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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국내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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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표기
뤼미에르 피플
글쓴이
장강명 저
한겨레출판
평균
별점8 (10)
kosinski

“저로서는 알 수 없죠. 실제로 저주가 있었다고 여길 수도 있고,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습니다. 《뤼미에르 피플》에 실린 단편들 자체가 그런 식이잖아요. 이 단편집 속의 괴상한 사건들은 신비한 힘 때문에 벌어진 것일 수도 있고, 단순한 우연의 일치나 착각이 빚은 해프닝일 수도 있습니다. 모호하지요. 그런 모호함이 그분의 노림수겠고요.” (p.120)



뤼미에르 빌딩이라는 공간의 8층에 기거하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연작 소설집, 그 중 네 번째 소설 〈804호 마법매미〉를 보면 위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우리는 뤼미에르 빌딩에 사는 열 명의 인물들을 소재로 삼은 열 편의 단편을 보고 있는데, 사실 그 열 편의 단편 소설집을 쓴 이는 네 번째 소설에 등장하는 죽은 젊은 작가이다. 그리고 그 단편에는 젊은 작가로부터 완성된 책을 넘겨 받은 편집자가 있고, 죽기 전 젊은 작가가 출판 허락을 받도록 지목한 기자가 한 명 등장한다. 소설의 안과 밖의 교묘한 겹침 정도가 아니라, 소설 속 리얼 세계와 리얼 세계 속의 소설을 뒤섞어버리는 작가의 기기묘묘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여하튼 그렇게 소설 속 주인공들이 거론하고 있는 죽은 작가의 아직 출간되기 전인 책 속의 소설들로 그려지고 있는 소설들을 살펴보자면...



「801호 박쥐인간」.
“박쥐 인간이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은 슬픔과 눈물이다. 비탄에 빠진 인간 곁에 있으면 박쥐 인간의 피와 정신은 맑아진다. 그러나 박쥐 인간이 그 슬픔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인간들이 삼림욕을 하며 나무가 내뿜는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과 비슷하다. 인간들의 날숨이 나무에 아무런 해를 미치지 않는 것처럼 박쥐 인간이 얻는 상쾌함도 인간들의 슬픔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사람에게 삼림욕이 필수적이진 않지만 박쥐 인간에게 슬픔은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p.13)
뤼미에르 건물에 딸린 편의점에서 일하는 학생의 정체는 실은 박쥐 인간이다. 아마도 소설의 시작 부분에 있는 실종된 이가 바로 그 박쥐 인간이라고 여겨지는데, 그 슬픔을 자양분 삼아 살아가는 박쥐 인간에게 어느 날 801호 여자가 접근한다. 하지만 아이러니인 것은 그 여자의 슬픔을 해소해주자, 이제 더 이상 박쥐인간인 주인공은 그녀로부터 슬픔이라는 양분을 제공받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슬픔을 없애는 건 기쁨이 아냐. 슬픔은 분해되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마음의 양식으로 돌아가는 거야. 잘 썩지 않는 동물의 똥을 쇠똥구리가 분해해 양분으로 만드는 것처럼 박쥐 인간들은 인간의 슬픔을 분해하지. 박쥐 인간이 없으면 이 별은 사라지지 않는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될 거야.” (p.38)
그렇게 박쥐 인간은 다른 이의 슬픔을 분해하는 대신 박쥐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게 되는 슬픈 운명을 지녔다. 그런데 슬픔이 사라지면 박쥐 인간도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그래도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슬픔’이 없듯이 또한 슬픔은 끊임없이 생산되게 될테니 말이다. 그러니 박쥐 인간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박쥐 인간의 역할을 하는 이가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옮겨져갈 뿐이다.



「802호 모기」.
소설에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병렬의 형태로 실려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여자아이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냈다.’로 시작되며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남자는 뤼미에르 빌딩 802호에서 마비된 몸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모기 한 마리가 괴롭히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남자는 숨을 참으면서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냈다.’ 로 시작되는데, 아마도 마비되어 죽어가는 그 남자로 짐작된다. 이 남자가 상상한 이야기는 쩜과 빡이라는 두 인물의 만남에 관한 것이다. 비행 소년과 소녀로 만난 둘은 802호에서 함께 살기 시작하지만 그들에게 미래는 없어 보인다. 802호라는 공간과 모기라는 매개체가 존재하지만 두 이야기가 전염된 열병처럼 정확히 매치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암울한 헐떡임만은 묘하게 겹친다.



「803호 명견 패스」.
왜소증 환자인 여자와 청각 장애인 남자의 이야기이다. 직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하고 이제 여자는 뤼미에르 빌딩 803호에 사는 남자의 집을 방문하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그 옆집에는 강아지를 키우는 여자가 살고 있고, 이 남자가 그 여자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이 여자는 참을 수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왜소증 여자가 오래전 키웠던 개 패스의 이야기... 다른 이야기들도 모호하지만 좀더 모호한... 그래도 이런 문장은 재미있지 않은가...
“시청 주변을 하늘에서 관찰하는 외계인이 있다면 그들도 인간들의 움직임을 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수천수만 명의 인간이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에 갑자기 지하철 시청역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와 사방팔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이유를 외계인이 짐작할 수 있을까? 그런 움직임이 7일을 주기로 5일간 계속되고 2일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외계인들이 그 현상을 이해하려면 현대 자본주의와 직주(職住) 분리의 원칙 그리고 구약성서를 알아야 한다.” (p.82)



「804호 마법매미」.
연작 소설집인 책 전체를 하나의 미스터리로 만들어버리는 바로 그 단편 소설이다. 연인이었던 여자가 죽고 나서 자신 또한 자살인지 아닌지 애매한 상태로 죽은 젊은 작가의 이야기이다.


“... 《뤼미에르 피플》에 나오는 단편의 구조는 어떤 두 세계를 계속 대립시키는 것이거든요.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 부자가 사는 세상과 가난한 자가 사는 세상, 몸이 갇힌 사람과 마음이 갇힌 사람, 언어가 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 (p.127)


소설에서는 이 책을 본 유일한 사람으로 나오는 편집자에 의해 우리는 이미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을 오히려 넌지시 전달받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사실 이 소설집의 작가 장강명은 바로 소설 속의 죽은 젊은 작가가 되는 셈인데, 한 술 더 떠 이 작가에게는 아직 발표되지 않은 또 한 권의 책 《시간의 언덕, 현수동》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소설과는 상관없이 이러한 제목의 또다른 책이 우리들의 리얼 세계에 등장하게 될지, 라는 의문까지도 품게 만든다. 그리고 이 작가가 살던 집이 바로 뤼미에르 빌딩 804호이다.



「805호 돈다발로 때려라」.
803호를 배경으로 한 소설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온전한 동시성을 부여받는다. 소설은 2단으로 편집되어 한 페이지에서 왼쪽의 이야기와 오른쪽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804호에 대한 소설에서 편집자는 이 소설집이 서로 다른 두 세계를 계속 대립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중 부자인 사람들과 가난한 이들을 대립하여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죽음에서 실패한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과의 마주침으로 죽음에 이르는 부자인 사람의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이 모두 뫼비우스 띠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작가의 치밀함 안에서 절묘하게 얽혀 있다. 이 사건들이 벌어지는 공간이 바로 뤼미에르 빌딩 805호이다.



「806호 삶어녀 죽이기」.
‘삶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는 인터뷰 때문에 ‘삶어녀’라는 명칭으로 불리우며 인터넷 댓글 테러의 희생양이 된 여자, 그리고 이 여자를 돕기 위해 구성된 팀-알렙의 이야기이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인위적인 프레임이 갖는 힘을 보여준다. 팀-알렙이 둥지를 틀고 있는 곳이 바로 뤼미에르 빌딩 806호이다.



「807호 피 흘리는 고양이 눈」.
눈에서 피를 흘리는 병에 걸린 마티를 내다 버린 807호의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고, 그렇게 버려진 마티가 고양이들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인간의 세상만큼이나 치열하고 비열한 그곳에서 마티는 결국 자신을 복속시키려 하였던 두목을 죽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목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상처뿐인 승리, 그리하여 그 누구의 승리도 될 수 없는 야만의 세계를 보여준다.



「808호 쥐들의 지하왕국」.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하에는 거대한 어미 쥐가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어미 쥐는 쥐를 낳기도 하고 쥐에 가까운 인간을 낳기도 하고 인간에 가까운 쥐를 낳기도 한다. 그렇게 세대를 거듭할수록 어미 쥐가 낳은 쥐인간은 인간에 가까워지게 된다. 형 쥐와 함께 살고 있던 동생 쥐, 그리고 그 이후에 태어난 여동생 쥐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들이 사는 곳이 바로 뤼미에르 빌딩 808호였다.



「809호 동시성의 과학」.
기현이는 809호 만나투어 사무실의 삼촌을 종종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804호에서 첼로를 배우는 소녀를 만난다. 사실 <마법매미>에서 죽은 작가가 살았던 804호를 방문했을 때, 김기자는 방음이 되어 있는 그곳을 음악 연습실로 팔면 되겠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실제로 음악 연습실로 팔린 셈이다. 소설 속에서 계속 ‘동조하는 세계’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연작 소설집 안의 두 소설은 이렇게 동조하고 있는 셈이다.



「810호 되살아나는 섬」.
새홀리기에서 마리아 혹은 긴몰개로 이어지는 밤섬의 당주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와는 별개로 뤼미에르 빌딩 810호에 사는 이현수라는 청년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또한 이현수라는 인물은 <마법매미>에서 죽은 작가가 쓴 또다른 소설 《시간의 언덕, 현수동》의 출간을 허락해줘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소설집에 실려 있는 열 편의 소설은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기대고 있다. 단편 소설 하나 하나 보다는 이 모든 소설들을 엮고 있는 사슬이라는 매개에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이 어쩌면 이 소설집 전체를 아우르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작가는 2003년에서 2008년까지 신촌에 있는 르 ‧ 메이에르 3차 빌딩에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2008년에 마포구 현석동으로 이사를 하였다고 하는데, 소설집을 모두 읽고 작가의 말을 읽는 동안에도 독자는 현실과 소설 사이를 헤매게 될 수밖에 없다. 지독하다, 이 작가...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표백》에서 보여주었던 절묘함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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