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리뷰

indiaman
- 작성일
- 2012.7.7
소립자
- 글쓴이
- 미셸 우엘벡 저
열린책들
이 소설, 소립자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저자와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대담집 “공공의 적들”을 보고 저자에게 관심이 갔다. 어떤 작품이 있을까? 그래서 첫 번째로 고른 작품이 소립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머지 작품을 다 살 것인가를 결정하기로 했다. 대담집에서 레비와 그는 대중에게 위고처럼 사랑을 받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위고처럼 사랑 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 너무 개성이 강한 이 두 사람이 생산하는 글과 생각들은 대중들 논란과 찬, 반으로 나누어 버리기에. 특히 저자의 글은 항상 논란을 몰고 다닌다.
형이상학적 돌여변이로 생물학자 미셸(제르진스키)와 이복 형 브루노의 일대기라고 해야 하나. 이 형제들의 삶, 다른 성격들 양극단에서 존재하는 것 같은 이들. 왜 이들은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환경의 문제이며 유전적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그들의 공통적인 엄마는 시대에 앞서가는 사람이었기에 모든 것에 도전한다. 특히 성적인 부분에서. 그렇다고 이 책을 성이야기로 도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현대과학과 지나친 성에 대한 경고를 던진다. “사심 없는 연구활동 기간 중에 획득한 지식을 비열한 방식으로 영리화함으로써 단기간에 상당한 재산을 모은 자” 이들은 현 사회에서 영웅으로 우뚝 솟고 있다. 그리고 매체는 성공이란 신화와 그에 취해 자신도 누릴 영광을 위해 추종하는 이들이 존경이란 섬김으로 이들을 더 높인다. 성의 환상 속에서 방황하던 브루노는 마침내 성의 기쁨에 눈을 뜨지만, 이 기쁨은 잠시 사랑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브뤼노의 탄생과 엄마와 함께 한 짧은 시간의 그의 성장이 일생을 지배한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가는 엄마는 그에게 성적 욕구에 대한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과 자신에 대한 자신의 부족이 만든 지속적인 성의 추구와 집착을 남겨주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미셸에게는 할머니가 있다.
평생토록 오로지 헌신과 사랑으로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 자기들의 삶을 말 그대로 남에게 바친 사람들, 그러면서도 전혀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 헌신과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들의 삶을 남에게 바치는 것 말고는 삶의 다른 방식을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여성이었다.
같은 여인이었지만, 너무나 다른 삶을 산 엄마와 할머니, 그들에 때문인지 너무 다른 이복형제가 된다.
개인의 통상적인 행동과 자유 의지에 따른 일탈행위 흔히 사랑과 성의 집착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을 잊으려는 것은 아닌가? 삶은 하루하루 죽음으로 맹렬히 돌진해 나가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기에 죽음에 대한 이미지 만들기와 죽음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불안한 징후다. 우리를 끝없이 괴롭히는 자아, 자아란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신경증바다 그 속에서 어떤 의미를 건질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삶은 그렇게 달랐다. 하지만 그 차이가 그들 몸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둘 다 똑같이 늙어가고 있었다. 세월 그 자체가 파괴 작업을 벌여 그들의 세포와 세포 소기관이 지닌 복제 능력을 서서히 감퇴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성적인 것들은 사회라는 거대한 욕망의 집합체가 변형시켜서 자연에게서 빼앗아 가버린 지도 모른다. 욕망과 쾌락은 문화적이고 인류학적인 현상이다. 그 사회가 어떠하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성적인 쾌락은 습관의 문제다. 성장할수록 점점 죽음은 가까이 오기에, “나이에 대한 생각이 이토록 집요했던 적은 없다.” 나는 사라질 것이다. “많은 아이들은 어른들이 건설해 놓은 세계를 잘 견뎌냈다.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그 세계에 적응하려고 애쓴다. 훗날 그들은 대개 그 세계를 답습한다.” 그렇게 그들도 비슷해지며,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이기에.
종교는 인류를 완벽한 통일상태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계약과 전례와 규범의 예식에 바탕을 둔 순전히 사회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는 소비문화와 성의 상품화 그리고 순수한 도덕과 야생이 혼재된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접촉의 욕구, 우리가 필요한 것은 다정함이 아닐까? 하지만, 욕망은 성적인 매력에서 무너져 버린다. 그러기에 섹스를 둘러싼 경쟁은 오히려 더욱 뜨거워졌다.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자아가 하나의 환상일 뿐이 아닐까? 기독교적인 인류학과 유물론적 인류학 속의 인간의 존엄성 하지만 인간이 하나의 동물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지각하는 것은 먼저 고통을 통해서다. 겪어야 할 일이라면 그냥 겪으리라는 것 그것이 고통이 되었던, 환희가 되었던. 삶의 체계화, 아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고, 인간을 존엄하게 만드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텔레비전이었다.
소립자, 우리는 소립자, 우리는 고독 속에서 늙어가고 있다. 사회는 점점 원자화 되어간다. 결코 만날 수 없는 떠돎의 존재들로 우리는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인류의 문화는 섹스와 죽음간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토록 오랜 동안 반복으로 쌓아 올린 행위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욕구와 욕구의 종결 그것이 우리의 세상이다. 그리고 내가 익힌 규범은 내 아들에게 유효하지 않은 것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기에 인간의 삶은 모두 개별적인 삶으로 끝나버린다. 제대로 산다는 건 남의 시선이 있을 때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부성애란 허구이고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그것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에만 쓸모가 있다. 변화가 실패로 돌아가면, 남는 것 거짓말에 대한 의식과 씁쓸한 뒷맛뿐이다.
정상의 길. 고백, 나는 내 젊음의 종말을 견딜 수가 없었어. 늙는다는 게 바로 그런걸 거야. 늙는다는 것은 지배와 전능에 대한 환상이야. 그것을 이겨내고 싶다.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늙는다는 게 바로 그런 걸 거야. 감정의 반응은 무뎌지고 원한도 기쁨도 별로 간직하지 않게 돼. 그 대신 몸 여기저기에 이상은 없는지, 기관들의 균형이 무너져 있지는 않는지에 주로 관심을 갖게 되지.
“성적쾌락과 잔혹행위는 힘에 대한 야만적인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의 쾌락을 얻기 위한 다양한 전략들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인생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브루노는 성적인 사회민주주의를 꿈꾼다. “그곳은 아무에게도 정신적 고통을 주지 않고 각자의 쾌락을 최대화하자는 휴머니즘적 제안에 딱 들어맞는 장소이다. 이제부터 그 점을 입정해 보이고자 한다.” 그 속의 규율과 계약존중 하지만 죽음과 육체의 젊음 속에서 방황하고, 일관성 없고 경박하고 우스꽝스러운 존재 그게 바로 인간이다.
감정의 무한. 성이란 위험하고 퇴행적인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돌연변이 발생을 결정하는 조건을 풀면, 성에서 독립하는 더 인간적이고 더 완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리란 희망과 지식욕 그리고 합리적 확실성은 새로운 진보를 꿈꾼다. 분명 현상은 존재하고 법칙에 따라 서로 연결되어있다. 분명 해결할 수 있으리라. 그가 꿈꾸는 완벽은 어떤 세상일까? 세계란 우리가 그것에 관해서 갖고 있는 지식의 총합에 지나지 않고, 인생은 고약한 장난, 용서할 수 없는 농담이다. 자유는 결코 진보의 토대가 될 수 없다.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완전히 황폐해진 상태, 인류진화의 통제의 통한 새로운 성적 쾌감과 성차의 소멸만이 우리를 좀 더 완전하게 할 것이다. 이제 인류는 스스로를 소멸시키고 다른 종으로 거듭 태어나는 최초의 동물의 종이 될 것이다.
종말. 브뤼노(이복형)는 정신병원으로, 미셜(동생)은 연구를 완성한 논문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들이 걸어온 길을 보면서 성에 대한 생각, 과연 성이란 것이 인류의 미래에서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진다. 과학의 발달은 점점 우리에게 성의 사라짐과 더불어 육체의 불필요성을 제공해줄지도 모른다는 악몽이 될지도. 인간에게 갈림길은 선택이고, 되돌릴 수가 없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약간은 고정된 한국적 사고방식 때문인지? 뭐 이런 소설이 있냐? 에서 시작하여 책장을 덮는 순간, 글은 이렇게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아주 철학적이고, 어쩌면 아주 저속한 글속에서 통일된 주제로 나아가서 결말을 멋지게 맺는다. 삶의 고뇌를 말하기보다는 이런 삶을 나름의 방법으로 저항해서 끝에 도달한다. 그것이 끝일지는 모르지만. 이 작품은 프랑스 발표 당시부터 찬반의 치열한 대립을 일으켰다고 하더니, 우리나라에서 이런 소설이 쓰여졌다면, 외설로 매장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성이란 것도 인간의 부분이며 그 비중도 상당히 높다. 다른 부분의 성취는 공개적이지만, 유달리 성이란 것은 아직도 어두운 곳에서 속삭여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이기에. 폭탄을 꽝하고 터뜨려 버린다. 우리의 머리 속과 우리의 입은 얼마나 일치하는지. 인간에서 성적인 생각을 제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쉽게 말하고 외치는 사람은 적다. 성을 없애버리면 인간의 동물적인 특징을 제거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인간에게는 성보다 더한 정신적 소외가 더 문제일 것이다.
* 이 책을 다 읽지 않고 초반만 보면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조금은 다른 생각이지만 부디 앞쪽만 보고 책장을 덮지는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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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