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리뷰

kohss87
- 작성일
- 2012.3.22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
- 글쓴이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저
열린책들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대작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고 꼭 한번쯤은 읽어봐야 된다는 소리도 종종 듣곤 했다. 하지만 분량 때문인지 손이 잘 안 갔고 지금까지 미루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이 책을 다시 접하고 고생 끝에 다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란 작가에 대해 다시 한번 감탄을 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이라서 지루할 줄 알았는데 읽는 내내 흥미를 잃을 수 없었다. 비록 너무나 긴 분량으로 진이 빠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그가 죽기 3개월 전에 완성을 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 활동의 정점인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껏 이런 장편인 소설을 읽은 적도 없었고 이렇게 깊이 있는 소설도 처음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여러 생각들과 가치들이 제시되는데, 그 하나하나가 깊게 생각해 볼 주제들이었고 작가는 이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의 중심 모티브는 ‘친부살해’이다. 현대에 와서도 다루기 쉽지 않은 주제를 19세기 도스토예프스키는 중심 소재로 사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 ‘친부살인’이 계획적이고 의도적이라는 점은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4명의 형제들은 각각의 인물을 형성하고 있다. 드미뜨리는 가장 러시아적인 남성상으로 가지고 있으며 불안정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고상하고 젠틀한 것 같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의 추악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 또한 이를 감추거나 부인하려 하지 않았다. 둘째, 이반은 이성적인 인물상으로 모든 일에 합리적인 생각을 우선으로 한다. 그는 신앙을 거부하고 무신론의 입장에 서 있다. 신의 존재에 관한 그의 생각이 담겨진 ‘대심문관’이야기는 그의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불합리하고 고통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신앙은 의미 없다고 말한다. 불합리에 대한 그의 답은 인간의 욕구를 현실적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그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만 분명 교활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작가의 주인공인 셋째, 알료샤가 있다. 그는 신앙적 인물이다. 모든 생각의 뿌리는 신앙으로부터 시작되며 신앙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중재자 역할을 하기 원하고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원하지만 그가 생각한 만큼 잘 실현되지는 않는다. 형제 중 가장 이상적인 인물상이지만 그도 역시 한계를 가진다. 마지막 사생아인 스메르짜꼬프가 있다. 그는 친부살인의 범인으로 이반의 영향을 받는다. 독특한 인물이었고 약간 현실적 느낌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특히 종교적인 인물과 질문들에 관심이 갔다. 소설 중반에 죽게 되지만 이 소설에서 유일한 긍정적 인물인 조시마 장로가 있다. 형식과 외식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을 중요시 여기는 그의 태도는 많은 감명을 주었다. 특히 수도원 암자에서 형제들과 대화를 나누기 전 사람들을 축복하는 장면에서 그의 이야기는 작가가 근본적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이념과 사상은 매우 균형잡혀 있고 또한 매우 신앙적이다. 현대의 크리스천인 나에게도 그의 말은 영향력이 있었고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 시대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지금 교회에서도 조시마 장로의 생각과 행동들은 페라뽄뜨 신부가 그러듯 배척받을 지도 모른다. 보수적인 어르신들에게 말이다. 하지만 순수한 신앙과 양심을 가진 조시마 장로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다. 지금 시대에도 말이다.
그리고 대심문관 이야기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문제에 관해 이렇게 깊게 통찰한 작가는 처음 보았다. 충격적일 정도로 작가는 그 시대의 종교 지배자들을 색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9세기 사람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발상 자체가 매우 흥미롭고 재밌기까지 했다. 그 서사시는 인류의 행복은 무엇을 기본으로 하는가? 에 관한 것 같다. 표면적으로 자유냐? 빵이냐? 라는 이원적인 주제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류의 행복은 양심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고 그 것을 위한 두 가지 방법의 대립인 것 같았다. 대심문관의 생각은 빵, 즉 물질로서의 지배와 권력을 통한 지배가 사람의 양심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질문,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을 망각하게 만들 뿐이다. 물질에 휘둘려서 살고 권력자들의 지배 속에서 아무런 선택과 결정없이 통제된 삶이 과연 가치가 있을까? 작가도 서사시 내에서 양심을 편안하게 하는 일과 빵을 선택할 일이 있다면 사람들은 양심을 편안하게 하는 일을 따라갈 것이라고 말한다. 가치가 없는 삶은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양심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은 양심의 뜻에 따른다는 말이다. 이는 자유의지를 통해 선택과 책임을 짊으로써 가능하다. 옳은 결정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진다는 것은 분명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자유의지가 아닌 타성에 의한 사람은 그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는 일일 뿐이다. 그 사람은 과연 자신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대심문관은 다수의 약자와 소수의 강자에 대해서 말했다. 하지만 이 논리는 너무 결과만 놓고 따진 것 같다. 과연 하늘의 빵을 택한 자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그랬을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항상 옳은 결정을 할 수 없으며 물질의 유혹에 항상 의연할 수는 없다. 가끔 천사의 빵을 먹기도 하지만 지상의 빵을 먹을 때도 있다. 그럴 때 인간은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하지만 실패로 인한 양심의 가책을 피하기 위해서 이를 결정하는 권리, 자유의지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배를 통해 양심을 피하는 것은 편안해 지는 것이 아니다. 잠시 망각할 뿐이다. 그리고 결국에 반드시 그 양심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의 상황적 배경을 살펴보면 그 전날, 백여명의 이단자들을 화형시켰다. 다수의 만족을 위해서, 그리고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아니, 이는 강요가 아닌 희생의 집행이다. 대심문관은 성경적 교리로서 사람들을 다스리고 가르치며 이를 통해 존경을 받고 있다. 예수가 필요치 않을지는 몰라도 예수가 말한 사상은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심문관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지배 사상조차 부정하는 일인 것이다. 사랑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최고 우두머리가 이단을 명분 삼아서 살인을 하는 것이다. 이를 떠나서 생각하더라도 다수의 만족을 위해 소수를 억압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는 결국 곪아 터지게 되는 원인이 될 것이다. 대심문관은 변화가 가져다 주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썩어가는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각각의 이야기와 대화들은 가볍지 않았다.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 보아도 충분한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드미뜨리가 왜 억울함을 뒤로 하고 모든 걸 짊어지고 유배를 떠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형제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수만 가지가 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는 다른 어느 작가보다도 깊이 인간 영혼의 신비를 파고들어간 작가라고도 말한다. 분명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것을 느꼈다. 소설이란 장르가 단순히 흥미와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닌 근본적 질문에 관해 거부감 없이 스스로 질문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도구라는 생각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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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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