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계발

하루
- 작성일
- 2012.12.3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 글쓴이
- 정진홍 저
문학동네
겨울로 들어설 즈음 한 때 깊은 안개속에 온 세상이 잠겼었다. 마왕의 두터운 망토에 휘감긴 것처럼 몽환적인 아침 나절 안개속으로 들어갔다가 지독한 습기때문에 몸살을 앓고 하루종일 몽롱한 상태로 지내던 날,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헤르만 헤세의 [안개속에서]를 기억하게 된다. 앞이 보이지 않도록 안개가 끼는 날이면 나무도 타인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안개속에서 시인이 던진 시어.. 누구나 혼자라는 말이 가슴을 스쳐 지나간다. 인간의 유한한 삶속에 던져진 운명같은 단어, '혼자'는 우리가 삶의 곳곳에서 그리고 급기야 찾아오고야 말 죽음에 이르기까지 홀연히 짊어지고 가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천지가 파랗게 물들어 좁은 시야를 더 넓게 더 높게 보이게 하는 한 권의 책이 한 해동안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다가오는 해에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푸른 창공과 끝없는 대지에 그려보라고 재촉하는 듯하다. 책제목도 헤세의 [혼자]라는 시에서 찾아다고 하니 이래저래 요즘 나의 심사와 연결도 되고하여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어갔다.
세상에는 / 크고 작은 길이 너무도 많다. / 그러나 도착지는 모두가 같다. /
말을 타고 갈 수도 있고, 차로 갈 수도 있고 / 둘이서 아니면 셋이서 갈 수도 있다. /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누구나 걸어보았을 것이다. 가까운 거리도 걸었고 서너시간 걸리는 거리도 날이 좋으면 무작정 걷기도 했다. 마음의 분노가 찾아올 때나 일상에 권태감이 찾아올 때 집근처 숲길을 세바퀴정도 걸으면 나도 몰랐던 새로운 기운이 생겨난다. 아! 이래서 늘어져 있지 말고 걸어보라고 말들을 하나보다.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일인데 어김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생활패턴때문에 몸과 마음이 바라는 한 걸음을 외면하고 살아온 게 아닌가. 대한민국은 실로 속도전속에서 살아가는 나라이다. 물론 지구촌 어떤 나라도 속도를 무시하면서 살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기에 여유있고 느긋하게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들대로의 시간관리체계가 있겠고 오랜 시간동안 묵혀진 시간의 정서가 우리와 다를 뿐이다. 그래도 그들과 실제적인 비교를 했을 때 속도가 곧 일인 나라를 꼽으라면 결코 대한민국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일터가 곧 일상이 되어 나를 잃어가는 줄도 모르고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사오십대 중장년층의 힘겨운 고뇌와 더 이상 오갈 데 없이 막힌 공간속에서 탈출하고 싶은 의지가 담겨있다. 각자의 힘겨운 공간을 탈출하려면 걸리적거리는 것들이 무수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것도 모두 던지고 버리고 바로 밖으로 뛰쳐나와야 비로소 신선한 공기를 흡입할 수 있다. 살아온 궤적들로 인한 미련이 쌓이고 쌓여서 탈출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게 우리네 측은한 삶이다. 돌이켜보면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기에 연연해하면서 자신과 마주하는 절대고독의 시간도 찾지 못하는 게다. 이러한 순환이 주어진 시간마다 쳇바퀴 돌 듯 반복되기에 산티아고 가는 길가에 홀로 선 저자의 경우처럼 끝없이 터져나오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게 아닐까.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안락한 가정과 단단한 일터에서의 한 자리를 위하여, 능력을 보이기 위하여, 그 능력에 응당 적합한 댓가를 위하여, 그렇게 살아온 대한민국 거인들의 숨겨온 자아가 다른 공간, 낯선 공간에 홀로 던져졌을 때 비로소 보이는 자신의 참모습에 거침없이 눈물을 쏟는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 오래 묵혀 좋을 것은 하몽과 치즈, 그 외에 와인밖에 없음이여. 부디 못생기고 응어리진 삶의 돌덩이들 모조리 분사시켜 눈물로 다 흩어버리길 바라는 마음이다.
900킬로미터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47일동안 홀로 천천히 걸어간 저자의 한 걸음속에는 부단히 살아온 지난 날의 땀과 이제껏 버려둔 고독이 묻어난다. 실제 이렇게 먼 길을 혼자서 저토록 오랫동안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 무거운 배낭도 짊어져야 하고 온전히 자신을 믿어야 하며 무엇보다 의식주해결에 앞장서야 한다. 야생의 길 위애서는 돈주고 살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내 몸하나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수도 없이 발생한다. 정신이 우선할 것 같지만 내 몸이 안정되야 정신도 차리는 법이다. 알맞게 먹고 두 다리로 깨작깨작 걷고 몸 안에 응축된 지방이 땀으로 빠져 나올 때 가볍게 정신의 날개를 펼칠 수 있다. 그러다보면 울퉁불퉁한 야생의 길위에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정확히 보인다. 저자만큼의 고행길은 못했지만 줄곧 걷고 박하게 먹고 거칠게 자면서 실행해 옮긴 여행길, 인생에서 한번쯤은 꼭 거쳐야 할 의식처럼 생각된다. 잃어버린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시간이 없다면 항상 팍팍하고 버석거리고 센 척하는 가짜 모습을 볼 것이기에...
일년 365일 내 몸을 위해 인내했던 시간들에 감사한다. 근육의 힘이 없었다면 나는 쉬이 지쳤을 것이고 허리가 꺾였을 것이며 그로 인해 나는 물론 주변에 민폐를 수없이 끼쳤을 것이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살아가는 동안 중요한 일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고행의 길가에 선 저자의 '길위에서의 에스프리'가 부럽기도 하다. 한번쯤...언젠가..그 길위에 선 내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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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