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다

ena
- 작성일
- 2017.2.18
아인슈타인의 주사위와 슈뢰딩거의 고양이
- 글쓴이
- 폴 핼펀 저/김성훈 역/이강영 감수
플루토
‘아인슈타인의 주사위’와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이례적으로 물리학을 넘어선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유명한 비유다. 아인슈타인의 주사위는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는,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세계관을 비판하기 위한 비유에서 비롯되었고,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시 양자역학에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상태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을 비판, 혹은 설명하기 위해 만든 가상 실험에서 비롯되었다. 모두 양자역학과 관련이 있는 비유인 셈이며, 양자역학의 비호의적인 비유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나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의 태동에 막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슈뢰딩거야 파동함수로 양자역학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중대한 공헌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하였으니 말할 것도 없고, 아인슈타인의 광전자 효과라든가 상대성이론 역시 양자역학의 토대를 세우는 데 중대한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양자역학의 비인과적 설명에 불만을 가졌다. 세상은 확률적이 아니며, 인과적이라는 믿음을 굳게 가졌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세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른바 만물이론, 혹은 통일이론, 모든 것의 이론, Theory of Everything)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 믿었으며,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자신들뿐이라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이 물리학상 혁혁한 공을 세운 이후 그들이 이루어야 할 사명이라고도 여겼다.
그래서 둘은 (양자역학에 대한 대립각을 세운다는 점에서는) 협력적 관계, 동지적 관계였지만, (동일한 목표를 가진) 경쟁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슈뢰딩거는 비교할 수도 없이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아인슈타인을 뛰어넘어야 하는 존재로 여겼으며, 그래서 아인슈타인에 대해 찬사를 하다가도 무시하기도 하였다(그를 후원하는 조직과 인물을 위해서 그랬을 수 밖에 없었던 측면도 있었지만). 또 그런 슈뢰딩거에 대해 아인슈타인 역시 왔다 갔다 하는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위대한 물리학자였지만, 또한 사람이었으므로.
『아인슈타인의 주사위와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이 두 거장의 학문과 삶을 추적한다. 둘의 삶과 학문의 거의 모든 부분을 훑고 있으며, 20세기 초반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과 관련한 여러 사항들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촘촘하게 엮고 있는 게 아니라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몰두했던 통일이론과 관련한 여러 논의와 에피소드에 대해 특히 깊게 다루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인간적 면모가 더 깊게 드러나도록 하고 있다.
그들과 그들을 비롯한 많은 천재적인 물리학자들의 이론을 따라가기란 벅차다. 이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어도 전공자가 아닌 이상 그런 논의가 있었다는 것만 대충 이해할 뿐 무엇이 어떻게 되어,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그래도 되는 것이 그게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가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이 그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후 어떤 실패를 겪었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실패에 관해서 더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뛰어넘어야 하는 벽이 존재하긴 하지만, 여전히 그걸 대충 무시하더라도 이 책의 진가를 맛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는 말하자면 떠돌이 과학자였다. 아인슈타인이 나치를 피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자리를 잡기까지, 슈뢰딩거도 아일랜드의 더블린 고등연구소에 자리를 잡기까지 한 곳에 오랫동안 연구를 한 적이 없다. 그것은 그들의 지적 여정에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안락함을 추구하려는 본능과 더 좋은 연구 환경을 찾아서, 지적 자극을 받고자 하는 의도가 서로 엇물렸을 것이다. 그들은 경쟁 속에서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위해(혹은 또 다른 이유로) 성급하게 그들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는 비판 받고 철회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래서 그들은 노벨상 이후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비판 받기도 한다. 그저 젊었을 때의 명성을 통해 보여지는 존재, 기사화하기 좋은 존재로 남았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지적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언론을 통해 시시콜콜한 일상까지도 보도되는 등 과하게 추앙 받은 것은 기자들의 본능과 욕심 때문이었으며, 대중들의 기대 때문이었다.
이제 아마 적어도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는 다시 보기 힘들 것이다. 과학, 특히 물리학의 성격이 변했기 때문이다. ‘신의 입자’라는 힉스보손의 가능성을 이야기한 것은 몇몇 과학자였지만, 그것을 입증하는 실험에 참여한 사람은 최소한 수백 명이었고, 들어간 돈도 천문학적이었다. 어떤 천재가 세상의 이론을 뒤집는 경우가 생길 것이란 기대를 하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 같은 거장의 지적 여정과 에피소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관심을 충분히 충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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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