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리뷰

ena
- 작성일
- 2015.11.8
자유는 진화한다
- 글쓴이
- 대니얼 데닛 저
동녘사이언스
자유의지가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는 참 곤란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내가 자유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나의 행위는 과연 무엇이며, 또 나는 과연 무엇인지가 답하기 곤란해질 것 같다. 그러나 어찌 생각해보면, 내가 과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즉 내 행동과 생각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쪽으로도 명확히 손을 들어주기가 곤란한 것은 나의 무지 때문이기도 하고, 또 어쩌면 약간의 지식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행동을 스스로 의식하기 전에 이미 행동을 한다는 것을 밝힌 유명한 실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거기서 자유의지 존재에 관한 논쟁이 또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를 쓴 샘 해리스 같은 경우엔 아예 『자유의지는 없다』란 제목의 책을 낸 바가 있다. 물론 후자의 책은 읽지는 않았다(그 이유는 전자의 책을 읽고나서 그의 수준을 짐작할 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없다고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만약에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유연한(!) 행동들과 나의 복잡한(!) 생각들이 전혀 나의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억울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의식도 물리적 실체를 갖는 뇌의 작용임을 굳게 믿고 있는 일종의 유물론자로서, 그 의식의 원천인 뇌, 그리고 세포 등등으로 내려갈수록 물리적으로 ‘결정’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데, 그 까닭으로 쉽게 “자유의지는 있다!”라고 외치기에 꺼려지는 것이다.
좀 장황하게 펼쳐놓았지만, 이것은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관계에 관한 문제다. 세계가 물리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과 세계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무한대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쉽게 절충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것이다. 나는 과학을 하는 입장에서 진화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물리학의 원리를 (잘은 모르지만) 분명히 이 세계를 관통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면에서 결정론자다. 하지만, 여전히 내 노력과 의지에 따라서 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엄연히 자유의지가 존재함을 믿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혼란스러울 수 밖에.
대니얼 데닛이 손을 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나섰다. 그는 결정론과 자유의지 사이에 다리를 놓고 있다. 그 다리는 우선 결정론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놓여지기 시작한다. 그가 정의하고 있는 결정론은 운명론과 다른 것이다. 과거의 조건으로부터 결정되는 현재는 단 하나 뿐이지만, 현재에서 볼 때 미래는 단 하나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대니얼 데닛이 정의내리고 있는 결정론이다. 즉, 뇌도 역시 물리법칙에 의해서 완벽하게 지배를 받기 때문에(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당연히 뒤의 논의를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우리는 결정론적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유의지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대니얼 데닛의 논증이다. 그 논증을 다 따라가기에는 벅차지만, 이해한 대로 표현하자면, 전적으로 법칙인 진화에 의해서 물질적으로 형성된 인간의 뇌는 자유의지를 갖도록 진화했다는 것이다. 즉 자유의지는 객관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독특한 특징, 혹은 성취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리 놓기를 통해서 대니얼 데닛은 결정론에 기대어 그릇된 행동까지도 이미 정해져 있는 행동(어쩔 수 없는 행동)이라며 그 책임까지도 벗어던지려는 시도에 대해서 못을 박고 있으며,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그 자유의지가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무한의 자유를 얘기하는 방종에 대해서도 선을 긋고 있다. 또한 결정론적 세계에서 자유의지를 진화시킨(물론 그게 능동적인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인간에 대한 경외까지도 겯들이고 있다.
아기 코끼리 덤보는 스스로 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친구 까마귀의 묘안이 없었다면 날 수 없었을지 모른다. 또한 회의주의자인 까마귀가 친구 까마귀의 속임수(?)를 폭로해버린다면 역시 덤보는 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회의주의자 까마귀가 속임수를 폭로하든, 폭로하지 않든 코끼리 덤보가 날 수 있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다(결정론). 그러나, 실제로 날게 되는 것은 코끼리 덤보의 행동이다(자유의지). 회의주의자 까마귀는 아무런 죄가 없다. 오히려 진실을 밝혔을 뿐이다. 그가 진실을 밝혔다고 코끼리 덤보의 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는 걸까?
* 근데 절대 책이 쉽지 않다. 철학자인 대니얼 데닛이 글을 철학적으로 써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문구 하나하나를 따라가면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녹록하지가 않다. 사실은 그래서 한번은 중간쯤까지 읽다 포기했던 책이다. 그래도 다시 읽으니 뭔가 알겠다. 한번 더 읽으면 더 나아지긴 할 거다. 하긴 공부란 게 그런 것이기도 하고, 독서란 게 그런 것이기도 하다. 나 스스로에게 위안을 준다.
(201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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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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