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를 봅니다

새벽2시커피
- 작성일
- 2014.10.28
안녕,헤이즐
- 감독
- 조쉬 분
- 제작 / 장르
- 미국
- 개봉일
- 2014년 8월 13일
성숙해지는 과정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공통적인 것이 있다. 삶에 있어 자신만만한 자세가 아닌 겸손한 자세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면 나는 쉽게 죽지 않을거야.가 아니라 한순간에 갈 수도 있구나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지루할정도로 별 볼일 없는 인생이라도 길기는 커녕 무척이나 짧은 시간임을 자각하게 된다. 굳이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더라도 죽음과 가까운 인생을 살다보면 남들보다 좀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 생각을 깊게 만드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평상시에 힘든 순간들, 특히 대부분의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자각때문인쪽이 더 가까우려나.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해' 가 아니라 평범한 평균치에도 미달되는 것 같은 그런 자각.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이 비관적인 낙관주의라 불렀던 비극의 3요소 고통, 죄책감, 죽음에 직면함에 따르는) 여기 아주 어린 나이에 죽을 고비를 넘겼고, 늘 죽음과 가까운 인생을 사는 소녀가 있다.
헤이즐은 갑상선암이 폐로 전이가 되어서 산소호흡기를 코에 꽂은채 생활한다. 작은 점, 여드름 하나만으로도 호들갑인 10대-사실 여자라면 10대고 40대고 얼굴에 있는 잡티 하나라도 관용적인 태도로 살아가기 힘들다. 그래도 30, 40대와 달리 한창 감수성 예민한 10대는 특히나 외모지상주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으니 10대의 여자아이가 달고 다니는 산소호흡기를 스스로 외계인의 촉수로 생각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 같다. 책이나 영화에서 자존감 있는 헤이즐이 자신의 산소호흡기를 그런식으로 생각하진 않지만 자신을 특별히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점을 보면 자신의 외모에 그런 부가적인 요소를 평소 피부마냥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의 여자아이에겐 여러모로 불리하지 않을 수 없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면서 또래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일이 헤이즐에겐 다른 세계다. 그렇다고 헤이즐이 어둡거나 부정-부정적인 것과 냉소적인 것을 또렷하게 구분하자면 말이다-적인 성격인 건 아니다. 헤이즐은 우울증을 염려하는 부모님을 위해 암환자모임에 나간다. 그곳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들이대는 잘생긴 남자애 어거스터스를 만난다. 골육종으로 다리 하나가 의족이지만 키크고 잘생긴 외모처럼 모든 것에 초긍정적으로 보인다. 헤이즐의 마음이 반쯤 넘어간 상태인데 느닷없이 어거스터스가 담배를 꺼내 문다. 실망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헤이즐에게 어거스터스는 불을 붙이지 않으면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못한다며 상징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헤이즐이 너무나 좋아하는 책을 직접 읽을뿐 아니라 작가에게 메일을 보내 비서에게 답장까지 받아내는 능력자 어거스터스. 작가에게 네덜란드에 오면 찾아오라는 초대까지 받는다. 흥분한 헤이즐은 네덜란드로 떠날 계획을 세우지만 몸상태가 악화되는 바람에 취소된다. 헤이즐의 상태가 다시 호전되지만 병원에서는 헤이즐의 장시간 여행을 무리라고 보고 허락하지 않는데 그런 헤이즐을 위해 어거스터스가 마지막 소원(영화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메이크어위시라는 난치병어린이환자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자선단체가 있다)으로 네덜란드 여행을 떠날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막상 찾아간 세상에서 유일하게 죽음과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이라 여겼던 피터 반 호텐작가는 괴팍함을 넘어 헤이즐에게 커다란 실망감만을 안겨준다. 그런 실망감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비서의 안내로 안네의 집을 구경하러 나선다. 승강기가 없어 산소통을 짊어지고 높은 계단을 올라 꼭대기층에 도착한 헤이즐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기쁨을 어거스터스와 나눈다.
둘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한밤중에 전화가 와 어거스터스에게 달려간 헤이즐은 어거스터스의 상태가 위중한 것을 알게 되는데 어거스터스의 암이 이미 한참 전에 재발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소중한 사랑을 나누었던 어거스터스가 죽고 장례식장에 피터 반 호텐작가가 찾아온다. 매몰차게 그를 내쳐버리고 나중에야 그가 자신에게 어거스터스의 마지막 편지를 전해주러 왔음을 알게되고 그가 전해주었던 어거스터스의 편지를 읽게 된다.
한편의 신파성 청춘로맨스물로 보이지만 <안녕, 헤이즐>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거리는 작품이다. 아주 중요한 부분들은 쏙쏙 빼고 대충의 줄거리를 늘어놓은 건 나중에 또 보고 싶어질 영화라서다.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두 사람의 대사를 통해 들려오는 메시지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도 가슴에 따듯하게 와닿는다. 책을 먼저 읽다가 영화를 연출한 감독의 다른 영화 <스턱 인 러브>를 보고 영화로도 충분히 기대치가 생겨서 책읽기를 멈추고 영화를 봤다. 원작을 참 잘 살려냈다.
책보다 영화속의 어거스터스가 좀 더 허세작렬하게 느껴진다. 영화속의 어거스터스의 몸짓이라던가 표정들이 눈으로 보여지기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젊고 어리기때문에 충분히 너그러워진다. 겁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겁이 나서이기도 한 그 허세의 모습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다시 한번 생각나게 된다. 책에서는 헤이즐이 피터 반 호텐을 '유일하게 죽음을 이해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영화에서는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표현된다. 피터 반 호텐에 대해 살짝 짐작했던 부분이긴 한데 그는 죽음이라는 고통속에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부모님의 죽음과 더불어 나 자신의 죽음, 좀 더 상세히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절차, 죽음 이후에 관해 생각이 많아지는 나이라서 그런지, 몇 번의 장례식을 경험해서인지 죽음이라는 것이 헤이즐의 생각처럼 죽음으로써 끝이 아니라 삶에서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피터 반 호텐이 헤이즐에게 이해시키고 싶었던 부분) 그리고 장례식이라는게 실상은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절차라는 부분이 더 큰 점이 눈에 훤하게 보였지만 그게 답답해 보이거나 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것을 읽고 보더라도 체감되는 경험으로 깨달아지는 것과 머리로 아는 것이 차이가 있는 것이고 아직 10대인 헤이즐이 그런것을 쉽게 깨달으면 그게 오히려 작위적으로 보일테니까 말이다.
영화속에서 헤이즐의 가장 커다란 걱정(죄책감)이라면 자신이 죽은 뒤 남겨지는 가족에 대한 것이다. 영화속의 소설인 피터 반 호텐의 소설이 헤이즐에게 크게 와닿았던 이유인 동시에 그를 통해 알고 싶었던 것들이기도 한 남겨진 가족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야기는 헤이즐과 어거스터스 중심으로 흐르지만 아픈 자식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과 그런 자식을 보는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의 입장 모두를 생각하게 한다. 영화는 원작보다는 생략된 점이 많지만 영화적으로 원작에 충분히 충실하다. 그래서 원작을 읽고 영화를 봐도 실망하지 않을 것 같다(책을 반만 읽고 봐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원작을 다시 읽어도 생각이 달라지진 않았다)
헤이즐역의 쉐일린 우들리의 전작 <다이버전트>를 보고 난 후 몇 달 되지않아 <안녕, 헤이즐>의 예고편을 보았었다. 한눈에 두 남녀주연배우들을 알아본건 <다이버전트>에서 남자주인공보다 남매로 나온 두 사람의 캐미가 훨씬 좋았기때문이다. 어거스터스역으로 나온 앤설 에거트는 분량이 그리 많지도 않았는데도 기억에 남았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난다. 쉐일린 우들리는 묘하게 매력있다. 조지 클루니의 큰 딸로 출연했던 <디센트>에서 처음 보고 나중에 크면 어떤 여배우가 될까 궁금했었는데 <다이버전트>때도 그렇고 <안녕, 헤이즐>도 그렇고 어렸을때보다 훨씬 밝고 에너지 넘쳐 보인다. 한때의 청춘스타가 아니라 앞으로도 쭉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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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