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미니즘

아그네스
- 작성일
- 2020.1.30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 글쓴이
- 오찬호 저
블랙피쉬
재작년 초에 서평단에 신청해 읽고 무척 공감한 책으로 한국인을 위한 '사회학적 자기계발서'다. 그 후 독서모임에서 추천해 읽고 토론한 후 좋다는 평을 들었고 저자의 다른 책들에도 관심을 갖고 읽은 회원들이 있다. 어렵다고 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추천한 보람을 느꼈다.
이 책을 세 번째 읽으며 내용에 대한 이해가 선명해진다. 페미니즘 책을 읽을 때처럼 살면서 굳어진 단단한 고정관념의 껍질이 조금씩 벗겨지는 느낌은 아는 사람만 아는 즐거움이다.
책 속에는 부끄러운 한국인의 민낯이 가득하다. 혐오와 차별을 드러내고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한국인들, 사회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능력과 의지의 문제로 파악해 끝없이 대안을 찾아 노력하며 나쁜 구조를 더 나쁘게 만드는 한국인들,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총알 서비스를 선호하는 한국인들, 약자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고 자신의 성공을 내세우는 뻔뻔한 한국인들을 만나며 그 속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지 깨닫고 놀란다. 결론은 이거다. 계속해서 이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이제부터라도 남은 인생을 조금씩 바꾸며 자본주의적 인간에서 탈피하며 살 것인가.
"사적 재산권"은 그것이 자기 것이라는 뜻이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지 않는다. (22p)
저자에 의하면 '사적 재산권'은 한국인이 가장 많이 남용하는 개념이다. 층간 소음, '노키즈존', 장애인 재활 시설 설립 반대, 임대아파트 아이들의 놀이터 출입금지, '손님은 왕', 총알 배송 등의 문제에서 알 수 있는 건 '사적 재산권'의 권리 행사가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공공정신을 내팽개친 사적 재산권의 주장은 인간이 있고 돈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인간(성)을 버리고 돈만 취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이다.
"소수의 인권을 지켜주기 위해서 다수의 인권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 (33p)
페미니즘 책에서도 자주 듣는 말 같지 않은 말이다. 인권의식의 향상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묻혀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 그동안 당연하게(?) 기득권을 누려온 자들이 뒤늦게라도 부끄럽게 여기지 못하고 이런 해괴한 말을 한다. 저자의 말을 빌면, "이런 표현은 혐오를 나름 혐오스럽지 않게 표현하려다 논리의 무리수를 둔 대표적인 경우다." 이런 말은 문제의 본질을 감추려는 의도에서 나온 언어 오염이라 생각한다.
"사회학은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성공한 '예외'에 주목하여 인생은 개인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결론내리지 않습니다. 개인이 아무리 간절해도 꿈을 이루지 못한 '평균치'가 함의하는 객관적인 불평등을 드러내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죠." (40p)
<말하는 대로> 프로그램에서 사회학이란 무엇인지 소개해달라는 요청에 저자가 설명한 말의 일부다. 저자의 말대로 사회학이 객관적 불평등을 드러내는 학문인데 반해 한국인들은 '투덜이 청개구리' 같은 신세한탄을 듣는 걸 싫어한다고 한다. 왜 그럴까?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일까? 강자 중심의 권위주의적 사회에서 의사소통이 일방적이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살아오면서 쌓아온 자신의 열등 콤플렉스를 마주하는 게 불편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약자의 호소에 무관심하거나 되레 반박하는 현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불평등의 평균치를 부정하는 조언은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언어적 습관이다. (47p)
이 글귀를 읽으면 내 경험이 퍼뜩 떠오른다.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 현실을 얘기했더니 '남자들도 힘들다'는 말로 응했던 독서모임 회원이 있었다. 저자의 말대로 사회적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며 '불평등의 평균치를 부정하는' 사고와 언어 습관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실감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만 해도 특별한 예외를 들먹이며 "너도 1등 할 수 있다"고 아이를 부추기지 않았던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다. 그 후로 나는 예외를 가지고 아이를 비교하지 않고 남편이 그럴 때마다 반박한다. "좋은 사회란 예외가 되지 않더라도 행복한 개인들로 넘쳐나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감단직(감시나 단속과 관련된 업무직)'이라 불리는 이들은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적고 대기 시간이 길다는 이유'로 일반적인 노동의 예외 직군으로 분류되면서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했다. 합법적으로 불법이 이루어지는 희한한 상황이었다. (196p)
아파트 경비원 이야기에서 이번에 새롭게 발견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헌법 32조 1항은 '국가는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고 규정하는데 현실에선 다른 잣대가 작용한다. 아파트 경비원들의 임금은 왜 오르지 않고 올라도 여전히 적은지 궁금했는데 이런 현실이 있었다.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부터 민주주의 시민은 가정에서부터 길러진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 출발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거다. 때문에 나는 가정에서 종종 '갈등'을 일으키며 산다. 덕분에 목소리 큰 가부장 밑에서 조용히 지내던 아이들도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병만 키우는 '인내'하기를 그만두고 목소리를 내어 '갈등'을 만들고 균형을 잡아가는 삶이 인간적이다. 한국인에게 꼭 필요한 사회학적 성찰을 통해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를 모색하는 이 책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한다.
저자가 소개한 정호승 시인의 시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의 일부다.
"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
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
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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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