,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상냥한 손길을 그대로 느끼고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그 품에서 울어버렸다. 언니가 이렇게 무사하니까, 루체 언니나 메리, 엘리제 모두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유피는 자기 위로를 한다. 


 "보고 싶었어…정말, 많이, 아주 많이! 하늘만큼 땅만큼…하늘에 뜬 별 숫자만큼, 엄청!" 


 "우후후…미안해요 유피. 제가 멋대로 자리를 비워서 마음 고생…심했죠? 이제 걱정 말아요, 에리는 이제 유피를 두고 어디로 사라지지 않아요. 제 품에서 마음껏 울어요. 안심해요, 이제 모든 일이 옳은 방향으로…일어날 테니까." 


 별도 달도 모두 사라진 때가 빠르게 지나가고, 자매의 온기가 서로를 따스하게 보듬은 때도 금세 지나가고 해가 떠올랐다. 동쪽 산맥에 빛이 고개를 내밀고, 서서히 대지를 밝히고 하늘을 밝히던 그 때, 언니의 품에서 벗어나 고개를 든 아리엘 유피는……숨이 멎을 정도로 당황한다. 


 자신의 눈앞에 비친, 이제 막 따사로운 볕을 받은 언니는, 유피의 언니가 맞는데 유피의 언니가 아니었다. 


 "아아…에리를 거둬주고 따뜻하게 안아주신 '주인님' 덕에…저는 너무나 행복…해요." 


 사람의 마음에 허점이 생기면 그 틈을 파고들어 사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는 악마, 그런 것들에게 달린 날개와 무척이나 닮은, 깃털 하나 없는 악몽 속 까만 날개가 아리엘 에리의 등 뒤에서 활짝 펼쳐졌다. 그 두 날개는 유피에게 커다랗고 음흉한 그늘을 드리웠다. 유피의 기억보다 훨씬 더 다리가 길어진 에리, 그 덕에 더 높아진 배꼽의 위치…그 뒤, 부드럽게 부푼 엉덩이와 매끈하게 들어간 허리 근처에 자그마한 한 쌍의 날개가 또 돋아있다.


 그리고 그 밑, 끄트머리가 뾰족하며 까맣고 광택 그득한 꼬리가 살랑이고 있다. 친근함을 표시하듯, 하지만 그 속에 간사함을 품은 듯한 움직임에 유피는 숨을 삼키고 만다. 문란하게, 음탕하게 올라간 입가 사이로 드러나는 송곳니. 축 처져 유순한 눈꼬리와 대조적으로 타오르듯 붉은 광채를 세로로 품은 눈동자, 끄트머리가 뾰족하게 솟은 두 귀.


 아랫배에 새겨진 이름 모를, 하지만 지극히 신성모독적인 문양…그 위로, "아리엘 유피의 기억보다 더 커져버린" 가슴을 출렁이는 아름답고 요사스러운 악마, 그리고 유피의 언니…아리엘 에리. 유피는 그 모습을 마주하고, 뒷걸음질을 친다. 분명히 현실인데,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몽롱한 감각을 느끼며 말이다.


 "어, 언니…맞, 아?" 


 찰나. 


 아주 짧은 그 순간, 유피의 등허리와 머리를 이어주는 그 목덜미에 촉수가 날아들었다. 부드럽게 요동치던 그 촉수는, 끄트머리에 날카롭고도 뾰족한 바늘을 세우고 푸욱 찔러들어갔다. 따끔한 감촉은 잠시였고, 곧 한기와 동시에 열기 비슷한 몽롱한 감각이 유피의 전신으로 퍼졌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두 다리가 금방이라도 풀릴 것 같은 그 아찔한 감각에 유피는 안간힘을 쓰고 버텨보지만, 결국 허사다. 


 "아, 아응!…흑, 햐앙…아아……." 


 사락, 척.


 쿠욱. 


 꾹.


 또 다른 촉수 둘이 유피의 두 뺨을 꼭 붙들고, 그 끄트머리에 가느다란 실처럼 다닥다닥 돋아난 가늘고도 섬세한 섬유 다발이 유피의 귀에 침범하기 시작했다. 가려우면서도 간지럽고, 찌릿하면서도 어지럽고, 그렇게 여러 이상하고도 다채로운 감각에 "유린" 당하던 유피는 곧 빨갛게 달아오른 혀를 밖으로 내고, 살살 풀리는 동공을 걷잡지 못하게 되었다. 유피는 지금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는 의문을 품기는커녕,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한다. 


 촉수 마물의 세뇌, 그것은 여자아이의 마음을 아주 조금만 바꿔버린다. 하지만 그 조금이, 여자아이의 방향성을…크게 바꾼다. 


 "어흐, 읏…아읏, 아학…하으, 으응…. 꺄흥!" 


 "자아 유피…에리와 함께, 촉수님과 함께…영 · 원 · 히 행복하게 보내요. 우후훗…. 하앙." 


 에리는 유피를 부드럽게 안아주며, 뜨겁게 달아오른 그 입술에 자신의 부드러운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달콤한 향기 넘치는 에리의 혀가 유피의 입속을 차지했다. 언니이자 언니가 아닌 에리에게 안겨, 온몸 가득 퍼지는 촉수 마물의 독액과 흘러넘치는 마력에 온몸을 허용해버린 유피는, 땅에 발을 댄 것인지 하늘에 둥둥 뜬 것인지 모를 그 감각 속에서 키스에 응한다.


 쭈읍, 주륵, 찌걱…자매의 혀가 부드럽게 얽히고설켜 파멸적인 쾌락의 하모니를 연주한다.


 후들후들 떨리는 두 다리를 간신히 좁히고, 두 발을 겨우 땅에 붙이며 버티는 유피였지만, 점점 더 차가운 불꽃같은, 간지러운 통증 같은 애무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바라던 언니가 자신을 이렇게 사랑하고 위하고 있다, 이걸로…된 것 아닐까? 이윽고 유피는 약간의 행복을 느낀다. 


 "추릅, 쯥, 하앙…. 하아…아아, 유피, 유피…제 마력을…받아주세요." 


 해가 산맥 끄트머리를 벗어나 하늘로 오르도록, 키스는 계속되었다. 풀린 눈으로, 멍하니 에리에게 안긴 유피는 음탕하게 질척이는 소리를 들으며 감기에 든 것처럼 달아오르고 또 멍멍해지는 몸을 느꼈다. 그저 이렇게 둘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 말고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조차도 점점 더 생각할 수 없다. 


 아프지 않아, 슬프지 않아, 언니가 있어. 언니도 나를 사랑해…하지만, 촉수…님?, 그렇게 에리의 알 수 없는 단어 선정에서 유피는 마음이 흔들렸다. 주륵, 눈물이 솟지만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게 무슨 감각일까, 유피 자신도 모른다.  


 두근, 두근. 고동 울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랗고 매끈한 분홍빛 촉수는,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자매를 부드럽게 품어 은밀한 동굴로 스르르 기기 시작했다. 에리의 날개가 유피의 몸을 폭 감싸고, 에리의 두 손은 유피의 뺨을 보드랍게 감싸고, 에리의 혀는 유피의 입속을 촉촉하게 적신다. 쾌락 속의 쾌락, 바닥 아래 바닥, 그렇게 유피는 에리의 품에 안겨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 동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유피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렇게 보고 싶었던 언니와 만난 것 하나는 확실히 안다.


<프롤로그 끝, 본편으로 계속>



  

 <1일>



 축.


 추죽.


 뚝, 뚝. 


 똑.


 또독.


 물 떨어지는 소리였을까? 아니면 또 바깥에서 쿵쿵 쾅쾅 울리는 굉음과 꺄아아 퍼지는 비명이었을까? 헝클어진 분홍빛 긴 머리칼의 소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녀, 아리엘 유피가 위치한 곳은 소란은커녕 침묵이 감돌고, 촉촉하면서도 미지근한 바람이 가볍게 불었다. 거기서 똑, 유피의 뺨에 따뜻하고 끈적이는 물이 떨어진다. 


 이번엔 물 떨어지는 소리가 맞았다.


 손등으로 그것을 훔친 유피는 코끝을 스치는 그 냄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처음 맡아보는 냄새인데, 미끈하면서도 고소한 것 같기도 하고 유피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게 만드는 냄새였다. 하지만 유피가 냄새에 집중한 것도 아주 잠시뿐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이곳을 눈에 넣은 순간, 유피는 숨을 삼키고 말았다. 


 좁고 어두운 동굴 같은데, 벽이 살아있다. 숨을 쉬고 있다. 촉촉하게 젖었다. 그리고, 좋은 냄새가 난다. 그 냄새와 함께, 이곳 또한 전혀 처음 보는 풍경인데…왠지 징그럽거나 생소해야 할 그 모습이 유피에겐 그저 신기하고, 재밌어 보인다. 이윽고, 유피는 숨을 가볍게 내쉬며 안심한다. 


 "여기…어딜까?""


 혼잣말을 하며 유피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는 파자마를 더듬었다. 찢어지거나 헤진 곳 없이 말짱했다. 하나, 자신의 옷가지를 살피는 스스로의 눈은 이전과 많이 달랐다. 황동빛 광채를 품은 화사한 노란색 눈동자는 온데간데없고, 세로로 길게 열린 동공이 붉고 매끄러운 보석처럼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또 요사스러운 그 빛깔은, 유피의 언니 아리엘 에리의 눈동자와 정말 많이 닮았다. 


 "맞다. 언니…나 언니 만났었는데, 지금 언니는 어디 있을까? 언니 보고 싶어…."


 유피는 맨발로 보드라운 바닥을 밟고, 손으로 보드라운 벽을 짚으며 천천히 걸었다. 따뜻하고 좋은 감촉, 마치 루체 언니의 품처럼 아니 그보다 더 아늑하고 편안한 에리 언니의 품처럼 포근한 감촉에, 유피는 점점 더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점점 더 걸으면서 발에 체중을 좀 더 실어 보고, 짚는 손끝에 힘을 더 넣어본다. 그럴 때마다 분홍빛 벽은 탱탱한 탄력으로 유피의 발길과 손길을 품어준다. 


 "이, 이게 뭐지…?"


 유피가 넓게 트인 공간으로 나온 그 순간, 벽과 바닥에서 자그마한 돌기가 돋기 시작하더니 곧 그 첨단이 부풀어 톡 튀어나왔다. 호기심이 생긴 유피는 쪼그려앉아 두 손으로 그 첨단을 어루만졌다. 보드랍고도 따스한 그 덩어리가 유피의 손 안에서 바르르 떨렸다. 마치 작은 동물이 자신의 손 안에서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아 흐뭇해진 유피는, 곧 미소를 지으며 손을 가볍게 치운다. 


 그러자, 그 돌기들은 빼꼼 고개를 내밀듯 쭈욱 늘어나 기다랗고 통통한 촉수가 되었다. 유피에겐 그것들이 자그마한 강아지가 주인을 반길 때 치는 꼬리처럼 보였을까, 유연하게 흩날리는 그 촉수들을 보고도 유피는 별다른 경계심을 느끼지 않았다. 도리어 유피는 나풀나풀 움직이는 그 촉수들 사이를 차박차박 가볍게 걸었다. 


 유피의 걸음에 호응하듯 바닥에서도 벽에서도 촉수들이 솟아, 마치 친구에게 손 흔들듯 꿈틀거렸다. 


 "너…나 좋아하는구나?"


 언니 생각도 잠시 잊고, 파자마 상의 앞섶으로 스멀스멀 기어드는 촉수를 내려다보며, 유피는 해맑게 웃었다. 간질간질 아랫배를 보드랍게 문지르고, 배꼽에 끄트머리를 막 들이미는 그 움직임이 유피에게는 썩 재밌고, 귀여웠다. 이윽고…여러 가닥으로 솟은 촉수들은 곧 유피의 손목과 발목을 가볍게 휘감았다. 촉수들의 첨단은 자각자각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거기서 혀 비슷한 기관이 쏙 나와 유피의 살결을 핥는다. 보송보송하고 탄력 있는 여자아이의 속살은 곧 끈적하고 부드럽게 젖어간다.


 "아, 아아…알았다! 나…언니가 한 말 이제 알아. 너…초, 촉수…님, 맞지? 언니 안아준 게 촉수님이지? 그리구…지금 날 안아주려고 하는 거야. 내 말 맞지? 응? 촉수…님? 촉수님이 이제 내 주인님이야, 그렇지? 어, 우으……그런데 나, 어떻게 할지, 잘…모르는데, 에헷."


 가볍게 좁히는 허벅지와 허벅지 사이로 촉수가 미끄러졌다. 간지럽고도 따뜻한 그 느낌, 매끄럽고도 끈적한 그 느낌에 유피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입 밖으로 반쯤 내밀었다. 거기서, 작지만 모양 잘 잡히고 탄력 있는 유피의 가슴과 가슴 사이로 촉수가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그 뭉툭하게 부푼 첨단이 사람의 손가락처럼 제법 길게 뻗어, 톡톡 유피의 입술을 두드린다. 


 "아하하…가, 간지러워…촉수님 정말 장난꾸러기야……. 자꾸 간지럽히면 나…끄응."


 유피 자신이 촉수 마물의 못자리가 된다는 것, 쾌락의 늪에 빠진다는 것, 그 모든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유피 스스로가 지금 이 순간 깨닫는다 해도, 유피는 촉수의 접촉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었다. 어스름 걷힌 아침 녘, 해 뜨는 그 시간 에리와 재회한 유피는 거기서 촉수 마물에게 세뇌 당했다. 세뇌는 아주 은밀하고도 교묘하게 이뤄졌다. 촉수는 유피의 성격이나 인간성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벼운 기호와 방향성을 주입한 것이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 같은 그 세뇌는, 곧 커다란 파도를 일으켰다. 촉수에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촉수와의 관계에 순응적이게 되고, 그러한 행위 전체가 아주 당연하면서도 즐거운 것이라고 유피는 느끼는 것이다. 파도가 덮친 해변이 촉촉하게 젖듯, 유피의 마음이 촉수에게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유피는 그 순종에서 행복을 느끼게 된다.


 "나…촉수님의 아기를…가질 수 있어? 그렇게 될 수 있어…?"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일까, 아니면 더 힘이 들어가는 것일까. 유피는 부쩍 달아오르는 몸과, 아스라히 멀어지는 의식을 꼭 붙들었다. 유피의 눈에서 붉은 확신이 서렸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자그마한 여자아이인 유피는 잘 모르지만, 자신의 몸을 휘감은 이 촉수가 자신의 주인님이라는 것과 자신은 주인님을 위해…그리고 스스로를 위해 몸을 맡겨야 한다고 깨닫는다. 


 톡, 톡.


 하아, 하아…점점 가빠지는 유피의 호흡에도 아랑곳 않고, 촉수는 또 유피의 입술을 두드렸다. 


 "아…촉수님도, 하, 핥아주면 좋아? 그, 그럼…아앙, 추릅."


 유피는 파르르 떨리는 혀를 살짝 뻗어, 가슴 사이에 자리 잡은 그 촉수의 뭉툭한 첨단을 아래에서 위로 핥아올렸다. 움찔, 그렇게 뭉툭한 돌출부는 유피의 혀가 닿자 아주 잠깐 단단하게 자신을 굳혔지만, 얼마 안가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유피의 몸을 휘감은 촉수들의 첨단에서 혀와 비슷한 부속지가 튀어나와 살금살금…유피의 살결을 핥아준다. 


 매끈한 겨드랑이, 젖살이 덜 빠져 통통하고 귀엽게 살이 오른 허벅지, 잘록하게 빠진 허리, 촉촉하게 젖은 속옷 아래의 어딘가, 그리고 채 여물지 못한 연분홍빛 유두까지, 그 모든 부위가 촉수의 혀가 닿았다. 유피는 그 간지럽고도 따스한 터치에 몸을 부르르 떤다.


 "꺄하하! 나, 나나 간지러워…어라라? 촉수님 우는 거야?"


 아몬드처럼 고소하고, 또 코코아처럼 달콤한 향기가 유피의 코를 스쳤다. 혀처럼 뻗어 날름거리는 부속지에서는, 유피 기준으로 "기분 좋은 향기" 를 잔뜩 품은 점액이 계속해서 뿜어나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깊고 그윽한 향기는, 유피의 혀끝에서 바들바들 떠는 그 촉수에게서 풍겼다. 마치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 같이, 희고도 점성 낮은 그 액체는 왠지 모르게 유피의 마음을 흔든다. 


 하나, 그 흔들리는 마음도 곧 갈피를 잡았다. 촉수가 움직이고, 유피도 혀를 멈춘다.


 뭔가가 온다. 유피는 본능적으로 안다.


 "아읍…응, 흐…읍."


 유피의 혀를 느끼던 그 촉수는, 뭉툭한 대가리를 우악스럽게 들이밀어 유피의 입안을 차지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유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입을 느슨하게 풀어 촉수를 사알짝 물었다. 그렇게 유피의 희고 보드라운 볼이 귀엽게 부풀고, 따스하고 포근한 유피의 입안은 촉수를 가볍게 품었다. 주릅, 추읍, 그렇게 체액과 점액이 뒤섞이는 소리가 고요를 깨고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추르릅…하, 하우으…햐아, 하앙…꾸륵. 끄하! 촉수님 눈물은…정말 달콤해, 나…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우응…추릅, 쭙."


 살갗에 닿아도 몸을 태우기는커녕, 부드럽게 살결을 어루만지며 덥히는 불꽃이 있고 그 불꽃을 자신의 입으로 품는 일이 일어난다는 걸 유피는 믿을 수 있었을까, 그런 믿을 수 없는 일이 유피에게 일어났다. 촉수 마물의 첨단에서 뿜어, 유피의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하고도 그윽한 그 체액이야말로 부드러운 불꽃이었다. 그렇게 유피에게 가슴 뭉클한 감격이 지나가자, 잊고 있었던 허기가 되살아난다.


 유피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촉수를 입안에 품었다. 혀로 밑둥을 받치고, 고개를 조금씩 흔들며 촉수의 체액을 삼켰다. 유피같이 어린 여자아이가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아니 체험해서는 안 될 "유사 성행위" 가 그렇게 시작됐다. 유피에게는 그러한 지식이 없었다, 유피는 그저 자신의 주인님인 "촉수님" 이, 허기가 진 자신을 위해 달콤한 간식을 주는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거기다 유피는 그 간식을 받는 행위들이, 모두가 재밌는 놀이처럼 느낄 뿐이다. 


 재밌는, 놀이.


 그리고 달콤한 간식.


 뷰룩, 주루루, 추르륵.


 유피의 입속에서 촉수의 첨단은, 갈라진 좁은 틈으로 흰 체액을 쭉쭉 뿜어냈다. 잘 저어 풍성하게 부푼 크림처럼, 보드라운 양감과 질감을 가진 그 체액들은 유피의 입안 가득 풍요로운 감각을 전달했다. 맛은 아까의 그 묽은 체액보다는 달콤하지 않았지만, 입에 머금었다가 꼴깍 한 번 삼키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따스하고 행복한 맛" 맛이라고 유피는 생각했다. 아직 배가 고프지만, 왠지 모르게 기운이 더 나고…몸은 더 뜨거워진다. 


 "아, 아우읏…햐앙…하아…."


 유피의 입에서 벗어난 그 촉수는, 원래 위치였던 유피의 가슴 사이로 스르르 기어 내려갔다. 거품 이는 희고 덩어리진 그 체액은 유피의 가슴팍에도 묻고, 유피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쾌감에 헤 벌어진 입가에서도 흘러 잘 구운 도자기처럼 매끄럽게 모양이 잡힌 빗장뼈에 사르르 자리를 잡는다. 가쁜 숨결이 촉수들을 달아오르게 한 것일까, 유피의 사지를 휘감은 촉수들도 점점 더 혀를 바삐 놀린다.


 핥고, 또 핥고.


 탐하고.


 유피는 그렇게 부끄러운 곳을 스스로 적시고 있는 걸 깨닫지도 못하고, 헤 벌어진 입으로 해맑게 웃는다.


. -

- .


 "하…우흐후, 하앙, 하웃……햐앙. 흐읍."


 촉수의 첫 번째 "사정" 이 끝나고, 두 번째가 되어 유피는 더욱 능숙하게 그 도톰한 촉수 끄트머리를 받아들였다. 아직 배고파, 그리고 촉수님이 흘리는 눈물은 점점 더 달콤해져, 몸이 따뜻해져서 막 젖었는데 춥지도 않아, 그렇게 유피는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입으로는 촉수를 앙 물었다. 시간의 흐름이 점점 더 흐릿하게 부욱 퍼진다. 몇 번의 스트로크 끝에 두 번째 촉수는 그 누구도 범하지 못한, 유피의 조붓한 목구멍까지 대가리를 들이밀고 꿀럭, 꾸물럭, 쭈욱, 그렇게 "사정" 한다. 


 "아하흐읏, 까흣…하악, 하…학, 하, 하아, 하……."


 두 번째 촉수가 난폭하게 뽑혔고, 유피는 순식간에 자신의 뱃속 가득히 체액을 뿜어낸 그 촉수를 바라보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약간 기침이 날 것 같고, 목이 간질간질한 그때 유피의 입에 또 다른 촉수가 들어섰다. 이번엔 더 굵고, 큼지막하고 단단했다. 마치 또래 아이의 주먹이 들어오는 것 같은 그 느낌에 유피는 숨이 가빠지고,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하지만, 유피는 아프거나 슬프지 않다. 도리어 기분이 좋다.


 촉수님이 이렇게나 자신을 귀여워하고 있다,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흑, 헤…흑, 하욱, 헤, 헤에…하앙……!"


 입안에서 요동치는 그것을 더 이상 물고 있을 힘이 유피에게는 없었다. 다리가 풀려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파자마 상의는 왼쪽이 축 내려갔다. 장밋빛으로 상기되고 동그랗게 예쁜 유피의 어깨를 훤히 드러냈다.  뿌르륵, 이번엔 촉수가 유피의 입안에서 빠져나오던 도중 "사정" 이 시작되어 사방으로 체액이 날아들었다. 유피의 발갛게 상기된 뺨, 유피의 분홍빛 머리카락, 유피의 잔뜩 젖은 허벅지, 유피의 희고 예쁜 손가락, 그 모든 곳에 쏟아진다. 


 촉수가 유피의 뺨을 스르륵 미끄러져 지나치고, 유피는 고개를 뒤로 살짝 젖히고 천장을 보았다. 아니, 천장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지친 얼굴로, 혀를 빼고, 그렇게 여운을 느끼고 있다. 촉수가 유피에게 "먹인 체액" 은 물론, 유피의 몸에 혀가 핥듯이 고르게 "바른 체액" 은 세뇌가 끝난 유피의 몸을 더욱 자신에게 걸맞게 "변화시키는 액체" 였던 것이다. 입으로 삼키고, 살결로 흡수한 그 액체는 유피를 점점 더 문란하고 음탕하게 만든다.


 "아하, 하하…촉수님, 정말 좋아……좀, 더어…우흐응…."


 촉수 마물이 자신의 체액으로 여자아이를 길들인 까닭……대상이 된 여자아이가 오직 자신을 원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여자아이를 자신의 "못자리" 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촉수 마물의 생식 행위를 버티기 위해선 정신만이 아니라 육체의 준비도 필요하다. 그 준비의 일환인 "먹이 주기" 는 상당히 공이 들어가고, 시간 또한 걸린다. 불행일까 다행일까, 유피는 그 과정을 즐거이 받아들일 마음이다.


 푸-욱, 주룩.


 주르륵.


 푹. 스륵.


 유피의 가녀린 몸이 파르르 떨렸다. 사방에서 죄어오는 촉수의 힘이 더욱 거세게 변했다. 게다가 몸의 긴장이 풀려 제대로 된 반응을 할 수 없는 유피에게 하나나 둘이 아니라 셋 정도의 촉수가 한 번에 들어섰다. 들이밀고, 헤집고, 싸고, 그런 과정이 점차 빠르고 격렬하게 일어났다. 발그레한 볼을 귀엽게 부풀리며 유피의 입은 더욱 적극적으로 촉수를 핥고 빨아버린다. 


 "쭙, 쭈루루릅…후우, 후으, 츄, 읍…우흥…아앙."


 하나가 안에서 쌌고, 나머지 둘은 유피의 뺨을 노려서 한 쪽씩 싸버렸다. 뜨겁게 이는 거품에 유피는 해맑게 웃었다. 점점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몸을 살살 비틀고, 달아오르고 흠뻑 젖은 가랑이를 스스로 매만지듯 허벅지와 허벅지를 비벼대고, 입은 다소곳하게 벌려 혀를 쭉 내미는 그 모습은, 이전의 유피 모습이 아니었다. 순진하고, 언니를 잘 따르던 여자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모습은…"촉수 마물의 총애를 받는 여자아이" 일 뿐이다.


 "아앙…배, 불러…그, 그치마안…촉수님은 유피를 좋아하니까…계속, 재밌는 놀이, 할…거지? 유피도 좋아…우응, 아앙."


 언제부터 낮이고 언제부터 낮이었을까?


 유피는 그런 것을 잊은 지 오래였다.


 자신의 "촉수님" 과 함께, 흠뻑 젖고 따스한 쾌락 속에서 그렇게 쭉 지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으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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