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녀
  1. 독서 후기 - 에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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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100쇄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글쓴이
폴 칼라니티 저
흐름출판
평균
별점8.9 (541)
문학소녀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라.

---------------------------

브루크 풀크 그레빌 남작

(카엘리카 소네트 83번)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태어나는 순서는 있어도 죽는 순서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병으로 인해서 "당신의 삶이 얼마 안남았습니다."라는 진단을 받는다면,

어차피 언젠가 죽을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더라고 그 느낌이 달라질 것이다.

죽음... 늘 우리 곁에 있지만, 결코 친하고 싶지 않은, 왠만하면 좀 멀리 떨어지고 싶은 삶의 이면.

특히 가까운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 지면서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처음엔 슬픔과 아픔을 느끼지만 차츰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고,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하루하루에 더 최선을 다하게 된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게 우리들이다.

 

폴 칼라니티는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문학, 과학, 생물학, 철학 등에 관심을 갖다가

의대대학원에 진학하게 되고, 모교인 스탠포드에서 레지던트와 연구원으로 일하게 된다.

원래 똑똑하고 성실한 그였기에 신경외과학회에서 최우수 연구상도 수상한다.

다른 의사가 수술하다가 실수할 뻔 하는 것도 바로 달려들어서 제대로 마무리를 짓는 의사였고,

역시 의사인 아내와 사랑하며 평범하게 사는 남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폐암진단을 받고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어떻게 할까... 암처럼 불치의 진단을 받은 보통의 사람들의 심리상태는 5단계로 나뉜다고 한다.

그럴리가 없다고, 아마 오진일 거라고 부정하는 첫번째 단계.

왜 하필 나여야 하냐고 화를 내고 억울해하는 분노하는 두번째 단계.

5년만 더 살았으면, 아이가 학교갈 때까지만 더 살았으면하며 타협하는 세번째 단계.

아무것도 하기싫어 지며 완전 무기력해지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우울해 하는 네번째 단계.

모든 것을 인정하고 차분해지며 오히려 치료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수용하는 다섯번째 단계.

폴도 역시 이런 단계를 거치지만, 그는 우울 단계를 뛰어넘어서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을 뿐 아니라,

끝까지 의사로서의 업무에 충실하게 임한다.

또한 의사의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는 갓태어난 딸을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독서량도 엄청났고, 영문학을 전공했었던 그였기에 글은 정말 깔끌하고 솔직하며 아름답다.

암이 걸린 것을 알고 그의 아내는 임신을 원하고 인공수정을 통해서 딸을 낳는다.

그리고 폴은 사랑하는 딸 케이디를 위해서 이 책을 남긴 것이다.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가정으로 돌아가서 가족친지들 곁에서 죽음을 맞은 폴의 모습이

대단하기도 하고, 내가 지향하는 모습이기도 해서 안타깝기도 했지만 이상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이 마무리되질 못하고 폴은 떠나게 되는데, 그것을 아내인 루시가 마무리한다.

루시 또한 끝까지 폴의 곁에서 용기를 주고, 딸 케이디와 함께 그 곁을 지키는 대단한 아내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아프고, 울컥하고, 실력이 아깝고, 경력이 아깝고, 열정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 읽고 나니, 그 어떤 것보다 아내와 딸을 사랑하지만 너무 짧게 있다가는 그의 생애와

서른 여섯이라는 젊은 나이가 정말 아까웠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231p.

 

 

폴의 마지막 글을 읽으며, 눈부시게 환하게 웃는 가족사진을 보며 결국 왈칵 눈물을 쏟았다.

불치병이나 죽음을 앞에 둔 부모라면 누구라도 어린 자식 앞에서 하고 싶은 얘기일 것이다.

만약에 내가 루시의 입장이었다면 남편이 불치병인데 일부러 아이를 가졌을까...

남편을 닮은 아이를 원해서, 혹은 남편에게 삶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겠지만, 잘 모르겠다. 결국 혼자서 키워야할 것을 생각하면 결정이 쉽진 않을 것이다.

이런 용감한 결정을 한 루시가 정말 존경스럽다.

 

I can't go on.  I'll go on.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거야.

  --- 사무엘 베케트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자> 중에서     180p.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인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이 문구는 암을 진단받고 난 후의

폴 칼라니티의 삶을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다. 계속 나아갈 수 없지만 계속 나아가는 삶...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서 삶을 포기하지 않는 폴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죽음을 선고 받고 나면 그 때부터 이미 죽은 사람처럼 되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폴은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결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정말 죽기 전에는 죽은 것이 아니다... 이 모순 같은 말 속에 폴의 의지가 들어있다.

그리고 정말 죽음이 찾아왔을 때, 편안하게 맞이하는 모습... 우리들이 바라는 궁극의 모습이 아닐까.

폴의 마지막 모습이 아프게 그려지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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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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