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소설

키드만
- 작성일
- 2016.12.29
이반 일리치의 죽음
- 글쓴이
- 레프 톨스토이 저
문예출판사
대문호의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작품의 이야기의 흐름을 뒤쫒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속에 녹여낸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일인 듯 하다. 톨스토이.. 하면 모르는 이가 없는 러시아의 대문호이다.그의 대표작들은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제목 정도는 익히 알고 있는 그런 작품들이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읽어야하는 책들이기에 그저 활자를 눈에 넣듯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독후감을 써야하기에 정답을 써 내려가듯 이 책을 읽으면 느껴야 하는 것들을 적어 내려갔던 것 같다. 그렇게 했던 독서 후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 다시 읽게 되는 그의 작품들은 그렇게 가볍게 읽어내릴 수 있었던 작품들이 아닌 심오한 이야기였음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안나 카레리나>를 완독한 후 등장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무엇인기 불문명했던 어떤 기준이나 가치관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을 수 있었다면 이번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수록된 세 편의 단편을 통해서는 '삶과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해 보게 된 것 같다.
누구나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다만 그것이 먼 얘기로 생각이 되기 때문에 막연하게 생각을 하게 되고 또 이 세상의 끝을 맞이하는 것이기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인 듯 하다.
아무리 죽음을 준비하고 그것에 대해 담담해야지 맘을 먹어도 인간인 이상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날것 그대로 잘 보여주는 듯 하다. 이 작품은 이성과 과학으로도 통제되지 않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을 깨달은 작가가 쓰게 된 작품이기에 톨스토이의 죽음에 대한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작품인 듯 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판사로서 성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이반 일리치. 약간의 위기도 있었지만 그 정도면 성공한 삶을 살았기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행복을 느낄때 쯤 우연한 부상과 함께 몸에 이상을 느끼게 된다. 점점 자신을 억누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놓고 그 죽음을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과 죽음을 맞이하는 본인 이반일리치의 심경등이 솔직하게 묘사된다.
그들이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생각한 것은 그로 인해 생길 자리 이동과 승진이 전부는 아니었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누구나 그렇듯 그들 역시 속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죽은 건 내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야.'
그들 모두 생각하거나 느낀 건 이런 거였다. '아, 그는 죽었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 있어!' (p11)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 그의 자리에 누가 가게 될까? 내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리고 가족 조차도 연금 이외에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궁금해한다.
물론 그의 죽음 애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그거고 현실은 또 현실이다.. 라고 자위하는 우리네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막상 죽음을 맞이한 이반 일리치는 고통과 공포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주위 사람들의 걱정이 가식처럼 느껴지고 또 자신에게 무심하다 생각하며 그들이 밉기만 하다. 또한 죽음을 받아 들일수가 없다.
카이사르는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었고, 그러니 죽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나만의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나, 바냐, 이반 일리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p62)
그러다가 이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건 아닐까?' '잘못된 삶을 살았던 건 아닐까?' 하는 자책을 하게 된다.
결국 자신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고통에서 구해내고 자신도 이 고통에서 헤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고통과 통증이 사라지며 주위 사람들이 " 다 끝났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반 일리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되니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p99)
이렇듯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속에서 인간이 겪게 될 내면의 변화를 이반 일리치는 솔직하게 보여준다.
<악마>
인간의 끝임없이 욕망을 추구한다. 그러한 욕망의 추구가 결코 옳지 않다고 이성은 자꾸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그것을 이기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때문에 추락하는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훌륭한 가문의 청년인 이르테네프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산으로 남겨 주신 농장과 영지를 관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성실한 삶을 살아가지만 절제된 욕망을 견디지 못해 산림지기의 도움으로 스테파니다라는 유부녀와 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아내를 맞이하고 스테파니다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다시 성실하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우연히 마주친 스테파니다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다시 솟아나는 욕망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결국 그 죄책감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 소설의 결말은 2가지로 서술되는데 결국 비극적이라는 것은 동일하다.
<신부 세르게이>
촉망받는 장교 카사츠키는 사랑스러운 약혼녀의 불륜을 알게 되고 그 길로 세속적인 인연을 뒤로 한 채 수도원으로 돌아간다. 멋진 신부를 유혹하는 세속적인 유혹들이 많았지만 그럴때일수록 기도에 정진하며 더 깊은 수도 생활을 한다. 그는 모든 세속적인 유혹을 거부한 성스러운 성자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그는 병든 사위와 손주들을 보살피며 어렵게 살고 있는 옛 친구 파센카를 만나 자신의 수도자로서의 삶과 명성이 헛된 것임을 깨닫는다.
파센카는 내가 되어야 했지만 되지 못한 바로 그 사람이야. 나는 신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사실은 사람들을 위해 살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람들을 위해 산다고 생각하지만 신을 위해 살고 있는 거야. 그래. 하나의 선행, 보답을 바리지 않고 베푸는 한 잔의 물이 내가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은혜보다 더 귀중한 거야. 그런데 거기에도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열망이 있었을까? 그는 스스로 묻고 대답했다. ' 그래 있었어. 하지만 그 모든 열망은 세속적인 명성으로 더렵혀지고 묻혀버렸어. 그래 하나님은 나처럼 세속적인 명성을 위해 사는 자와는 함께 계시지 않아.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을 찾아야 해.' (p249)
이 두 작품속에서 욕망을 이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의 모습으로 표현하지만 이는 인간들이 추구하는 정신적, 물질적인 세속적인 욕망을 대변하고 있다.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항상 부족하고 그렇기에 불행하고 그것을 추구해야하기에 힘겨운 우리네 모습..
과연 누구를 위한 삶의 모습인지 다시 한번 되돌아 보며 작가 자신의 삶이 묻어나 있고 투영되어 있는 이야기를 통해 그의 삶 또한 되돌아 보게 되는 그런 시간이 된 듯 하다.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열망과 두려움. 그러나 그것 또한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가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러한 물리적인 유한성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그것에 지배당해 살아가는 삶보다는 그 또한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하며 담대히 맞닥들이는 삶을 살아가라.. 그렇게 작가는 이야기해 주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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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