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치 않게 영화에 등장하는 첩보요원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비상한 두뇌와 강인한 신체를 갖춘 요원은 매순간 냉철하고 과감한 판단력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변화무쌍한 상황을 연출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은밀함을 잃지 않는 배우를 바라보노라면 이러한 일이 은연중 선망의 직업이 되기도 한다. 실천력까지 뛰어난 이라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국정원 문을 두드리기도 했을 터.

 

  대한민국 국민인 한 여성은 지식뿐만 아니라 체력을 증진하여 어렵싸리 국정원 문을 통과했다. 어떤 임무가 기다리고 있을까 자못 설레며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에게 주어진 일은 인터넷 사이트를 종횡무진하며 댓글을 작성하는, 이른바 ‘댓글녀’였다. 좌익 선동 세력으로부터 정부를 보호한다는 취지 아래 온갖 의문을 물리치고 열 평 오피스텔에서 숙식하며 자기의 애국심을 현 정부에 유리한 댓글의 양으로 표현했고, 이에 대한 수치를 상부에 보고했다.

 

  2013년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출연작인 극사발 프로젝트의 연극 <아이리스 PC방>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터진 ‘국정원 댓글녀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노량진 고시촌의 한 PC방의 대표 단골손님은 몇 해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서른 중반의 공시생 이병언(박우식 분)이다. 어느 날 마스크와 머플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등장하며 이병언은 생활의 활기를 찾는다. 가까워지며 조금씩 그녀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하고 이윽고는 그녀의 일을 도와주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게임 ‘서든 어택’에서의 적수가 수많은 언론 기관을 떠돌며 무조건 정부 정책에 유리한 댓글을 올리게 된 거다. 정치에 하등 관심이 없던 청년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행동이 습관화되고 과격성을 띄더니 역사를 왜곡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댓글녀 김태희(이안나 분)가 보기에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드라마 <아이리스>를 무척 좋아하여 광화문 촬영 현장까지 간 적 있어, 어쩌면 그때 우연찮게 만났을지도 모를 둘은, 운명처럼 이름이 같은 PC방에서 사랑을 키워나간다. 사랑이 커갈수록 그들의 생각은 일방통행 도로가 되어간다. 조직과 역방향으로 질주하면 엄청난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구차하지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조직에 스며들어 살아남는 게 수다. 이러한 조직과 조직원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심리 과정을 연극은 보여주고 있다.

 

  댓글 정도로 여론을 조작할 수 있냐고? 국정원 간부 역과 남조선일보 국장과 최고령 고시생 역을 부족함 없이 소화하고 작품의 연출한 배우 양동탁은 국정원 간부의 입으로 말하고 있다. 온라인 쇼핑할 때 상품 설명만 보느냐, 아니다. 구입한 사람들의 반응을 더 유심히 읽으며 판단한다. 상품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댓글을 통해 나도 모르게 구입하게 된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100명이 하루 100개의 조작된 댓글을 1년 동안 지속적으로 단다면 1년에 무려 365만 개다.

 

  대선을 앞두고 철저하게 댓글로 언론을 조작한 사건이 의도적으로 다른 사건에 가려지고 묻힐 때 이 연극을 관람하게 되어 반가웠다. 연극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하는 극사발 프로젝트에 박수를 보낸다. 10월 3일부터 12일까지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댓글녀를 만날 수 있는데, 조만간 다시 재회하여 보다 많은 관객과 마주했으면 한다. 이 작품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조금은 더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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