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날來

싱긋
- 작성일
- 2015.10.21
오이디푸스 왕 외
- 글쓴이
- 소포클레스 저
을유문화사
<이야기의 힘>을 주제로 오이디푸스 왕을 다룬 강연이 있어 일체의 망설임 없이 다녀왔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춰볼 때 삶을 사유하고 철학에 관심 있는 남성 독자들은 이 비극에 전율하는 듯하다. 여성 독자가 캐치 못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비밀스런 성애가 그들을 장악하는 건지, 서구 남성의 에고가 투영된 영웅서사에 열광하는 건지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어서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다른 자리에서 토론해보고 싶다.
강연을 듣고 다시 펼친 오이디푸스 왕은 왕의 면모보다는 지극히 독선적이고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분노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성격장애를 보였다. 진정 내가 누구인지, 그 본질적인 정체와 근원적인 뿌리를 파헤쳐가는 여정이 그리 이상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늘은 이전의 그(최고의 행운아)가 사망처리되고 불운아로 태어나는 이중의 날이다. 전락과 파멸의 날이자 처형의 날인 것이다.
아아, 아아, 지금 모든 게 분명해졌구나. 오 빛이여, 내가 널 바라보는 게 마지막이 되기를. 나란 인간은 태어나선 안 되는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함께 결혼해선 안 되는 사람과 결혼했으며, 죽여서는 안 되는 사람을 죽였구나. (1182-1185)
예전에 읽을 때도 그랬지만 한 나라와 역사의 관점에서 오염된 땅과 (왕위계승) 계보를 정화하는데 온 에너지를 쏟고 있다. 과거가 청산되고 새시대를 여는 것으로 극이 마무리됨과 동시에 두 딸이 불모에 처할 운명이 통탄스럽게 논해진다. 마치 새 역사의 지평을 열고 지난 시절의 그릇됨을 바로잡고자 펼쳐지는 제물 의식 같다. 오이디푸스 왕의 두 눈에서 흐르는 피와 아내이자 어머니의 죽음을 제물로 오염된 역사를 정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 비극은 나는 누구인지를 골똘히, 심연까지 파고들어 진정한 앎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상화되기도 한다. 또 위인의 운명적인 전락을 통해 그 누구도 불행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공감과 연민을 일으키며 인생사에 걸친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하지만 개인의 운명을 담보로 국가적 시대적인 분쟁을 해소하고 안정과 평화를 도모하는 정치성이 밑바탕에 진하게 깔려있다. 이보다 더 절망적인 몰락은 없다고 보여줌으로써 각자의 삶에 안도하고 심지어 만족하고 감사하도록 이끄는 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날을 볼 때까지 기다리고, 인간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하오. 그가 고통을 겪지 않고 삶의 경계를 지나갈 때까지는. (1528-1530)
고대 그리스인의 정서와 가치관에 대해 문외한인 관계로 더 자세히 분석할 수 없지만, 이 텍스트는 분명 개인이 처한 환경 넘어 정치적이고 성공적인 야망을 움켜쥐려는 욕망과 집착으로 들끓는다. 성으로 무언가를 가르는 게 구태의연한 처치가 되는 현재이지만 여성 역사학자나 신화학자가 비극사를 쓴다면 오이디푸스 왕은 관외로 치거나 새로이 조명될 게 분명하다. 끝으로, 강연자였던 김수영 교수님이 마지막 자료화면에 띄운 Good Luck이라는 말이 계속 마음에 여진을 일으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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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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