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카테고리
세균맨
- 작성일
- 2015.9.7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상)
- 글쓴이
- 마가렛 미첼 저
열린책들
어렴풋이 기억나는 영화의 몇몇 강렬한 장면 때문에 책 안에 이토록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광활하게 펼쳐질지 전혀 몰랐다. 그 기억이란 스칼렛이 어멈의 도움을 받아 코르셋으로 허리를 더 가늘게 조이거나 레트 버틀러의 품에 안겨 허리를 젖히며 진한 키스를 나누는 것일 게다. 잘 알려진 초반부보다 생존을 위해 최상류층 숙녀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그 어떤 남성보다 적극적이고 계산적으로 변모하는 여성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종종 ‘나는 사막에 홀로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농담을 하곤 하는데, 스칼렛 오하라에게는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다. 스칼렛은 숙녀는 무기력하고 보호받아야하는 존재라는 전통 안에서 양키들과 거래를 하고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 되어 사업을 확장해 돈을 벌고 농장 ‘타라’를 지키기 위해 물불을 안 가린다. 수근거림과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했던 그녀가 우리 시대에 살았다면 성공한 여성 CEO라고 높이 평가받았을 것이다.
스칼렛을 중심으로 한 사랑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루기는 하지만 시대적 배경을 이루는 남북전쟁 전후 상황의 혼란과 황폐함, 궁핍과 고통, 갈등과 불안이 상당히 밀도 있게 그려진다. 이 소설을 3년간 썼다는 마거릿 미첼은 남북전쟁과 관련된 자료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찰스턴에서는 인종주의 갈등 때문에 사고가 심심찮게 나고 있는데 노예제도 때문에 전쟁을 치른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분노와 증오가 사회를 뒤덮었겠는가. 지은이는 목화왕국, 노예제도, 주권, 못된 양키 따위의 편견과 증오에 가득한 관념 안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남부인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여준다. 물론 우리의 단순하고 무식한 스칼렛은 전쟁이나 타인에게는 관심도 없고 사랑이든 돈이든 자신이 ‘쟁취’해야 하는 것에만 눈을 번득인다.
목화를 키워내는 타라농장의 붉은 흙은 스칼렛을 닮았다. 초록색 눈빛에 살짝 올라간 눈꼬리와 보조개로 화사한 미모를 뽐내며 응석받이로 자란 열다섯의 스칼렛은 이웃의 수많은 남자들에게 구애를 받는다. 항상 똑같고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뻔히 보이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스칼렛은 남자의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변화무쌍한 매력을 지녔다. 그러고 보니 [순수의 시대]에서도 아처는 뉴욕에서 가장 아름답고 인기 있는 메이와 약혼을 하고서도 격식을 파괴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올렌스카 백작부인에게 매혹당한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순응하는 여자에게 지루함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소설속의 남자들만이 개성 있고 색다른 매력을 지닌 여성을 좋아하는 걸까? 아무튼 스칼렛은 정력적이고 천하고 속된 면을 지닌 아일랜드인 아버지의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았지만 로비야르 귀족인 어머니의 엄격하고 끈질긴 훈육덕분에 숙녀의 겉치레를 하고 있다. 그녀의 푸념은 쾌활하고 거침없는 성격을 잘 보여준다.
“난 한없이 부자연스럽게만 행동하고 하고 싶은걸 전혀 아무것도 못하는데 지쳤어요. 난 새 만큼밖에 먹지 않는 듯 행동하고 뛰고 싶은데도 걷고 이틀 동안이나 춤을 춰도 전혀 피곤하지 않는데도 왈츠를 추니까 어지럽다고 거짓말 하는데도 지쳤고요. 난 머리가 내 절반밖에 깨지 않은 남자들을 속이거나 ‘당신은 정말 훌륭해요’라는 소리를 하기에도 지쳤고 남자들이 나한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으쓱해지라고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는데도 지쳤어요.”
스칼렛은 열두참나무집의 애슐리가 사촌 멜라니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질투로 불타오른다. 두 사람이 결혼발표를 하는 모임에서 애슐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무참히 거절당한 후 분노로 꽃병을 던져 깨뜨리다가 모든 것을 목격한 레트 버틀러와 처음 만나게 된다. 스치는 만남이었지만 이때 레트는 스칼렛의 본질을 꿰뚫어본다. 나는 처음에 스칼렛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랑이 맞나? 모든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볼품없는 여자와 느닷없이 결혼발표를 한 애슐리에게 더 애착을 갖게 되고 이후로도 자기 암시를 통해 계속 애슐리를 사랑한다고 믿으며 마음을 키워나간 것을 아닐까 하고 말이다. 시, 음악, 독서를 좋아하고 꿈꾸듯 살아가는 애슐리 집안은 남부인의 기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정중하게 거절하는 애슐리의 모습에서 스칼렛 혼자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애슐리 역시 스칼렛에게 전혀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생명력이 강하고 결이 너무 다른 스칼렛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스칼렛은 멜라니의 오빠 찰스와 홧김에 결혼을 결정한다. 돈이 많은 찰스와 결혼해서 화려한 생활을 뽐내고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들을 상심하게 하고 자신을 비웃은 여자들을 약 올리고 싶었던 그녀다. 무엇보다 애슐리가 질투하게 만들고 싶었을 테고.
남부가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기에 스칼렛은 두 주일 만에 결혼을 하고 두 달 만에 미망인이 되고 임신까지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된다. 미망인에게 더욱 엄격함을 요구하는 보수적인 사회에서 권태와 답답함을 느끼던 스칼렛은 시고모 피티와 멜라니가 살고 있는 애틀랜타를 방문한다. 그녀는 사람으로 붐비고 분주하고 어딘가 흥분의 양상을 띠는 애틀랜타가 ‘자신의 땅’이라고 느낀다. 스칼렛은 멜라니에 대한 질투와 혐오를 억누르고 병원부인회의 간호봉사를 억지로 하고 레트 버틀러와 교류하고 간간이 애슐리의 편지를 훔쳐본다. 스칼렛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만 잔뜩 써놓은 편지에서 애슐리는 전쟁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고 패배를 예상한다. 모든 남부인들이 전쟁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하지만 레트 역시 애슐리와 의견을 같이 한다. 하지만 마지못해 전쟁에 참여하는 애슐리와 달리, 그는 전쟁을 통렬하게 비웃으며 돈벌이를 한다. 지배계급은 질이 떨어지는 군수품하청으로 이익을 취하고 투기업자가 들끓는데, 봉쇄선을 뚫고 물품을 보급하는 레트도 그들 중 하나다. 지은이는 레트의 입을 통해 ‘문명을 일으킬 때 못지않게 문명의 파괴에서도 큰 돈벌이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레트는 스칼렛이 숙녀답지 않다며 약을 올리고 놀리면서도 자주 방문하고 선물을 안긴다. 그러면서도 구애의 행동은 하지 않고 다른 남자처럼 쉽게 넘어오거나 굴복하지 않아 스칼렛을 화나게 만든다. 그녀에게 레트는 같이 있을 땐 화가 불쑥불쑥 치밀어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다가도 기다려지는 남자다. 레트는 냉소적이고 짓궂은 농담을 하면서도 ‘당신이 너무나 어리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며 스칼렛에 대한 마음을 드러낸다. 이후에도 레트와의 인상적이고 강렬한 장면은 여러 번 나온다. 어두운 밤 포치에서 스칼렛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를 원했고 어떤 여자보다 더 그녀를 원하고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말하는 장면. 불길을 뚫고 나온 어두운 길에서 그녀와 일행을 버리고 떠나면서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진한 키스를 나누는 장면. 스칼렛이 타라농장을 구하기 위해 레트와 결혼을 계획하고 한껏 꾸미고 나타나서 거짓말을 늘어놓았지만 손에 키스하는 레트에게 목화를 심고 밭을 매느라고 생긴 굳은 살과 갈라진 손톱을 들켜서 망신당하는 장면, 질투로 불타오른 레트가 격정적으로 스칼렛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 등등....
철저한 남부인의 시선으로 남부와 양키를 이분법으로 그려 비판을 받았다지만, 전쟁을 관통하며 아픔을 겪고 수많은 혼란과 갈등이 드러나는 조지아주의 모습은 남북전쟁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 상류층의 삶을 살다가 굶주림과 가난을 겪으며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이고 계산적이 되어가는 여성과 엇갈리는 두 남자와의 관계를 다룬 스토리와 입체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는 책 속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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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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