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의 책읽는 일상

하루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9.12.26
갑자기 그 날이 생각났다. 매년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인데 느닷없이 그 머나먼 시절이 떠오른 이유를 찾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 오후였고 극장에서는 '이집트 왕자' 가 상영중이었다. 충장로 3가였던가. G백화점앞에 서있다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거리에 들어찬 어마어마한 인파에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빨려드는 기분이 든 것이다. 이럴 때 일수록 정신줄을 꽉 잡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가로질러 맨 핸드백을 부여잡고 나는 그렇게 떠밀려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앞사람 머리만 보고 가다가 잠깐 눈을 들어 쳐다보니 새까만 머리들이 틈새도 없이 빼곡이 들어찬 거리가 보였고 나는 한참동안 숨을 쉴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이 눈앞에 다시 나타났고 나는 지금 미역을 찾아서 인파속을 뚫고 다녔다. 집에서부터 걸어서 시장을 가로질러 백화점까지 20여분을 일부러 걸어나왔다. 요즘 운동도 야무지게 못하고 있어서 오고가는 것을 도보로 정한 것이다. 변두리는 참으로 한산하고 느긋했다. 문제는 백화점 부근에서부터 보이는 까만 인파들, 요새는 모두들 검정색 롱패딩으로 한 계절을 보내는 건지, 그 많은 패션포토의 화려함은 정작 포토안에서만 존재하는 색이던가 홀로 중얼거리며 그 느와르 속으로 들어갔다. 지하에서부터 나는 걸을 수가 없었다. 식품관은 지하에 있고 나는 한발짝을 옮기려고 해도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 와중에 흘끗 보이는 식당가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음식을 앞에 두고 있었고 그리고 나는 그냥 밀려다녔다.
'대충 사고 어서 나가야지'
일부러 걸어서 나왔는데 잘못된 선택이었다. 미역도 사고 반찬도 사러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집앞 한산한 시장을 모른 척하고 걸어나와 여기서 이러고 있다. 예전에는 차려입고 '이집트 왕자'라도 보러왔지. 양손에 장바구니와 비닐 봉지에 담긴 것들을 움켜잡고 집까지 또 걸었다. 그나마 목적달성은 하고 싶었다.
때가 되면 대부분 그렇게 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꽃이 피면 꽃을 보러 가듯, 크리스마스에는 백화점으로, 백화점에는 크리스마스가 필요로 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있어 보인다. 사람들로 가득차서 원하는 것을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그런 날, 나는 매번 그런 날 미역국을 끓일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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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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