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눌프
  1.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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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규칙 안보여! 눈은 장식이야? 네 차례가 아니잖아. 기다려. 순서를 지켜!"
"센스가 없으면 노력이라도 해! 노력! 노력! 내 말 못 알아들어? 너, 바보야?"
"문제는 스토리야! 그런데 스토리가 없잖아. 샤넬 만의 스토리! 그게 필요하다구. 몰라?"
"그것 밖에 안돼? 그렇게 하려면 그만 둬! 네가 다 망치고 있어. 그따위로 하려면 집어쳐!"
"생각 좀 하고 살아! 그건 말도 안되는 헛소리야. 관 둬!"
"단추 하나 실밥 하나 모든 것에 최고가 되어야해! 그게 샤넬 스타일이야."


샤넬의 호통이 이어진다. 장돌뱅이이자 바람둥이였던 아버지에게 버려져 고아원과 수도원, 카바레를 전전했던 이 여자에게 무능력과 나태함은 죄악 그 자체였다. 아서 카펠이 사망한 뒤로는 이 여자의 독설은 더욱 독해졌다. 아니 그전부터 독해져있었다. 어린 날의 낙태로 인해 불임인줄 알았던 샤넬에게 임신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샤넬은 자신의 운명에 또 한 번의 햇살이 비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늘은 깡마른 고아 소녀 가브리엘 샤넬에게 디자이너로서의 성공은 허락했어도 어미로서의 모성(母性)은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는 사산(死産)되었고 그때부터 샤넬의 입에선 악담에 가까운 독설이 쏟아져 나왔다.


애인이자 동업자, 스폰서이자 결혼 상대자였던 아서 카펠 사고로 사망한 후 혼자 남은 샤넬에게 바뀐 것은 없었다. 도도함은 여전했고 독설 역시 여전했다. 그녀를 사랑한 남자치고 명(命)이 길었던 남자가 있었던가. 바뀐 것이 있다면 외로울 때면 목걸이를 만지작거린다는 것이었다. 굵은 진주 목걸이, 반짝이는 다이아 목걸이, 영롱한 사파이어 목걸이 ... 각종 화려한 목걸이가 샤넬의 목에 걸리곤 했다. 하지만 그 목걸이들 안쪽엔 성(城) 모양의 펜단트가 달린, 낡고 허름한 목걸이가 있었다.


장돌뱅이 아버지가 어느 마을에서 사왔을까. 성(城) 모양의 펜단트는 돌려서 빼면 그 속에 작은 공간이 있었다. 샤넬은 죽은 아들 대니의 뼛가루를 펜단트 속에 넣고 다녔다.


"성(城)에 갇힌 내 아들 대니..."


가혹한 노동 조건과 모욕적인 독설을 견디다 못한 근로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을 때도 샤넬은 성(城) 펜단트를 만지작거렸다.


"그때 그 폴란드 의사 아니었다면 대니를 살릴 수 있었을텐데"


돌팔이 산부인과 의사를 저주하던 샤넬은 점차 친나치 성향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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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 "꺼져!" 샤넬의 호통이 이어진다. 그것은 수 십 년 전 샤넬 본인이 들었던 말과 같은 것이었다. 고아원의 사감은 남다르게 깡마른 고아 소녀 가브리엘 샤넬에게 가혹할 정도로 냉정하게 대했다. 징벌방에 갇혔다. '찰칵' 문은 밖에서 잠겼다.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창문도 없었다. 언제 나갈 수 있을지 기약도 없었다. 13살 소녀에겐 더할 나위 없이 잔인한 형벌이었다.


미워하면서도 닮는다고 했던가. 샤넬의 독설은 그 시절 사감 선생의 그것과 흡사했다. 미워하면서도 닮은 것이 어디 사감 선생 뿐이련가. 이 남자 저남자 사랑을 즐기는 그녀의 애정 행각은,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아비 알베르의 그것과 비슷했다.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이자 이 여자 저 여자 품을 옮겨다니는 바람둥이였던 알베르 샤넬. 시골 처녀 잔 드볼 그의 아이를 잉태했지만 그는 그녀를 떠나려고 했다. 잔과 결혼까지 하였지만 알베르의 바람기는 가시지 않았다. 잔이 죽자 알베르는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겼다.


알베르는 딸아이들에게 목걸이 하나씩을 선물해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가브리엘의 목에 걸린 것은 성(城) 모양의 펜단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어느 마을 이름 모를 처자와 하룻밤을 지내고 받아온 사랑의 징표였을까.


차디찬 회색 벽으로 둘러처진 고아원에 들어선 소녀 가브리엘은 주위 소녀들에게 아비의 정체를 부풀려 말하기 시작했다. 아비는 목걸이 속 성(城)의 성주(城主)였다고 말이다. 지금은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사업이 성공하면 우리를 다시 데려올 것이다. 이를 악물고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감 선생의 호통에도 샤넬의 허풍은 끊기지 않았다. 그 허풍이야말로 그녀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언젠가는 신대륙으로 건너갈 것이다. 나를 둘러싼 박수가 세상에 크게 울러퍼질 것이다.


아비인 장돌뱅이 알베르 샤넬이 이 여자 저 여자의 품을 옮겨다니듯 가브리엘 역시 뭇 남자들의 품을 옮겨갔다. 카바레 주인이었을까 그 아들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을 그토록 쫒아다녔던 기병대 장교였을까 아비조차 모를 아이를 낳기 위해 의사를 불렀다. 술냄새를 풍기는 폴란드인 의사 도착했다. 차가운 수술도구가 그녀의 예민한 속살을 파고 들었다. '차가워' 샤넬이 이마를 찡그리며 입을 열었을 때 뜨거운 고통이 그녀의 하초를 습격했다. 그녀의 첫번째 아이 대니는 그렇게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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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 '샤넬'을 경멸하고 있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부자와 권력자의 품을 오가며 이름값을 올려 허영심으로 가득찬 상류층 부인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매소부(賣笑婦)... '샤넬'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그의 심정은 딱 이러했다.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베케트로서는 나치 정권에 부역한 샤넬이 못마땅할 수 밖에 없었다. 쟝 콕토(Jean Cocteau)가 샤넬의 샬롱에 자주 나타난다는 것조차 그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가 샤넬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은 파리 뒷골목에 있는 조그만 병원의 응급실에서였다.


"대니, 대니, 대니!"


콧대가 오똑한 중년 여인이 '대니'라는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고 있다. 풀린 동공, 이마에 송송이 맺힌 땀방울, 툭 튀어나온 혈관. 그녀의 온 몸은 끊임없이 떨리고 있다. 모르핀 중독 의한 쇼크 증상이다. 레지스탕스 활동 당시 나치 친위대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던 중에 가까스로 탈출한, 하지만 그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해 모르핀 중독자가 된 친구 루이를 문병 온 베케트의 눈에는 같은 증상임이 훤히 보였다.


"대니, 대니, 대니!"


간절한 기다림의 절규였다. 하지만 그녀가 찾는 대니는 그녀 곁에 없었다. 그녀의 고함 소리를 참다못한 간호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대니는 내일 온다구요." 간호사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샤넬의 오랜 울음이 멎었다. 다음날까지 샤넬은 대니를 기다렸다. 다음날 그 다음날 샤넬의 기다림은 계속되었다. 병원에 입원한 친구를 문병 온 베케트는 여인을 만나러온 사람이 있는지 간호사에게 물어봤다. 간호사는 대니가 누군지 자신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환자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불안감을 누르기 위해 환자가 찾는 사람이 내일 온다고 말했을 분이라고 답했다.


그때 그 병원에서 봤던, 모르핀 중독 증세를 보이던 환자가 그 유명한 '샤넬'인줄 베케트 본인은 몰랐다. 하지만 그날 병원에서 일어난 샤넬과 간호사의 대화는 이후 베케트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로 각색되어진다.


연극을 본 평론가가 베케트에게 물었다. "고도는 누구입니까?" 베케트는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질문이 이어졌다. "고도를 만날수 있을까요?" 베케트는 응급실에서 울부짖던 여인을 회상했다.


기약할 수 없는 존재를 끊임없이 기다리던 그녀는 그토록 찾던 '대니'를 만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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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근무조건과 인정머리 없는 샤넬의 독설에 지친 4,000명에 달하는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샤넬은 그들을 해고한 뒤 파리의 리츠 호텔 거처를 옮겼다. 극소수 매장을 제외하곤 사업을 정리했다. 불면의 밤이 시작되었다. 악몽이 계속 되었다.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모르핀에 점차 깊숙이 중독되어 갔다. 술에 흠뻑 취한 뒤 충동적으로 찔러댄 모르핀 주사로 인해 쇼크 증상을 보여 파리 뒷골목의 개인 병원으로 이송되어갔던 것도 그 시절의 일이었다.


술과 모르핀으로 범벅이 된 악몽 같은 밤을 보낸 뒤 호텔 화장실에서 구역질을 하고 있는 샤넬의 등 뒤로 조용히 다가선 남자의 정체는 독일 장교 한스 군터 폰 딩클레지였다. 군터는 샤넬의 등을 두들겨줬다. 괜찮아요. 괜찮아질 거에요." 등을 두들겨주는 남자의 손가락은 마치 여인의 그것처럼 희고 길었다. 군터는 손에 든 와인잔을 샤넬에게 건냈다. 샤넬이 와인으로 입을 행구자 남자의 입술이 그녀의 입으로 다가왔다. 그날 밤은 프랑스의 문화 영웅, 세계 패션계의 여제(女帝)에서 나치의 앞잡이, 매국노로 비난 받게 되는 일련의 행동이 시작되는 밤이었다.


화장실 앞 벽에 기대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남녀의 모습을 중년의 대머리 남자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쳇, 한 발 늦었군." 천재 미술가이자 바람둥이 파블로 피카소 바로 그 대머리 남자였다.


문화대국 프랑스의 이름을 드높인 패션 영웅에서 나치에 영혼을 판 매국노로 샤넬에 대한 수식어가 바껴갔다. 비난을 견디다 못한 샤넬은 좁은 자동차 트렁크에 몸을 숨기고 국경을 넘어 스위스 로잔으로 건너간다. 1950년대 중반 샤넬은 파리로 돌아왔지만 과거의 나치 부역 전력으로 인해 프랑스에서의 활동이 제한을 받게 되었다. 이미 파리 패션의 중심은 크리스티앙 디오르 뉴-룩으로 옮겨간 상황이었다. 샤넬은 파리의 달라진 공기를 뒤로 하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간다. MGM 새뮤얼 골드윈을 만나 정분을 나눈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장돌뱅이이자 바람둥이였던 그녀의 아버지 알베르처럼 가브리엘 샤넬 역시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바람은 멈추지 않고 계속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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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해군 정보부 산하 비밀조직 요원들이 샤넬이 머물고 있는 리츠 호텔 스위트룸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기 시작한 일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영국과 프랑스 수뇌부의 기밀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알게 된 정보부는 나치 친위대 장교 한스 군터 폰 딩클레지 뒤를 밟던 끝에 샤넬이 머물고 있는 리츠 호텔까지 오게 된 것이다. 임무를 맡은 요원의 이름은 패트릭 댈즐 조브. 영국 정보부가 가장 신뢰하는 첩보원이었다.


샤넬 소유의 롤스로이드가 호텔에 도착했다. 운전기사 라울은 여느 때처럼 주위를 살핀 뒤 마드모아젤 샤넬을 안내했다. 샤넬이 호텔로 들어간지 10분 쯤 후 롤스로이드 안에서 독일 군복을 입은 남자가 나왔다. 아리안족의 유전자가 그대로 배여든, 쭉 뻗은 팔다리에 조각 같은 외모의 독일군 장교 그가 바로 한스 군터 폰 딩클레지였다. 군터는 샤넬의 스위트룸으로 들어갔다. 군터와 샤넬은 침대 위에 누웠다.


"바보 같은 영국놈들" "영국인을 욕하지 마세요." "왜? 죽은 카펠 때문에? 아니면 그 배불뚝이 늙은이 때문인가?" "하하 질투하세요?" "어제 그 늙은이를 만났다더군. 그래, 그 늙은이가 뭐라던가?" "안심하래요." "뭐? 안심? 오늘도 나랑 이러고 있는데."


샤넬은 성난 암코양이처럼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남자의 손길이 닿자 암코양이는 배를 드러내고 갸르릉거리기 시작했고 곧 이어 발정기의 암코양이 같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남녀의 대화는 영국 첩보원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날밤 샤넬이 영국을 직접적으로 욕했더라면 호텔 밖에 대기하고 있는 정보부 직원들에 의해 살해당했을 것이다. 한바탕 정사(情事)가 끝난 뒤 군터가 호텔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샤넬은 목욕을 마치고 호텔 방을 나서다가 낯선 청년을 만났다. 청년은 샤넬에게 가벼운 눈웃음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패트릭은 호텔 밖에 대기하고 있던 정보부 상관에게 기록한 내용을 전달했다. 그 상관의 이름은 이언 플레밍. 훗날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소설가가 된 바로 그 남자였다. 샤넬의 코드넘버는 'F-7124'으로 밝혀졌으며 샤넬과 마주쳤던 패트릭 댈즐 조브 제임스 본드 모델 되었다. 이언 플레밍 007 소설의 초기 판본에 따르면 악의 조직 스펙터의 보스 블로벨트가 쓰다듬고 있는 암코양이 이름이 '코코'로 설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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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샤넬은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렇게 내뱉었다.
"재능 없는 것들(Qu'est-ce un non - talents)!"


나치 정권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차량에 돌을 던진 프랑스 국민을 향한 말이었을까 자신의 자리를 침범한 후배 디자이너 디오르를 향한 말이었을까 아니면 귀족적인 풍미라고는 전혀 없는 신대륙의 촌놈들을 향한 말이었을까 이도저도 아니면 '배불뚝이 늙은이'로 지칭하곤 했던 영국 수상 처칠의 일 느린 비서관들을 향한 말이었을까.


윈스턴 처칠과의 우정으로 샤넬의 미국행은 쉬워졌다. 적어도 샤넬이 반유태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을 처칠이 보증해줬고 그것으로 미국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유태인들의 OK 사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구대륙에서의 평판이야 어떻든 신대륙의 사람들은 샤넬의 패션에 열광했다.


뉴욕의 가장 큰 백화점에 샤넬의 매장이 들어섰다. 더 많은 공간, 더 많은 직원이 필요했다. 매장의 직원들에게 샤넬의 독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재능없는 것들(What a no - talent)!"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던 텍사스 포스워스 출신의 파트리샤 하이스미스 양(孃)의 귀에도 그 독설이 들렸다.


글쓰기에 재능(talent)이 있었던 파트리샤 하이스미스는 그날의 매장에서의 경험과 자신이 알고 있는 샤넬의 개인사를 덧붙여 소설을 작성했다. <재능 있는 리플리씨(The Talented Mr. Ripley)>가 바로 그것이다. 샤넬의 고소를 피하기 위해 주인공을 남자로 바꿨다고도 하는 그 소설은 르네 클레망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다. 주인공으로 프랑스의 미남 배우 알랭 들롱이 캐스팅되었다. 관객들은, 매력적이지만 양심없는 리플리의 거침없는 행각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샤넬의 일생에 흥미를 느낀 파트리샤 하이스미스는 프랑스에 정착했다. 그녀의 곁에는 두 마리의 샴고양이가 있었다. 고양이의 이름은 '코코'와 '샤넬'이었다고 전해진다. 고양이는 개처럼 주인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단지 주인의 충성을 바랄 뿐이다. 샤넬에게 있어서 남자들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샤넬의 오랜 친구였던 쟝 콕토 샤넬을 아래처럼 묘사했다.


- 매력적이면서 호감을 주고 인간적인가 하면 혐오감을 주기도 하며 때론 너무 지나쳐 보이기도 하는 여성. 분노, 짓궂은 말, 창의력, 변덕, 극단적 성격, 친절함 유머, 관대함 등이 샤넬이라는 독특한 인물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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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영화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지."


영화의 제목은 <쥴 앤 짐> 프랑소와 트뢰포 감독의 신작 영화였다. '까트린'이라는 매력적인 여인을 둘러싼 두 남자 쥴과 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한 여자와 두 남자의 묘한 삼각관계. 쥴과 짐은 까트린을 여왕처럼 받든다. 어느 한 명도 버림받지 않기 위해 세 사람의 묘한 사랑이 시작된다. 영화 속 세 사람의 모습은 행복해보인다. 까뜨린이 뛰어가자 쥴과 짐이 뒤따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가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며 VIP 좌석에 앉아 있던 샤넬은 젊은 날 자신을 사랑해주던 두 명의 남자를 떠올린다. 기병대 장교 에띠엔 발장, 영국의 귀공자 아서 카펠... 가브리엘 샤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남자였다.


싸구려 카바레에서 무명의 가수로 노래를 부르던 샤넬. 에띠엔 발장이 없었다면 샤넬은 고아 소녀로 시작해서 카바레 가수를 거쳐 늙은 매춘부로 삶을 끝맺었을지도 모른다. 발장은 자신의 별장에 샤넬을 초대했다. 발장의 별장에서 샤넬은 상류층의 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발장의 별장에서 만난 것은 상류층의 문화만이 아니었다. 에띠엔 발장은 영국의 귀공자 아서 카펠을 샤넬에게 소개했다.


물이 가득 찬 욕조 속에 미남 청년이 알몸으로 누워있다.
더운 날씨를 못 견뎠는지 욕조 옆에 선풍기를 켜놓고 있다.


"봉주르, 선풍기가 물에 빠지면 위험하다는 걸 몰라요?"
"네, 전 위험한 목욕을 좋아해요."
"그것 참... 그런데 여기서 뭐하는 거죠?"
"목욕하고 있지 않습니까?"


에띠엔 발장이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든다.


"깜빡 잊고 있었군. 인사했나? "
"이 아가씨가 내 목숨을 구해줬어."
"이 아가씨가 코코 샤넬이라네."
"자네 여자친구?"
"그렇다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런데 성함이?"
"아서 카펠"
"아서? 영국인인가요?"
"모계로 보면 그렇죠."


샤넬이 죽은 뒤 만들어진 영화 Emmanuelle: L'antivierge에는 세 사람의 만남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주인공 엠마누엘 역은 네덜란드 출신의 여배우 실비아 크리스텔 맡아 열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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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란 이름 함부로 쓰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시나리오에서 당장 빼!"


샤넬의 호통이 이어진다. 80 넘은 노인이라고 볼 수 없는 짱짱한 목소리다. 제작비를 얻기 위해 파리 문화계의 대모(代母) 역할을 하고 있는 샤넬을 찾아온 영화 감독 프랑시스 지아코베티(Francis Giacobetti)는 파리 문화계의 큰 손 샤넬 앞에서 혼쭐이 나고 있었다. 이 젊은 감독에겐 샤넬을 대하는 요령이 없는 것이다.


마침 그 자리에 동석하고 있던 라울은 샤넬의 히스테릭한 호통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샤넬의 방을 나서는 지아코베티를 향해 라울은 슬쩍 미소를 지어준다. 말은 저렇게 험하게 해도 샤넬이란 여자는, 지원금에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샤넬은 '대니'라는 이름이 함부로 다뤄지는 것에 굉장히 민감해져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샤넬의 운전기사로 일해왔던 라울은 샤넬에게서 '대니'란 이름이 갖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파리 뒷골목의 개인 병원으로 급히 샤넬을 이송한 것도 라울이요 죽은 대니의 이름을 부르며 모르핀에 취해 울고 있는 샤넬을 달래준 것도 라울이었다.


젊은 시절 샤넬과 카펠을 차에 태우고 중국인 침술 가게에 데려다 준 것도 라울이었고 카펠과 샤넬, 안나 마리(Anna-Maria )라는 이름의 소녀를 차에 태우고 에로틱한 사우나로 유명한 터키탕으로 향했던 것도 라울이었다. 아서 카펠 교통사고로 인한 두개골 골절로 사망하였을 때 샤넬을 그 사고현장으로 데려다준 것도 라울이었다. 라울은 샤넬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다.


1971년 샤넬이 죽었다. 그 몇 년 후 샤넬의 운전기사였던 라울은 자신만이 알고 있던 샤넬의 이야기를 알고 지내던 영화감독 프랑시스 지아코베티에게 해줬다.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돋보이는 Brigitte Lahaie와 슬림한  몸매를 가진 Sylvia Kristel 두 여배우 중에서 누구를 캐스팅할 것인지 고민할 때 Sylvia Kristel를 선택하게 한 것도 라울이었다. 젊은 시절 샤넬의 몸매를 빼닮은 네덜란드 출신 여배우 Sylvia Kristel은 엠마누엘 시리즈에 출연하면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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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시스 지아코베티는, 라울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 Emmanuelle 속편을 제작하기로 했다. 전편의 감독인 쥐스트 자깽 대신 엠마누엘 속편의 연출을 맡게 된 프랑시스 지아보게티는, 라울에게서 들은 샤넬의 비밀스런 이야기들을 영화 곳곳에 보석처럼 박아 넣었다.


"앞 뒤 이야기를 보고 글을 써야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런 시나리오로는 내 돈을 줄수 없네. 자네 영화는 에로 영화가 아니라 포르노야. 영화는 이야기에 일관성이 있어야 된다구. 여기 노트와 연필을 줄 테니 집에 가서 잘 생각해봐!"


속편인 Emmanuelle: L'antivierge이 개봉하던 날, 감독인 지아코베티는, 지난 날 샤넬이 자신에게 내뱉었던 독설을 떠올리고 있었다. 화면에선 "부웅~" 증기선의 뱃고동 소리가 울리고 있다. 여주인공 엠마누엘 (실비아 크리스텔)이 증기선에 올라탔다. 선원이 안내해준 허름하고 지저분한 객실을 둘러본 그녀는 항의하기 시작한다.


"손님,여깁니다."
"내가 예약한 것은 1등석이라구요!"
"손님은 3등석 72번입니다."
"하지만 1등석 값을 냈다구요."


 영문을 모르는 선원은 깐깐하게 따져드는 그녀를 선장실로 안내한다. 능글맞은 선장은 선장실에 머물 것을 제안한다. 그녀와의 동침을 원하는 것이다. 남편과 연락하길 원하던 그녀는 선장의 막돼먹은 매너에 진저리를 치며 허름한 3등석으로 몸을 옮긴다.


- 프랑소와 지아고베티 감독의 영화 Emmanuelle: L'antivierge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샤넬이 지아고베티에게 건내줬던 노트 위에는, 샤넬의 운전기사 라울이 얘기해주는 샤넬의 은밀한 애정행각이 고스란히 적혀졌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영화의 기본 뼈대가 되었다. 1등석 표를 3등석으로 바꾼 것은 다름아닌 샤넬의 운전기사 라울의 짓이었다. 에띠엔 발장 주위를 맴도는 다른 여자들처럼 파티 장소나 오가며 될 것을, 모자를 만들겠다, 양장점을 내겠다, 비단을 사겠다, 모직을 주문해야겠다며 여기저기 바쁘게 차를 몰게 하는 얄밉도록 깐깐한 그녀에 대한 반발심이 여객선의 표를 바꾸는 치기어린 장난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언제나 충성스럽게 그녀를 대했던 운전기사 라울의 장난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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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모아젤, 재클린 케네디((Jacqueline Kennedy) 여사가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오, 재키(Jackie)가 온다고."


잔뜩 찡그려져 있던 샤넬의 얼굴이 밝아졌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최강대국 미국의 대통령 영부인이 된 재클린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는 샤넬, 가브리엘 샤넬이 유일했다. 어쩌면 샤넬에게도 재클린이 그런 존재였을지 모른다. 재클린이 입고 다니던 샤넬 트위드 의상이 샤넬-룩이 아니라 재클린-룩으로 언론에 보도되어도 정정 요구를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실을 흐뭇해했던 샤넬이었으니 말이다.


호텔 밖으로 나온 라울에게 왠 남자가 다가온다.


"자네가 샤넬의 운전기사 맞지? 이걸 샤넬에게 꼭 전해주게."


라울은 남자가 전해주는 쪽지를 건네받았다.


- 11월 22일 텍사스 댈러스에서의 대통령 행사를 취소시켜 주시오. -


남자가 사라지고 난 뒤 라울은 건네받은 종이 쪽지를 구겨버렸다. 라울은 파리 센강의 물결 위로 구겨진 종이 쪽지를 던져버렸다. 존 F 케네디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던 단 한 번의 기회는 라울의 장난질로 인해 사라져버렸다.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 댈러스에서의 행사를 마지막으로, 재클린은 34살의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되었다. 머리통의 총구멍에서 핏물이 쿨럭쿨럭 흘러나오는 케네디의 몸을 안고 재클린은 오열했다. 재클린이 입고 있던 샤넬의 분홍빛 트위드 존 F. 케네디의 피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여져 갔다.


워렌 위원회는 하비 오스왈드가 케네디를 암살했다고 잠정결론지었다. 그러나 정확한 동기나 진상은 말하지 않은 채로 잭 루비에 의해 사살되었기에 사건은 미궁 속으로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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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세 노령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가쁜 숨결을 모아 선 하나하나 정성스레 디자인했다. 자신의 몸 위에 선(線)을 그려나갔다. 당대 최고 패션 디자이너의 마지막 혼이 선(線) 하나하나에 녹아들어갔다.


"이 부분의 가죽을 떼어 이렇게 재단하고 이렇게 봉재하여 주시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자신의 피부에 연신 마사지를 한다. 라벤다 향이 나는 오일을 바르고 값비싼 향유로 문지른다. 백년이 흘러도 탄력이 유지되도록 천년이 지나도 향기가 지속될수 있도록. 그래야만 코코 샤넬의 이름에 걸맞는 '걸작'이 나올 것이니 말이다.


마사지를 하고 있는 코코 샤넬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이마 위에는 흰머리카락이 가득하다. 흰 머리카락, 주름진 이마와 대조적으로 그녀의 양쪽 허벅지 피부는 10대 소녀 부럽지 않은 매끄러운 탄력이 유지되고 있었다.


'내 사랑. 영원토록 기억될 내 사랑이여. 내 사랑을 이렇게라도 받아주시오.'


13살 철부지 소녀 시절에 처음 만났던 그 사람을 생각하니 샤넬의 두 볼에 홍조가 맺힌다.


'에밀리. 에밀리. 복숭아 향내 가득했던 그녀의 하얀 린넬 원피스여. 내 사랑 에밀리!'


어머니가 사망한 뒤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에게 버려져 고아원으로 보내졌던 13살 소녀 샤넬. 마음 붙일 곳 없던 외로운 소녀에게 하녀 에밀리는 유일한 말벗이 되어주었다. 에밀리는 소녀에게 바느질을 가르쳐 주었다. 소녀의 바느질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한 벌의 옷을 재단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되었을 때 소녀가 처음 만든 옷은 에밀리를 위한 옷이었다. 장식성이 제거되고 활동성이 강조된 샤넬 스타일은, 친구이자 누이, 어머니, 그리고 첫사랑이 되어주었던 하녀 에밀리를 위한 디자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카바레 주인, 영국의 청년 실업가, 프랑스 귀족, 독일군 장교, 스위스의 외교관, 화가, 극작가 등등 숱한 남자가 그녀의 품을 지나갔다. 하지만 샤넬에게 영원한 사랑으로 기억되는 것은 에밀리 단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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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마담. 정신차리세요."


하녀 셰릴이 샤넬을 부축하여 침대로 옮긴다.


"대니를 봤어. 대니가 날 찾아왔어. 내 아들 대니가..."


젊은날의 낙태로 인해 불임의 몸이 된 코코 샤넬. 아이의 태명(胎名)은 '대니'였었다. 87세 이제는 홀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진 샤넬이 젊은날 사산(死産)한 아이를 생각하며 울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스위스를 오가며 전 유럽의 패션계를 지배했던 이 여장부에게도 눈물이 있었던 것이다.


"대니에게 내 핸드백을 보여주고 싶어. 내 최고 걸작을 말이야. 전해줄 수 있겠지?"


샤넬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하녀 셰릴을 쳐다본다. 셰릴은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샤넬의 허벅지를 만져본다. 가뜩이나 마른 체형에 87세의 늙음까지 더해져 쪼글쪼글 말라 비틀어진 허벅지다. 언제나 그렇듯이 손톱으로 얼마나 긁어대었는지 핏방울이 맺혀있다.


"대니가 말야. 내가 준 빵을 받아서 먹더라구. 두 손을 내밀어서 빵을 받아쥐곤 감사합니다 이러면서 말이야."


무너져가고 있는 성(城), 이곳은 샤넬의 병든 '자궁'이다. 그 성에 있는 창백한 소년의 이름은 '대니'. 오늘도 샤넬은 대니를 만나러간다. 때론 13살 고아 소녀의 모습으로 때론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의 모습으로... 샤넬은 아들 대니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자, 마담. 주사 맞을 시간이에요."


셰릴은 코코 샤넬의 팔에 주사를 놓는다. 환각 작용이 있는 모르핀 주사다. 죽은 아들 대니를 만나봤으니 이번에는 에밀리를 만나볼 차례일까. 셰릴은 밖에서 방문을 잠그고 조용히 돌아선다. 약기운이 돌아서인지 샤넬은 잠시 몸을 떤 뒤 조용히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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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 소녀 샤넬에게 첫 생리가 있었던 날. 속옷에 묻은 핏물에 놀라 겁에 질려 혼자 울고 있는 샤넬을 에밀리가 꼭 껴안아줬다. "울지마.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에밀리의 다독거림에 샤넬의 울음이 멈췄다. 새벽이 올 때까지 에밀리는 샤넬을 안아주었다. 샤넬은 그날 밤 에밀리의 원피스에서 느껴졌던 복숭아 향내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였다.


"이제 숙녀가 되었구나." 에밀리의 입술이 샤넬의 입술에 포개졌다. 조용하고 따뜻했다.


"어이쿠, 마담! 일어나봐요."


어느새 방 안으로 들어온 셰릴이 샤넬이 덮고 있는 이불을 들춰보더니 호들갑스럽게 굴기 시작한다. 축축해진 사추리. 샤넬이 입고 있는 아랫옷은 똥오줌으로 눅눅해져있다.


"세탁비 추가에요. 알죠?"


모르핀으로 멍해진 샤넬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인다. 말 없이, 그대로 눈을 감고 있다. 에밀리와의 그날밤 추억에서 아직 깨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셰릴은 샤넬의 옷장에서 옷 몇 벌을 꺼낸다. 당대의 패션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지금은 똥오줌도 못가리는 노인네가 되어 오늘 내일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앞으로 입지도 못할 옷인 것이다. 하녀 셰릴이 밖으로 나간 사이 방 안에 누워있던 샤넬이 벌떡 일어나더니 하녀 셰릴이 깜빡 놓아두고 간 날카로운 칼로 자신의 허벅지살을 도려낸다. 모르핀에 취해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듯 손톱으로 그려놓은 자국을 찾아 용케 재주껏 가죽을 떠낸다. 마지막 기력이 다했는지 피투성이 허벅지 살점을 내려놓은 후 자는듯 숨이 멎었다.


샤넬이 죽은 직후 그녀가 유언으로 남긴 최후의 명품은 완성되어졌다. 샤넬 최후의 작품인 인피(人皮) 핸드백은 살아 생전 샤넬이 뭇 남성의 품을 떠돌듯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갔다.


핸드백의 소유자들은 오래된 성(城)을 꿈 속에서 보았다고 한다. 생전 성은 커녕 성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은 성(城)이었다고 한다.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은 듯한 굳게 닫힌 녹슨 철문 안에 젊은 시절 샤넬의 모습을 닮은 어린 소년 하나가 외롭게 서있다고 전해진다. 혹시 당신이 그 소년을 만난다면 '대니'라고 불러주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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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윈도에 진열된 명품들, 끝없이 몰려든 쇼핑 인파, 뜨거운 취재 열기를 보면서 알리사(Alissa)는 자신의 삶이 그들의 부유한 삶과 동떨어진 것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조그만 병에 담긴 향수 한 병이 그녀의 한달 식비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개의 C자가 겹쳐진 로고와 '샤넬'이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은 왠지 모르게 친밀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하얀색 린넬 원피스를 입은, 복숭아빛 붉은 뺨을 가진 13살 소녀 알리사는 그녀의 할머니 에밀리가 그러했듯 하녀일로 하루하루를 버텨간다. 샤넬의 사망 소식을 생중계하던 방송이 샤넬 향수 CF로 이어진다. 세계적인 모델 파트리샤가 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인다.


"잊혀지지 않는 영원한 사랑, 샤넬 넘버 5"


1921년,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Ernest Beaux) 앞에 코코 샤넬이 서있다. 그녀는 몇 개의 샘플이 담긴 향수병 중에서 다섯번째 병을 고른다. 13살 그해 봄, 2살 연상의 하녀 에밀리의 품에서 맡았던 복숭아향을 닮은 그 향수는 '샤넬 No.5'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다른 누구에게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지만 잊혀지지 않는 영원한 사랑의 빛, 절망과 외로움만 느꼈던 고아 소녀의 마음에 한줄기 빛을 비춰주었던 그날 밤의 추억이 세계 향수계의 판도를 바꿨다. 세상의 향수는 샤넬 No.5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되었다.


1971년 1월 10일 죽음이 다가오는 그 짦은 순간, 샤넬은 에밀리의 따뜻했던 품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에밀리는 다시 한 번 샤넬을 다독거렸다. 에밀리의 따뜻한 품 속에서 샤넬은 오랜동안 그녀를 괴롭혀왔던 외로움, 두려움, 배신감, 절망감이 눈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울지마.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날카로운 칼로 가죽을 벗겨낸 허벅지에서 흘러나온 피가 침대 시트를 붉게 적셨지만 샤넬의 뺨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때 그 13살 소녀로 돌아간 것처럼 수줍게 입을 열었다. "에... 밀... 리..."


에밀리가 속삭였다. "이제 숙녀가 되었구나."


그날밤처럼 에밀리의 입술이 샤넬의 입술에 포개졌다. 조용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달콤했다.
에밀리의 입술에서 복숭아 향이 느껴졌다. 그것은 잊혀지지 않는 영원한 사랑의 향(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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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버나드 쇼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두 명의 여성으로 과학자 퀴리 부인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 꼽았었다. 코코 샤넬의 본명은 가브리엘 샤넬. 1971년 87세 나이로 운명을 달리했던 장소가 바로 프랑스 파리에 있는 리츠 호텔이었다. '패션은 사라져도 스타일은 남는다'라는 명언을 남긴 샤넬은 그녀 인생의 후반기를 리츠 호텔 스위트룸에서 보냈었다. 호텔에 들어서면, 몇 명의 소유주를 돌고 돌아 이곳 호텔의 로비로 돌아온 샤넬 최후의 핸드백을 볼 수 있다. 호텔 안으로 몇 걸음 걷다보면 어딘가 모르게 복숭아 내음 느낄 수 있다. 샤넬 No.5 ? 아니다. 그것은 샤넬의 첫사랑 에밀리의 향기다.


호텔에 머문 사람들은 톰과 제리가 등장하는 꿈을 종종 꾸게 된다고 한다. '톰과 제리'는 MGM(메트로-골드윈-마이어 社)에서 1948년부터 제작한 인기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이다. MGM 창립자인 할리우드의 거물 새뮤얼 골드윈 코코 샤넬의 열렬한 팬이자 동업자였다. 1930년대 골드윈과 만난 샤넬은 골드윈과의 친분을 통해 MGM 출연 배우들의 의상을 맡았다. 20대의 발랄함은 없어졌지만 샤넬의 매력은 여전했다. 샤넬이 입을 열면 남자들은 그녀의 말에 다들 주목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때론 소설의 소재로, 영화의 등장인물로 그림의 주제로 바껴갔다. 톰과 제리 역시 샤넬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외로웠던 고아원 시절, 가지고 놀 것도 없던 샤넬에게 고아원에 있던 고양이와 쥐는 좋은 장난감이자 친구가 되었다. 어딘가 아픈듯 움직임이 둔한 고양이와 고양이의 먹이를 날쎄게 훔쳐먹는 생쥐의 모습은 웃음을 잊고 지내던 고아 샤넬에게 잊고 있던 웃음을 선사했다. 고아원 시절의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던 샤넬이었지만 고양이와 생쥐 이야기만큼은 곧잘 하곤 했다.


파리 사교계, 전세계의 상류층들이 모인 연회장에서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의 날쌘 생쥐 이야기가 좌중의 웃음을 터뜨린다. 와인잔이 부딪히는 가운데 남자의 눈이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의 눈은 남자를 쳐다본다. 피카소, 달리, 장 콕토, 스트라빈스키, 헤밍웨이, 그레타 가르보, 코코 샤넬.... 여기는 호텔 리츠. 코코 샤넬의 영혼이 머물고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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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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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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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눌프

    작성일
    201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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