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
오우아
- 작성일
- 2017.10.10
아픔이 길이 되려면
- 글쓴이
- 김승섭 저
동아시아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릴 수 있을까요? 어렵지 않은 질문입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질문은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까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하면 포기하면 그만입니다. 그럼에도 이 질문을 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하는 까닭은 영화「변호인」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되돌려「변호인」을 보면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릴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더 묵직하고 호소력이 묻은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즉, 바위는 아무리 강해도 죽은 거고 계란은 아무리 약해도 살아있다는 것, 그래서 계란은 바위를 넘을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다운 삶을 절대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다운 삶. 이것은 누구에게나 ‘해당사항’ 이니까요.
사회역학자 김승섭의『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팠습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회 곳곳의 부당하고 불평등한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차별, 혐오, 질병, 가난, 재난, 성소수자라는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픔을 듣고 있으면 앞서 말한 누구에게나 해당사항이었던 사람다운 삶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계란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해당사항은 ‘해당사항 없음’이라는 대답으로 되돌아올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은 병들 수밖에 없는데 이를 바탕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수많은 데이터는 사회적 약자가 어렵지 않게 환자가 된다는 근거를 합리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합니다. 우리는 몸이 아플 때 적절한 휴식을 가져야 합니다. 몸이 계속해서 건강에 빨간불을 깜박이며 위험 신호를 보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멈추지 않고 달기만 하면 사고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회적 약자들은 지금 당장의 건강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가령,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몸이 아파도 일해야만 제대로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바커 가설(Baker's Hypothesis)’에 따르면, 비정규적 근로자 입장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모순이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환경이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적 약자들은 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보통 그 대답으로 적절한 치료를 많이 듣게 됩니다. 가령, 금연을 하면 폐암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처방입니다. 물론 이런 처방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폐암의 원인을 오로지 담배에게만 책임을 따지면서 담뱃값을 올려버리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담뱃값을 걱정하면서 금연을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금연에 성공할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오히려 금연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이 더 망가질 뿐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질병의 ‘원인의 원인’을 탐구합니다. ‘역학(Epidemiology)'은 질병의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흡연은 폐암의 주요 원인입니다. 하지만 폐암의 원인을 찾아보면 그물망처럼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여러 원인이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면, '원인 그물망'의 한가운데에 있는 '거미'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금연을 하면 건강에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소득층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흡연은 아주 적은 비용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금연제도보다 현실적으로 스트레스가 없어야 금연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사회역학을 전공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또한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합니다. 사회역학에 따르면, 사회적 약자들이 위험한 환경에 살다보니 더 많이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료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으로 사회적인 차별과 혐오를 치료할 수 없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사회적인 문제를 사회적 약자들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질병을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회적인 문제는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가능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모두는 사회적으로 단절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라는『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어 나가면서 ‘정의로운 건강’을 생각했습니다. 정의로운 건강은 누구나 건강할 권리가 있으며 평등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건강은 정의로운 사회와 다르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건강이 불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단지 사회적 약자라는 이름으로 차별과 폭력 혹은 성적 착취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얼마든지 죽거나 죽어도 슬퍼하지 않을 존재가 되어 버리는 현실은 너무나 아팠습니다. 만약에 아픔이 아픔으로 기억되지 않았다면 공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자는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궂은비를 맞았습니다. 비록 아픔을 멈출 수 없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아픔이 길이 되기를 진심으로 변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픔이 길이 될 때 정의로운 건강이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과 고통에 한발자국 다가가며 공감하는 저자를 보면서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변호인’이 우리 눈앞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픔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정의로운 건강을 몸소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함께 하는 세상은 이런저런 제도에서 벗어나 ‘사람이 먼저다’에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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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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