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벤투의스케치북
- 작성일
- 2017.9.27
교양으로 읽는 조선사
- 글쓴이
- 김형광 저
시아컨텐츠
역사를 새로 공부하게 된 이래 늘 듣는 이름들이 태조, 태종, 세종, 선조, 정조, 고종 등의 임금이고 정도전, 무학대사, 정약용 등의 정치인 또는 승려 또는 학자이다. 물론 익숙하게 여겨지지만 생소할 수 있는 인물들이 전기(前記)한 분들이다. 아니 인물이란 늘 그런 위험(?)을 안고 있는 존재가 아닐지?
성군인 세종도 중요한 몇몇 과오를 저질렀다고 지적되기도 하고 최근 논의에 따르면 세도정치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평을 듣는 분이 개혁 군주 정조이다. 김형광의 ‘교양으로 읽는 조선사’는 조선을 새로운 왕조, 찬란한 문화, 국난 극복의 시대, 난세, 중흥의 시대, 저물어 가는 조선 등으로 나눈 뒤 각 시기에 맞는 인물들을 선정, 설명한 책이다.
‘새로운 왕조’에서는 단연 이성계와 정도전, 무학대사가 중요하게 거론되고 ‘찬란한 문화’편에서는 세종과 황희, 장영실 등이 거론된다. '국난 극복의 시대‘에서는 이순신, 곽재우, 허준 등이 소개된다. ‘난세에 핀 문화의 꽃‘편에서는 이황, 이이, 허난설헌, 허균 등이 소개된다.
’중흥의 시대’에서는 연암(燕巖), 다산(茶山), 홍경래, 추사(秋史) 등이 소개된다. ’저물어 가는 조선’편에서는 김삿갓, 김대건, 김옥균, 녹두장군, 대원군 등이 소개된다.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인물과 부정적인 인물을 고루 실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정도전에 대해 만일 이방원이 치밀하게 계획하고 충분한 준비를 갖춘 후에 정도전을 공격하려 했다면 오히려 상황은 역으로 정도전이 이방원을 제거하는 쪽으로 바뀌어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글을 남기는 것을 싫어해 (알려진 바가 없어) 요승(妖僧)이라는 이름을 얻은 무학대사에 대해 이색(李穡)은 사람을 공경하고 사물을 아끼는 정성이 모두 지극한 마음에서 나왔다고 적었다.
잘못 알려진 부분에 대해 바로잡는 대목이 있는 것이 순리이지만 세종 부분에서 특별한 이야기거리는 없다. 다만 황희 정승 부분에서 황희가 셋째 아들인 충녕(세종)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폐서인되어 지금의 파주로 유배되었다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물론 후에 충녕은 등극 후에 황희를 기용했다. 황희의 사람됨이 바르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저자는 황희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거론한다. 가난이 과장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단종 즉위 후 독단적으로 정사를 처리했다는 평을 들은 김종서에 대해 저자는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려던 것이 아니라 어린 왕을 보좌하여 흔들림 없이 국사를 운영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92 페이지) 김종서, 성삼문 등도 피해자인 계유정난(癸酉靖難)과 관련된 사육신이란 말은 남효온의 ‘추강집’의 ‘육신전’에서 비롯되었다.
남효온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당시 사육신은 역적으로 취급되었는데 사림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절개와 의리가 중시되어 재평가되었다.(106 페이지) 김시습이 태극설을 주장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태극설에서 태극은 우주만물이 조화하는 근원이고 음양은 사물의 현상을 포괄하는 것이다.
김시습은 사육신처럼 목숨 걸고 저항하지 않고 권력층의 요청을 완강히 거절하고 세상을 버린 채 방랑했다. 자신의 그런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김시습이 답한 내용이 ‘금오신화’에 수록된 다섯 소설이다.(118 페이지) 김시습은 생애의 대부분을 머리 깎고 승려 행세를 하며 지냈지만 유학자로 평가받기를 원한 것으로 보인다.(119 페이지) 김시습은 척불숭유(斥佛崇儒)의 획일적인 정신구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학문적 포용력을 발휘한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다.(120 페이지)
국난 극복의 시대에서 이순신, 곽재우와 함께 허준이 선정된 것은 의미 있다. 허준은 선조의 어의(御醫)였다. 선조, 하면 임진왜란을 말하게 되고 이는 허준이 전란 속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했음을 의미한다. 승승장구하던 허준은 선조가 병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왕의 주치의로서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집중 탄핵을 받는다.
의례 이상의 의미로 서얼 신분으로서 선조의 신임과 보호를 받아 높은 벼슬아치들과 동일한 대접을 받았다는, 죄 아닌 죄로 삭탈관직(削奪官職)된 뒤 유배당한다. 허준은 왕자 시절 광해군을 치료해준 적이 있는데 이 인연으로 광해군의 은혜를 입어 풀려난다.
퇴계는 ‘소학(小學)’을 읽기 전 이미 몸가짐이 ‘소학’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같았다.(167 페이지) 퇴계는 유학을 공부하려면 ‘주역’ 연구가 필수라고 하면서 스무 살 때 ‘주역’ 공부를 하느라 거의 침식을 잃을 정도였다. 이 일로 평생 소화 기능이 좋지 않아 고생했다.(168 페이지)
허난설헌은 자신의 시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고 다른 곳에 남아 있는 것도 없애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199 페이지) 그는 여필종부, 남존여비, 일부종사 등의 남성 중심 사회에 환멸을 느낀 인물이다.
허난설헌은 자가 경번(景樊)인데 이는 당나라 시인인 번천 두목지를 경모(景慕: 덕망이나 인품 때문에 우러르고 사모함)한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 하여 남편이 있는 사대부 집안의 여인으로서 올바르지 못한 처신이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200 페이지)
허난설헌은 스물 일곱 살 되던 해 어느 날 몸을 깨끗이 씻고 새 옷으로 단장한 뒤 “올해는 내 나이 세 번째 아홉수에 해당하는 해인데 마침 오늘 연꽃들이 서리를 맞아 붉게 변했으므로 미리 말했던 것처럼 바로 내가 죽을 날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내가 지은 시들을 모두 불태워 나처럼 불행한 여인이 다시는 조선 땅에 태어나지 않도록 해주기 바란다.”는 말을 하고 그동안 자신이 시를 짓고 책을 읽던 초당에서 홀연히 숨을 거두었다.(203 페이지)
김육(金堉)은 연이은 왜란과 호란으로 전 국토가 짓밟히고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했던 시절을 살면서 오로지 백성을 잘 살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친 의지의 정치가이다.(221 페이지)
성호 이익은 평생을 재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면서도 관념적인 성리학에만 매달리지 않고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학문을 섭렵한 인물이었다.(233 페이지) 유형원, 이익, 다산으로 실학의 맥이 이어졌다.
연암은 왕실과 인척 관계 집안이었다. 정조는 외척(外戚) 방지 정책을 폈다. 연암이 과거를 포기한 것은 새로운 세계를 알게 해주는 신학문(북학)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정조, 연암 등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규장각(奎章閣)이다. 겉모습은 왕실 직속 도서관이었지만 정치적 무게는 그 이상이었다.(253, 255 페이지)
정약용의 사상은 본성의 수양을 강조하는 퇴계의 이론을 따르면서도 능동적 실천의 중요성을 내세우는 율곡의 입장도 수용하는 포용성을 보였다.(263 페이지) 이는 정조의 속마음과 일치한다.(265 페이지) 다산이 서학에 보인 관심은 종교적인 관점이기보다 과학 기술에 대한 매력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272 페이지)
다산은 명말 청초의 실증적인 학풍은 물론 서양의 신학문까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세계화를 강조했다. 반면 정조는 동국(東國)에 태어난 이상 마땅히 본 모습을 지켜야 한다며 조선중화주의에 입각한 주체성을 강조했다.(273 페이지)
벽파 정권의 우두머리였던 정순왕후 김씨(영조의 계비)가 순조의 수렴청정을 거둔 지 1년만에 죽자 벽파는 일시에 몰락하고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권력을 잡는다. 이것이 김씨 일문에 의한 세도정치의 발단이다.
원래 세도(世道)는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의미이다. 중종대의 조광조 등의 개혁적인 신진 사대부에 의해 제기된 정치철학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와서는 일부 권력자들이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는 것을 뜻하는 세도(勢道)로 변질했다.(280 페이지)
홍경래의 난은 이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김삿갓(김병연)이 스물 다섯 살이 되던 해 영월 감영(監營)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는데 그가 시제를 받아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이 홍경래의 난때 반란군들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살아났으나 반란군의 장수 김창시의 목을 돈을 주고 산 뒤 자신이 세운 공인 것처럼 처리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자신의 할아버지 김익순이다. 후에 이를 안 김병연은 전국을 유랑하게 된다.
김옥균은 꺼져 가던 조선의 명운을 걱정하며 시대의 새로운 흐름에 맞게 개화(開化)해야 나라의 부흥과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34 페이지)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민중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소수 지성인들의 거사였다는 점에서 임오군란과 비교되고, 외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조선 내부의 기층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점에서 동학 농민 운동과 구분된다. 조선 왕조의 체제 자체를 변화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갑오경장과도 구분된다.(35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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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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