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에세이

금비
- 작성일
- 2013.6.13
그리스인 조르바
- 글쓴이
-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열린책들
독서모임을 만들었다. 독서모임은 최근 4년 정도 품어온 나의 로망이었다. 올해 드디어 시작한다. 내가 주도했기에 첫 모임의 책도 내가 골랐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사 놓은지 1년이 넘었다. 의무감에 구입한 것이었다. 책꽂이에서 발견할 때마다 못다한 숙제의 느낌이 나서 얼른 제목에서 눈을 떼곤 했다. 그러고는 마음속으론 ‘읽어야지’하고 다시 다짐한다.
첫 독서모임 날짜가 잡히면서 내가 먼저 책을 선정했고 이미 정해놓았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토론하자고 했다. 두께에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이긴 했지만 다들 필독서로 찍어둔 책이긴 했는지, 아니면 가장 연장자인 내가 정한 책이라서인지, 아무튼 특별한 반대 없이 독서 토론할 책으로 정해졌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많은 사람들이 손에 꼽는 이유가 있을 거라며 이번에 단단히 찾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읽어나갔다. 헉, 그런데 초반부터 막히는 거다. 한국 소설에 익숙해서인가, 아님 현대소설에 맞지 않는 패턴이라 그런 것인가, 나만 이런 건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문자는 읽겠는데 맥락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란 인물이 뜬금없이 조르바란 인물과 함께 사업하러 크레타로 떠나는 설정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 계속 나아갔다. 읽다보니 서서히 적응이 되어갔다. 앞뒤 설명 없이 바로바로 직구를 날리는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익숙해졌다. 읽을수록 소설 형식이나 문체에 대한 껄끄러움이 사라지고 모난 구석들이 닳아져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조르바와 나의 크레타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조르바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자유, 해방, 방랑! 심지어 소설에서 가장 평온한 삶을 살았던 마을의 촌장 아나그로스티 영감마저 자살한 젊은 청년(파블리)의 자살을 부러워하지 않던가! 인생은 고통이라 말하던 그.
카잔차키스가 살았던 시대, 20세기 초반의 그리스를 생각해본다. 그러나 그리스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한계는 분명 있다. 크레타와 터키의 전쟁을 알 리가 없으며 그로 인한 여러 상흔들까지 공감하긴 힘들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학 자체를 접해본 경험이 없기에 그리스 문화를 들먹이는 용어들에 생소함부터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카잔차키스의 자전적 소설이니만큼 소설 속 화자인 ‘나’도 카잔차키스임에 분명한데 실제 조르바 같은 인물이 존재했을 것이란 역사성에 우리는 안심하는 것이 아닐지? 조르바는 ‘나’와 완전 대조되는 인물이다. 정신세계의 정진을 추구하는 나, 고차원적 세계에 대한 이상을 품은 나, 그래서 이상적인 공동사회 건설이 목표인 나, 금욕주의의 절정을 보여주는 나, 그것을 보다 못한 조르바의 잔소리, 그의 눈엔 ‘나’가 펜대 운전자 또는 지랄병이 도진 사람으로 밖에 안 보인다. 조르바는 예순이 넘는 인생을 살면서 내린 결론, 조국도 필요 없고 돈도 필요 없고 오직 현실에 충실하고 본능과 야성에 이끌려 자유롭게 누비는 것이 최고라고 본다. 쾌락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그 어떤 명함을 갖다 부쳐도 조르바는 거부할 것 같다. 조르바란 인물에 대한 정의 따윈 내리지 말고 느낌 오는 대로 그런 사람이겠거니, 하고 평가하라 할 것이다. 짐승과 인간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 얇은 막 사이로 오가는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면 부아가 치민다. 그럴 바에 차라리 다 드러내놓고 즐기자. 여자, 음식, 술, 춤, 산투르. 그리고 자유를 즐기자. 질서, 도덕, 공동체, 사람들이 만든 구속거리(꺼리)에서 벗어나면 세상이 새로이 보이고 ‘나’도 다시 태어난다.
카잔차키스가 젊은 날, 딱 내 나이 서른다섯에 만난 조르바와의 여행. 삶은 여행이라고 그러지들 않는가. 비록 서사적 스펙터클은 없는 소설이지만 카자차키스가 고뇌했던 것들이 이 책에 함축적으로 다 담겨있는 것 같다. 철학과 사유를 뭉뚱거려 놓고 ‘나’란 화자를 독자로 치환시켜 놓는 절묘한 기술을 부린다. 내 곁에 조르바가 있는 듯한 착각. 그의 마술에 끌려 나도 어느새 부화하여 나비가 되어 훨훨 난다.
‘나’에겐 탄광 개발이 목적이 아닌 도피와 수행의 여행길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함께 한 동반자, 길동무 조르바. 그리고 ‘나’의 멘토나 다름없는 존재가 된다. 갈탄 갱도를 파가는 조르바와 정신적 갱도를 파나가는 ‘나’의 역학관계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결국 현실의 갱도와 정신의 갱도가 무너짐으로써 ‘나’는 새로운 나로 태어난다.
이 책은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삶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존재에 대하여, 삶의 방향에 대하여. 그게 이 책이 위대한 고전으로 남아 있는 이유란 생각이 든다. 카잔차키스의 존재감이 21세기에 아직도 선명하게 통하는 이유다. 온갖 종교적 색채와 전쟁, 인간의 속물적 근성을 다 드러낸 소설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흠칫 놀라면서도 조르바의 외침에 금세 동화된다. 굉장히 마초적이고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소설이기도 해서 남자들에게 특히 잘 맞을 소설이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선 인간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묻고 답하는 깊이 있는 소설임엔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에겐 아직도 ‘필독서’란 개념이 존재하는 것이다.
- 좋아요
- 6
- 댓글
- 20
-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