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낭만푸우
  1. 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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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이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이반 일리치 Ivan Illich에서 따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저
느린걸음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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