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낭만푸우
  1. 도라지꽃(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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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글쓴이
정현우 저
창비
평균
별점9.7 (13)
책읽는낭만푸우

I



 



모든 시집들을 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닌데,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창비 시선은 종종 '어나더 커버'라고 해서 원래 표지 위에 또 하나의 표지를 덮어 씌운 시집들을 출간한다. 이 경우엔 보랏빛의 '어나더 커버'를 원래 표지(원래 표지도 같은 계열의 색을 썼다)에 덧씌웠는데, 전반적으로 겨울 느낌과 슬픔의 정서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런데 시들을 읽다 보면 딱 이 표지 같다. 첫 눈을 볼 때의 정서. 아름답지만 언젠간 녹거나 때가 탈 걸 알기 때문에 슬플 수밖에 없는. 그런 양가적 감정이 지배적인 시집이다.



 



II



 



'모든 슬픔을 한꺼번에 울 수는 없나'는 이 시집의 1부의 제목인데, 1부에 실린 시들이 하나같이 다 좋아서 한 편의 시만 고르기가 어려울 정도다. 



이렇게 쌀쌀한 계절에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정도다.



 



1부의 시들도 좋았지만, 2부의 시들도 한결같이 좋다. 등단 6년만에 나온 첫 시집이다 보니, 시인도 고심해서 시들을 추린 걸까? 주변에서 이 시집을 많이 추천한 이유를 알겠다. 



정현우 시인은 시인이면서 가수이기도 하단다. 밴드 활동을 하는 모양인데, 시들은 어떤 면에선 화가의 그림처럼 선명하게 시각적으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는 「파랑의 질서」라는 시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이브 클라인(Yves Klein)이 블루로 작업한 다양한 작품들이 떠오른다. 물론 정현우의 시풍에는 이전의 화풍에서 신성시되었던 블루의 느낌도 있지만(예를 들어 성화에서 예수나 마리아의 옷은 블루이다), 그보다는 좀더 모던한 느낌이랄까.



 



모든 질서는 왜 파랗게 질려 있는가?

양파와 질서 사이를 열고

몽상을 꺼낸다.



(...)



파란이 파랑보다 먼저 쓸려가고

액자 속이 잠잠하다.

두꺼운 멜랑꼴리가

양파 껍질처럼 벗겨지고 있다.



 



- 정현우,  「파랑의 질서」 부분



 



III



 



대체로 '첫 시집'을 내는 시인들은 젊을 가능성이 크고, '젊은 시인'들의 '첫 시집'은 그들의 모든 가능성과 심혈을 가득 담아 새롭고도 난해하고 낯설고도 도전적이기 마련이다. 어쩌면 '첫 시집'을 읽는 건 그런 기대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첫 시집'이나 '첫 소설'을 읽는 건 감각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늙지 않겠다는 다짐같은 측면도 있다. 그러다 보니 대개의 경우 취향에 맞아서 읽는 경우보다는 공부하듯 읽는 경우도 다분하다.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내가 MZ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듯 말이다.



그런데 정현우 시인의 시들은 시를 읽는 데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마치 동년배의, 친구의 이야기를 듣듯이 시를 읽자마자 저절로 흡수되고 이해된다. 그 정서나 감정, 그가 표현하는 방식 등을 이해하는 데 따로 노력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읽자마자 바로 '느끼게 된다'.



그런 점이 참 좋다.



 



IV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만 만나려고 하는 게 이해를 하고 이해를 받는 데 수고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아마 정현우의 시는 거의 모든 세대가 보편적으로 수긍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감정들을, 역시 모든 세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과 언어로 전달하고 있지 않나 싶다.



 



본인에겐 그게 콤플렉스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여타의 젊은 시인들과 같지 않다는 측면에서), 이건 시인만이 가진 큰 장점이란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도 장벽 없이 그의 시에 다가갈 수 있으니까.



 



3부의 시로는 「서랍의 배치」를 들고 싶다.



짧고 간결한데 힘이 있다. 수묵 정물화를 보듯 시 앞에 오래 시선을 두게 된다.



 



이 시집의 마지막 챕터인 4부의 시들 역시 시집을 끝내는 게 아쉬울 만큼 한 편 한 편이 아름다웠다.



한동안 끝까지 못 읽고 중간에 만 시집들이 많았는데, 이 시집의 시들은 대체로 다 좋아서 기쁘다.



 



전반적으로 보라색처럼 여리고 슬픈 정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슬픔을 승화한 뒤의 훼손되지 않은 인간성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는 게 이 시인의 가장 큰 장점이란 생각이 든다.



 



4부의 제목은 '여름의 캐럴'인데, 같은 제목의 시를 오래도록 남겨두고 싶다.



 



V



 



이 시집은 김언 시인의 해설로 마무리된다.



시인의 첫 시집의 해설을 김언 시인이 썼다는 것도 시집의 의미랄지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병률 시인이 추천평을 쓰고 김언 시인이 해설을 썼는데, 각각 문학동네와 문학과지성사가 떠오르는 시인들이지 창비가 연상되는 시인들이 아니다. 그런 두 시인이 (자발적이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기꺼이') 이 시인과 시집을 위해 시간을 할애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시집과 시인이 가진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의 첫 시집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김언의 해설은 아니나 다를까 '정현우의 시에는 유독 ‘슬픔’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로 시작된다. 시인의 말대로 이 시집은 슬픔에 대한 시이다. '슬픔'이라는 단어 자체도 많이 나오지만 슬픔이라는 감정을 우리에게 친숙하고 익숙한 단어들로 표현하고 드러내고 말한다. 그래서 그 감정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깝고 익숙한 것인지 새삼 깨닫고 느끼게 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오래 지속되면서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텐데, 그래서라도 이 시집은 모두가 공감할 만한 감정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것만으로 묘하게 위로가 된다. 카타르시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감정의 정화를 경험하게 된다.



 



김언 시인의 표현대로 아름답고 슬픈 시집이다. 슬프기도 하지만 아름답기도 하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정화는 아마도 이 두 감정이 함께 하는 데서 기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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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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