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녀
  1. 독서 후기 -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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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표기
연애 소설 읽는 노인
글쓴이
루이스 세풀베다 저
열린책들
평균
별점9 (56)
문학소녀

수 년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작가가 칠레 출신이지만, 피노체트 독재를 피해 도망하고,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고, 결국엔 독일로 이주하며 살다가 발표한 첫소설인데, 세계적으로 히트를 쳤다.

처음 읽을 때도 책을 놓지 못하고 한 번에 쭈욱 읽어냈던 기억이 있다. 어찌나 생생하고 정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던지...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동물들과, 그 동물들처럼 순응하고 사는 원주민들, 오로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나 개발의 대상으로만 아는 일명 문명인들의 부딪침 속에서 사건, 사고는 일어난다.

 

적도지방인 엘 이딜리오에 사는 노인 안토니오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젊어서 이 곳에 이주했지만, 말라리아로 부인을 잃고 혼자서 살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정글의 원주민이라고 볼 수 있는 수아르족과 친구가 되고, 오랜 시간 그들과 함께 하며 정글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되지만, 또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그들과 헤어지게 된다. 두 달에 한 번쯤 마을에 들어오는 까칠한 치과의사 루비쿤도 로아차민은 노인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연애 소설을 원하는 노인에게 책을 구해다 주며 둘은 나름 친구가 된다. 엘 이딜리오에는 문명인의 대변인쯤 되는 거만하고 자존심 강한 뚱보 읍장이 있고,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는 마을 사람들이 있고, 이곳에 사냥이나 개발을 위해 들락 거리는 백인들이 종종 있다.

사건은 수아르족이 동물에 찢겨서 죽은 백인의 시신을 정글에서 가져다 주면서 시작된다. 읍장은 수아르족의 행위라고 무조건 몰아붙이지만, 노인은 하나하나 시신의 상태를 점검하며 근거있는 말로 설명하고, 시신의 짐까지 수색하여 암살쾡이의 짓임을 밝혀내고, 또한 암살쾡이가 왜 백인을 죽였는지도 알아내며, 암살쾡이가 인간 모두를 공격할 것임을 예견한다. 그리고... 수색대와 암살쾡이와의 싸움...

 

현기증을 느끼며 급히 몸을 일으킨 노인은 낫칼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며 고개를 들었다. 언덕 위에는 암살쾡이가 꼬리를 꼿꼿이 세운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마치 밀림의 미세한 소리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작은 귀를 움직이는 짐승을 향해 소리쳤다.

"왜 주저하고 있지? 도대체 네놈이 바라는 게 뭐야?"

노인은 풀밭에 떨어진 엽총을 재빨리 집어 들며 손가락을 방아쇠를 갖다 댔다. 그 정도 거리면 실패할 확률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암살쾡이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럴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일순 그 짐승은 앞발을 들어 올리며 슬프고 지친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또 다른 짐승의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이번에는 수컷의 울음 소리였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수컷은 암컷보다 몸집이 작았다. 그 짐승은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통나무를 보호처로 삼아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뼈에 달라붙은 등가죽과 가죽 밖으로 드러난 살점을 보고 있는 사실 자체가 가슴 아픈 일이었다.

"네 놈이 원하는 게 이거였단 말이지? 나에게 끝장을 내달라고?"

그러나 암컷은 어느 틈에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170p.~171p.

 

소설은 도저히 책을 손에서 놓게 만들지 않는다.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상상의 그림을 그리게 만들고, 숨막히는 노인과 암살쾡이의 대치는 생생하게 실감이 나도록 그려지고 있다. 노인은 인간이면서 자연이고, 글을 읽는 문명인이면서 수아르족에서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배운 야만인이기도 하다. 그 어느편도 아닌, 중도에 서 있다. 예전에도 재밌게 읽었는데, 다시 읽는 맛도 어쩜 이렇게 재미있는지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명작은 끝까지 명작인가...

노인의 책을 읽는 자세, 책을 바라는 자세 또한 우리에게 독서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적자생존만이 있는 정글과 책이 전혀 안어울려 보이지만, 자연에 느리게 순응하며 사는 삶에 책이란 노인의 무료한 삶에 한 줄기 단비처럼 기쁨이 되고, 위안이 되어 준다.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차례대로 반복하는 노인의 책읽기 방식은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러기에 그에게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돋보기가 틀니 다음으로 아끼는 물건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45-46p

 

나는 어떻게 책을 읽고 있는지 돌아보았지만, 솔직히 일정치가 않다. 한 번에 밤을 새워서 스트레이트로 쭈욱 읽기도 하고, 부분부분 읽기도 하고, 떄로는 이 책, 저 책 궁금할 때마다 기웃거리기도 하고... 도대체가 일관성이 없는 나의 독서방법이 갑자기 부끄러워지는 부분이다.

책이 귀하기에 노인은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여기며 음절음절을,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깨달을 때까지 읽는데... 나에겐 책이 너무 흔해서 일까, 도저히 노인의 방법을 따라갈 자신은 없다. 정글에서 노인처럼 느리게 읽는 방식,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체화하는 방식... 가끔은 따라해 보고 싶기도 하지만, 역시 그럴 자신은 없다. 아마 시험이나 과제작성 때문에 공부할 때 그렇게 해본듯... 노인의 책읽기 방식... 한 번쯤 돌아보고 따라해 보고 싶은 방식이다. 하지만 나의 책읽기 방식이 노인과 다르다고 해서 내가 책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책을 무지무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나인데... 음... 사랑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라고 나는 주장한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틀니를 꺼내 손수건으로 감쌌다. 그는 그 비극을 시작하게 만든 백인에게, 읍장에게,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에게, 아니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하는 모든 이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낫칼로 쳐낸 긴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한 채 엘 이딜리오를 향해, 이따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 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180p.

 

아마존의 정글과 연애 소설 읽기... 어쩌면 자연의 삶과 사랑하는 이야기... 바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얘기기에 전혀 안어울리는 게 아니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얘기라는 생각이 든다. 연애를 하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다 사람의 일이며 자연의 일이며 순리가 아닌가.

책의 전반에 걸친 노인과 암살쾡이의 대결 구도도 결국 자연의 일이다. 자연의 일에 방해를 하면 안된다. 자연의 일은 지구의 일이고, 지구의 일은 곧 인간의 일이기도 하다. 지구의 일을 방해하지 말라던 동시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짧은 소설이었지만, 강렬하고, 박진감 넘치고, 피비린내가 나지만 평화를 지향하는 소설... 몇 번을 읽어도 절대 손을 놓을 수 없는, 결과를 아는데도 중도에 접을 수 없는 마력과 매력을 지닌 정말 멋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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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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