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나하
- 작성일
- 2016.12.5
이반 일리치의 죽음
- 글쓴이
- 레프 톨스토이 저
문예출판사
사람들은 톨스토이에게 '대문호'라는 수식어를 붙입니다. 아직 그의 소설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이번 소설을 읽으며 그가 정말 대문호라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이리도 잘 설명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최고였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적절한 상황으로 설명했거든요.
이 책은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세 편을 담았습니다. 죽음을 다룬 최고의 명작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죄의 문제를 다룬 <악마>, 신앙의 문제를 다룬 <신부 세르게이>. 이 세 편의 소설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런데 또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주제들이 서로 연관되어, 한 권의 책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 소설을 모두 읽고 나니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사유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 소설은 장례식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슬퍼해야 할 장례식이지만 왠지 사람들이 이상합니다. 이반 일리치의 지인들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올 득을 계산합니다. 그가 죽었으니 그의 자리가 빌 테고, 자신이 승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장례식 때문에 저녁에 카드게임을 못할까 봐 걱정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의 죽음으로 받게 될 연금을 계산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토록 계산적일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자연적으로 그의 죽음에 나를 대입했습니다. (묘비를 만들진 않겠지만) 내 묘비엔 어떤 글이 적힐까? 아내와 자식들은 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직장 동료들, 친구들, 지인들은 내 죽음에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까? 저는 대체로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이반 일리치처럼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절망적이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죽음 이후를 생각해본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 테니까요.
<악마>
이 소설은 죄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리고 독특하게 결말이 두 개입니다. 뭐, 두 결말 모두 불행으로 끝나지만, 암튼 두 개. 이 소설 주인공은 젊은 욕정을 참지 못하고 한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릅니다. 아주 잠깐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결혼 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 유부녀가 그 앞에 나타납니다. 그러자 그는 과거가 떠오르고 다시 욕정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결말은 매우 잔혹합니다.
'죄'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 박ㄹ혜는 제외입니다. 닭 수준의 지능인지 죄책감이 없는 것 같으니까요. 죄를 인식한다는 건 사람이 죄에 대한 근본적 해결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욕정을 품기만 해도 죄'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모두 벌을 받아야 할까요? 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처참한 최후를 맞아야 할까요? 저는 이런 극단적 결말로 마무리한 톨스토이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 소설 때문입니다.
<신부 세르게이>
이 소설에도 죄의 문제가 매우 크게 다뤄집니다. 신부 세르게이는 현존하는 성자라는 칭호를 받는 성인입니다. 그는 나쁜 생각도 곧 죄라는 성경 말씀대로 끝도 없이 죄를 고백하고 고행을 합니다. 은둔자 생활을 하며 오직 기도와 수양에만 힘씁니다. 안타깝게도 매우 미남인 세르게이를 유혹하려는 여자도 많습니다. 한 번은 어느 여자가 유혹하려고 하자 도끼로 자신의 손가락을 자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죄를 짓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된 세르게이는 22살의 여자의 유혹에 결국 넘어가고 맙니다. 그 후로 그는 극단적 선택을 하려다 돌이키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아마도 톨스토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일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 소설과는 완전히 다른 결말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행위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는 것이며, 죄 사함은 공짜로 받는 선물이라고 합니다. 소설 속 세르게이는 자신이 고행하고 기도하고 무언가를 하면서 의인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방랑하며 만난 파셴카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파셴카는 기도도 자주 하지 못하고 생계 때문에, 여러 이유로 교회에도 자주 못 가는데도요.
세 소설의 공통적인 주제는 뭘까요? 삶과 죽음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아하는 것만큼이나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중요합니다. <악마>에서처럼의 죽음이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의 죽음보다는 <신부 세르게이>처럼 죽음을 준비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죄도 많습니다. 죄의 유혹을 뿌리치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거나 좌절하거나 피하는 건 정답이 아닙니다. 맞닥뜨리고 이겨내는 삶이 바로 올바른 죽음을 준비하는 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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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