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
게스
- 작성일
- 2015.11.20
달의 궁전
- 글쓴이
- 폴 오스터 저
열린책들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그 해 여름이었다. 인간이 달 위를 걸을 때, 그의 달은 몰락하고 있었다. 박스로 이루어진 집을 상상해본다. 그 박스에는 이 세상 자신을 사랑하는 마지막 혈육이 사랑했던 책이 한 가득 들어있다. 그 박스를 남기고 조금씩 조금씩 몰락해가던 외삼촌 빅터는 기어이 완전히 몰락했고, 세상을 등졌다. 이 넓디 넓은 세상에, 거칠고 험한 세상에 아무 피붙이 없이 혼자 남겨진다는 것에 대한 복수로 선택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날개도 없이 추락하는 것, 스스로 몰락해가는 것. 완전하게 무기력해지는 것. 맨 끝까지 그렇게 가보는 것. 그것 말고는 없다. 그가 몰락해가는 과정은 일반적인 눈으로 본다면 정말이지 도통 이해가 안되는 과정이지만, 독자는 너무나도 깊이 주인공 포그에게로 감정이입을 한다. 그리고 더욱 더 처절하게 자신을 몰락의 끝으로 몰아부치고 극기야는 추락을 결심하는 것같은 행동을 이해할 것 같다. 혼자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리라.
빅터삼촌이 남기고 간 책 상자들은 의자가 되고, 침대가 되고 테이블이 되고, 그리고 밑둥까지 내어주는 나무처럼 아낌없이 주는 단 하나의 의지가 된다. 책이 담긴 박스들은 그에게 삼촌이 남긴 사랑이었다. 아버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일찍 사고로 죽었지만, 엄마가 남긴 유산과 뭔가 그와 통하는 듯한 천재 외삼촌은 그런대로 그를 바르게 성장시키고 대학 교육에까지 이르게 했다. 작정하고 잉여인간이 된 포그는 책을 팔아 생활을 유지한다. 책이 없어진다는 것은 외삼촌의 흔적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 흔적이 없어지면서 그가 살던 아파트의 책상자 가구들 역시 점점 없어져간다. 헌책방 주인은 교묘하게 책값을 낮게 쳐주고, 마지막 책을 모두 팔아치운 후 그의 거처는 센트럴 파크로 옮겨진다.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고 비를 맞으며 한데서 자는 중에도, 가끔 친절한 청년들을 만나면 먹을 것을 얻어먹기도 하는 노숙자의 생활에 인이 박힐 무렵에 다 죽어가는 그를 찾아낸 사람이 있었다. 포그는 단 한번의 인연으로 그를 잊지 못하고 세상을 뒤져 자신을 찾아내고 후에 연인이 된 키티 리를 만난다.
이제 노숙자 생활을 접고 충만한 사랑으로 새 삶을 살아가는 포그, 그의 철없던 방황은 끝난 것일까. 여기서부터 또다른 비극과 또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나는 에핑이라는 괴팍한 노인의 집에 돌보미로 들어가서 생기는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이야기, 또 하나는 아름다운 청춘에 새긴 키티 리와의 사랑과 열정과 이별 이야기. 키티 리의 등장으로 로맨틱한 스토리가 전개되나 기대했던 독자에게, 열병같은 사랑은 만남 그 자체보다 헤어짐의 방식을 더욱 애닯게 한다. 사랑하는데 함께 같은 곳을 볼 수 없는 두 사람. 둘은 너무 달랐던 것이다. 외롭고 고독하게 자란 포그에게 새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슴 벅찬 설레임이다. 이제 막 날개를 펴기 시작한 댄서 키티 우에게 새 생명은 인생의 파멸을 의미한다. 뜨겁게 사랑했던 남녀는 조금도 여자 몸 속에 자라나기 시작한 생명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한다. 잉태된 생명은 어미의 뱃속에 있고, 포그는 한줄기 빛도 못본채 지워버린 생명에 대한 집착으로 키티 리를 용서하지 못한다. 심리 모사가 어찌나 탁월했던지...
에핑과의 우연은 결국 아버지를 만나기 위한 필연으로 결론지을 수밖에 없는데, 출생의 비밀에 맞닥뜨린 이 가엾은 젊은 청춘은 또다시 자신을 고립시키는 선택을 한다. 그러나 처음의 고립과 두번째의 고립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제 그는 더이상 숨쉬기 운동과 굶기 작전으로 시간을 때우지 않는다. 그를 처음부터 힘겹게 했던 출생의 근원지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폴 오스터는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우연적인 요소를 우리는 크고 작은 우연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라고 이야기했던 걸로 기억한다. 우연은 우주를 창조했고, 지구상의 생명을 창조했고, 오늘날의 인간을 만들어냈다. 부자가 눈멀고 괴팍한 노인의 죽음을 통해 만나는 것 쯤은 사소하다.
폴 오스터는 외롭고 고독한, 방황하는 20대 청춘의 정서적 등가물로 달을 선택하였다. 달... 달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 해 방황하는 은둔자 포그가 노숙자로 전락하던 시기에 미국을 환히 비추던 달은 미국의 미래였다. 그 달 아래에서 포그는 유일한 혈육을 잃었으며, 방황했다. 달빛은 세상 구석구석까지 스미지 못했다. 방황이 끝나고 사랑이 끝나고 인생의 비밀이 벗겨지고, 또다시 충격 가운데 서게 된 포그. 달의 궁전은 그가 그렇게 어두운 달빛 아래 발견된 자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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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