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asic

Aslan
- 작성일
- 2017.3.19
헤세, 사랑이 지나간 순간들
- 글쓴이
- 헤르만 헤세 저
문예출판사
우리는 사랑을 겪는다. 그러나 우리가 헌신적으로 사랑을 나누면 나눌수록 사랑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15쪽)
독일이 낳은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중단편 작품집이다. 소설과 에세이들로 열 여덟편을 수록했다.
헤세가 남긴 어록이나 작가에 대한 책은 왕왕 읽었어도 헤세가 직접 쓴 글은 오랜만이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신선했다. 고전이어도 생생하고 새로웠다.
『빙판 위에서』가 제일 처음 실려있는데 무척 좋았다. 헤세의 유년 시절의 이야기가 담백하게 전달되었다.
『저녁에 시인은 무엇을 보았는가』에서 화자인 젊은 남자는 앳띤 여인과 유럽 남쪽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서는 과거완료형의 문장으로 사랑이 끝났음을 담담히 토로한다. 연인이 화사한 햇살 속에서 밀어를 나누고 있을 때 어여쁜 꼬마들이 그들을 순수하게 응시한 일화가 나온다.
짧은 이야기 속에서 청춘의 덧없음을 표현하는 헤세의 표현력이 정말 아름다웠다.
『붓꽃 사랑』에서는 헤세가 식물과 꽃을 사랑하고 있음을 잘 느낄 수 있다. 꽃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럽게 여인에 대한 사랑과 연결된다. 주인공 안제름은 일리스라는 여자에게 흠모의 감정을 느낀다. 일리스는 푸른 붓꽃을 의미하는 명칭이기도 했다. 상대에게 하는 첫 고백이 청혼인 것은 예스러우나 젊은 남자의 애틋함 자체는 절실하게 느껴졌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둘 사이에 무슨 싸움이나 장애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두 남녀는 영혼의 간극을 느끼고 처절히 헤어진다. 상징적이고 절제된 표현이지만 추상적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안젤름의 진심은 표출된다.
일리스가 죽음을 앞두고 있어서 찾아가서 임종을 지키는 장면이 등장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마지막은 판타지 처럼 마무리하고 있다.
『그 여름날 저녁에』는 주인공 나의 시점으로 어느 여름날들을 회고한다. 나는 스물 세 살이었고 사무실에서 회사원으로 일했고 어느날 많이 아파 앓아 누웠다. 그리고 한 여인에게 연모를 느꼈다.
지인인 한 명사의 초청으로 파티에 갔다가 아름다운 여인과 잠시 대화를 나눈 주인공. 남자는 자신의 신분과 외모가 초라함을 느끼며 열등감 같은 것에 시달린다.
일주일 정도 끙끙 앓아서 구빈원에서 치료받고 나오는 날 남자는 뜬금없이 파티의 여자가 생각났다. 불안한 자신의 미래를 떠올리면서 그 상류층의 여인의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에 쓸쓸해하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지금의 청춘 누군가도 겪고 있을 이야기처럼 사실감 있게 다가오는 단편이었다.
『회상』은 남자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네 페이지 분량이다.
짧은 글 속에서도 설레이는 문장을 건질 수 있었다.
지나버린 일이다! 그러나 가장 멋졌던 일은 키스가 아니고, 저녁때 함께 산책했던 일도 아니고, 비밀스런 행동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에 의해 나에게 흐르던 힘이었다. 아주 기쁨에 찬 힘, 그녀를 위해 살고 그녀를 위해 투쟁하며 불 속이나 물 속이라도 함께 갈 수 있을 듯 싶던 힘이었다.
한 여인의 미소를 위해 몇 년을 희생할 수 있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있어서 잃은 것이 아니다. (110 page에서)
헤르만 헤세의 열여덟가지 작품은 사랑의 속성을 고찰하고 있다.
읽는 이들에게 옛 추억과 상념을 떠올리게 하는 미문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런 글들에 어찌 마음이 촉촉해지지 않을 수 있으랴.
어떻게보면 헤세의 이야기와 사랑에 대한 발언들은 사랑에 대한 건강검진과도 같았다.
노희경 작가가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라고 말해서 여러 사람 범죄자로 만들었다면^^
헤세는 사랑하지 않는 건 건강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음과 영혼의 건강 말이다.
평소에 갖고 있던 무질서한 사랑에 대한 생각들이 헤세의 글로 체계적인 질서를 이루었다.
사랑은 기습과 점령이라고 평소 생각했는데 헤세의 생각 아니 신념이 정확히 그랬다.
하지만 사랑도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변모되며 극단에는 잔인하고 끔찍한 것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그런 속성까지 빠짐없이 이야기 했다.
아니.
세상 이런 사랑꾼 소설가가 계셨다니.
헤르만 헤세님 그동안 몰라 뵀습니다.
잔잔하고 담백하다가도 격정적이고 냉철한 이야기들.
가슴을 두근두근 설레게 하고 흑역사에 치욕을 느끼게 하는 사랑들.
죽음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사랑.
청춘의 사랑은 미숙하고 위험하며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찬란하다는 믿음까지.
이러한 전부를 헤세의 이야기들은 일깨우고 있다.
어떤 것이 에세이이고 어떤 것이 소설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작품들도 많았다.
능수능란한 작가의 문장력 덕분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뭣이 중한가. 그런 기법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전체 작품에서 헤세의 독창적인 표현과 일관되게 흐르는 사상을 느낄 수 있었다.
헤세의 작품을 읽고 싶어하는 이들 문학 애호자들 모두에게 강력히 추천하는 작품집
<헤세, 사랑이 지나간 순간들> 이다.
마술에 걸린 듯한 긴 시간을 체험하고, 수많은 흥분과 떨리는 몸짓으로 오늘날까지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이 모든 일이 실제로는 단지 몇 분 동안 일어났다. (269 page)
무언중에 정열을 쏟은 애정보다 고귀하고 행복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243 쪽)
내가 사랑했던 여인에 대해서 여러분은 아무것도 아실 필요가 없겠지요. 어쩌면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거나 귀여웠겠지요. 또는 천재거나 천재가 아니었을 수도 있죠.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그녀는 나에게 있어 깊이 떨어지는 나락이자, 나의 의미 없는 삶을 잡아주던 신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삶은 위대하고 품위가 있었습니다. (202 page)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당신의 존재 덕분에 깊고 달콤한 충만을 맛보았다오.
(173 쪽)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94 쪽)
- 좋아요
- 6
- 댓글
- 6
-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