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라지꽃(Book)

책읽는낭만푸우
- 작성일
- 2010.11.18
현산어보를 찾아서 1
- 글쓴이
- 이태원 저
청어람미디어
마음이 다급해졌다. 12월 첫 주엔 이사를 가야하는데, 11월이 되어서야 이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이다. 사실 그 전에도 몇 번 이 책이 눈에 띄었고, 몇 번 책을 꺼내 보기도 했는데, 왜 빌릴 생각을 안 했던 건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재미난 책을 좀더 일찍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사갈 집도 구해야 하고, 이삿짐도 싸야 하고, 앞으로도 산 넘어 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놓을 수가 없다. 이사 가기 전까지는 도서관에 반납을 해야 하니깐. 그래서 마음이 급해졌다. 아, 이런. 한 달만 일찍 만났어도.
이 책은 여러 의미에서 책 만든 사람들의 애정과 정성이 듬뿍 느껴지는 책이다.
저자의 글솜씨나 해양생물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거기에서 기인한 정약전과 『현산어보』, 그리고 해양생물들에 대해 기술한 고서에 대한 끊임없는 이야기들이 나의 식었던 열정까지 북돋는다. 순수해서 아름답기까지한 열정이다. 너무 너무 '예쁘다'. 빠져들게 된다. 고문헌을 연구하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인문학적 소양과 박학다식함까지 보여줘서 글 읽는 자체의 순수한 재미도 너무 크다. 물고기를 비롯한 해양생물들에 대한 저자의 열정은 한국사와 한국어에 대한 전문적 지식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에서 보아왔던 선조들은 하나같이 영웅이거나 도덕군자로서 현실적인 생활과는 무관한 모습들이었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우면서도 선조들과 나를 연결하는 고리 중 무엇인가가 떨어져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고문헌에 등장하는 민물고기 이야기들은 냇가를 첨벙거리며 물고기를 잡고, 잡은 물고기를 들여다보고, 요리까지 척척 해내는 시골 아저씨들의 모습을 선조들의 모습과 겹쳐놓았고, 글을 하나 둘 접할 때마다 조금씩 그들에 대한 친밀감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고문헌에 남아 있는 물고기들의 정체를 규명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오늘날 지방마다 한 가지 물고기를 이르는 다양하고 고유한 방언들이 존재하듯 과거에도 물고기를 부르던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이 물고기들이 현재의 어떤 물고기와 대응하는지 밝혀내는 것은 추리소설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104).
쉴 새 없이 나열되는 물고기나 해조류들의 이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데, 그게 자기 자랑식 나열이 아니라 읽는 사람까지 기분 좋게 빠지게 만드는, 그런 열정이 있어서 유쾌하게 만든다. 『현산어보』를 비롯한 다양한 고문헌들을 통해 선조들이 해양 생물들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이나 관념을 밝히면서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거나, 고문헌에서 언급한 것이 어떤 종류인지 현대의 어종을 추리해나가는 과정도 흥미진진하다. 그 속에서 보여주는 우리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국어학자를 보는 것 같다. 거기에 연필로 그린 큼직한 해양식물 그림 세밀화들과 저자가 직접 찍은 다양한 사진들까지 곁들여져서 눈도 즐겁다.

도대체 얼마나 재미있냐구? 『현산어보』의 언어학적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말미잘의 어원을 밝히는 부분인데, 한 예로 들 수 있겠다.
[석항호石肛蝴 속명 홍미주알紅未周軋]
모양은 오랫동안 이질을 앓은 사람이 탈항한 것 같고 빛깔은 검푸르다. 조수가 미치는 곳의 돌 틈에서 산다. 모양은 둥글고 길쭉하게 생겼다. 그러나 붙어 있는 돌에 따라서 그 모양이 달라진다. 다른 물체가 닿으면 조그맣게 오그라든다. 석항호의 뱃속은 호박 속과 같은데, 육지 사람들은 이것으로 국을 끓인다(212).
여러 필사본에서 말미잘의 속명이 '홍말주알紅末周軋'이라고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추리 과정이 재미있다(궁금하신 분은 이 책의 213, 214쪽을 읽어보시라). 암튼 이 과정을 통해 정약전과 함께 그 당시 흑산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말미잘을 빨간 미주알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미주알 고주알의 그 미주알이다). 더군다나 말미잘의 한자 표기인 '석항호'의 풀이도 무척 재밌다. 石(돌), 肛(항문), 蝴(굴). 즉 '돌에 붙어사는 항문과 같은 굴'이 말미잘인 것이다(214-215). 하핫. 이런 이야기들을 쉴 새 없이 해주니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재주도 있겠지만 저자 자신이 무척 즐기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뱀장어의 산란과 관련한 동서양의 다양한 견해들을 섭렵하며 그 이유가 된 뱀장어의 특이한 산란 습성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도 무척 재미있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야기를 너무 맛있게 해서 할머니 옛날 이야기 듣듯이 완전 몰입하게 된다(하하, 이 이야기 정말 재밌다. 궁금한 사람들은 이 책의 331~333쪽을 읽어보시라).
나처럼 회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저절로 입맛을 다시게 만드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도 이 책을 좋아하게 만든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책을 읽고 있는 그 순간, 이미 몸은 흑산도 바닷가에 가 있다(난 정말... 입맛을 어찌나 다셨는지. ^^;).
정약전은 학공치의 맛이 달고 산뜻하다고 표현했다. 『우해어보』에서도 회가 매우 맛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선조들이 예로부터 학공치를 즐겨 먹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잘게 썰어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학공치회의 맛은 매우 뛰어나다. 지방이 거의 없고 단백질이 많아 담백하며 향도 좋다. 학공치는 가을이 깊어 갈수록 맛이 좋아지며, 가을철 5대 생선회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62).
많은 사람들이 숭어를 생선회, 회덮밥으로 즐겨 먹는다. 참기름 냄새가 살짝 밴 묵은 김치에 싸먹는 숭어회가 최고라는 이도 있고, 숭어살을 양념한 채소로 말아 쪄서 썰어 먹는 감화보금이 일미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지역에 따라 숭어를 미역이나 모자반 등의 해조류나 쑥, 냉이, 미나리 같은 봄나물국에 넣어 먹기도 한다(75-76).
숭어어란은 값이 비싸 일반인들은 맛보기조차 힘들지만, 최고의 술안줏감으로 인정받는다. 잘 드는 칼로 뒷면이 비칠 정도로 얇게 썰어 혓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그윽한 향기와 녹아드는 단맛이 일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숭어가 올라오던 영산강은 하구둑 공사로 막혀버렸고, 영암어란의 명성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79).
'오농육숭', 즉 오월의 농어, 유월의 숭어라는 말이 있듯이 오월은 농어의 제철이다. 여느 생선들처럼 찜, 찌개, 매운탕, 젓갈 등으로 조리할 수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농어는 회로 먹는 것이 제맛이다.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쫄깃쫄깃한 육질을 자랑하는 농어회는 잃었던 봄철 입맛을 되찾게 해준다(116).
"(전략) 잡아올린 준치는 갖가지 요리로 만들어졌다. 예전에는 신선한 준치를 소금에 절여 만든 자반을 항아리에 담아 솔잎을 켜켜로 쌓고 한지로 봉한 뒤 서늘한 곳에 두고 먹었다고 한다. 쑥갓, 파, 풋고추를 넉넉히 넣어 끓인 준치국도 일품이며, 그밖에도 만두, 젓국찌개, 찜, 조림, 회, 구이도 준치의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요리법이다(289).
회가 가장 인기 있긴 하지만 붕장어는 구이, 훈제, 탕, 포 등 어떻게 요리해도 뛰어난 맛을 낸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작은 크기의 붕장어를 창자만 끄집어낸 다음, 껍질 때 손마디 간격으로 토막 내 콩나물과 함께 끓인 후 갖은 양념을 타서 먹는 장어국을 해장국의 으뜸으로 친다. 횟감을 도려내고 남은 뼈다귀를 기름에 튀겨 말리면 좋은 술안주가 되고, 물고기 전체를 갈아서 고급 어묵 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338).
그러나 복어 요리 중에서 제일로 치는 것은 역시 복어회다. 종잇장처럼 엷게 떠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는 살점은 입 안에서 혀에 감겨들고, 그 청신하고 그윽한 맛은 사람들을 단숨에 복어회 예찬론자로 만들어버린다(372).
와, 나 정말 이런 사람이랑 꼭 친구하고 싶다. 더군다나 회까지 떠준다면... 우와!!! 평생 나랑 친구해달라고 졸졸 따라다니고 싶을 정도다. 완전 대박, 완전 대박. 오랜만에 기분이 설렌다. 책 읽는 재미를 오롯이 느끼게 해준다. 바로 이거지. 그야 말로 오감이 즐거워지는 책.
내용부터 구성까지 모두 맘에 든다. 물론 굳이 흠을 잡자면야 잡을 수는 있겠지만(97쪽부터 112쪽까지가 두 번 인쇄되어 있다. 내가 본 것만 파본인가?),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왜냐? 사랑에 빠졌으니깐.
그 어떤 여행서보다 흥미진진하다. 완벽한 여행서이면서 풍부한 민속지이다. 더군다나 지적 허영심에 충만해서 머릿속에 있는 사유들을 있어 보이는 단어들로 끄적인 부류의 글들과는 확실히 차별된다. '지적인 체'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박학다식하고 사고의 깊이가 있다. 그런데 거기서 기분 좋은 땀냄새가 난다. 200여 전 정약전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동국여지승람』, 『산림경제』 등 물고기와 관련된 내용을 싣고 있는 대부분의 책들은 궁궐에 진상하거나 경제성이 있는 물고기들만 기록하고 있다. 『현산어보』는 이런 점에서 특별히 중요한 가치가 있다. 정약전은 이 책에서 겨에어종뿐만 아니라 성대를 포함하여 흑산 근해에서 관찰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어종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옛사람들이 다양한 물고기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일상생활에 활용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133).
200 여년 전 정약전과 200년 후의 저자, 이 둘과 함께 하는 즐거움. 너무너무 멋진 두 남자와 한꺼번에 데이트를 하는데 어찌 좋지 않을 수 있으랴. 강추. 적어도 2010년 하반기에 읽은 책 중에서는 단연 최고다.
[덧붙임]
1. 외딴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약전이 지금의 내 처지와 같아 공감이 갔다고 하면 분명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적어도 그런 부분에서 충분히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는 것도 이 책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이다.
정약전이 외딴 흑산도에서 유배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았은 것처럼, 인편을 통해 전해져 오는 편지들이 쓸쓸한 유배 생활에 한줄기 빛이 되었던 것처럼(160), 나에게 있어 모국어로 된 책이란 그런 의미이다.
모국어로 된 책은 정약전이 아우 정약용에게서 고달픈 유배 생활을 이겨낼 수 있는 기쁨과 만족감을 얻었던 것처럼 모든 것에서 비슷한 성향을 가진 가장 좋은 말벗이 되어준다. 깊은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2. 저자가 대학에 있지 않다는 게 다소 의외였는데, 이유가 짐작이 간다. 작가가 은연 중 드러낸 문제제기는 (돈 안 되는)학문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고민했을 법한 것이다.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살펴보면 열악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개한 열정이 변치 않고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들은 천문, 지리에서 유교 경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이런 모습들에거 자꾸 뭔가 모순된 느낌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과연 정약전이 유배를 당하지 않았다면 『현산어보』와 같은 불후의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중략)
과거와 관직 생활에 얽매이다 보면 학문을 연마할 여가가 생기지 않는다. 귀양살이 중에서야 비로소 학문의 열정을 되새기고 절차탁마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정약전도 관직 생활을 충실히 하고 귀양살이를 하지 않았다면 『현산어보』 같은 저작을 남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귀양살이는 결코 저술 작업에 좋은 조건이 아니다. 그렇다면 역시 생존의ㅡ 위협을 느낄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학문에 열중할 수 있는 사회 구조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결국 조선 후기 사회는 학문을 위한 열기를 진작시키는 데 실패했고, 그 결말은 현대사의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다(168-169).
3. 우리가 그동안 먹었던 건 홍합이 아닌 진주담치였을 가능성이 크다. 허거걱. 홍합이 참담치라면 가짜 담치라고 할 수 있는 게 바로 진주담치. 당신이 그동안 시원하게 마신 국물이 홍합 국물이 아니라 진주담치 국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 궁금하다면 이 책의 272~274쪽을 읽어보시라. ^-^
4. 부록으로 '정약전에 대하여', '정약전의 가계도', '현산어보에 대하여'를 수록하고 있고 찾아보기에선 물고기들의 이름과 함께 그림을 곁들인 색인을 만들어 놓았다. 저자와 편집자의 열정과 꼼꼼함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5. '개발' 위주의 정책으로 잃게 된 것들을 통해 현재의 우리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목에 핏대 하나 세우지 않으면서도.
생태계에서는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생물들이라도 저마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 생물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야 사람들은 그것들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남획이나 환경오염으로 인해 갯지렁이가 살기 힘들게 되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또다시 생태계의 복잡성과 상호 연관성을 깨달으며 이미 깨어진 생태적 균형을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100).
게가 이동하는 물길을 그물로 막아 싹쓸이하듯 잡아들이는 사람들도 큰 문제지만, 강물을 중간에서 가로막는 보와 커다란 댐들은 게들의 이동 통로를 차단하여 한강의 참게 자원을 거의 전멸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팔당댐이 완공된 후 벌어진 일은 참게의 비극적인 운명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댐이 막힌 첫해,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던 참게들은 댐에 개미처럼 까맣게 달아붙어 콘트리트 벽을 기어오르려고 부질없는 노력을 계속해야 햇다.
정약전은 참게가 떼를 지어 몰려들던 팔당댐 부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머나먼 귀양지 흑산도에서 다시 한번 참게를 맛보며 고향 생각에 잠겨들었을 것이다. 고향에 가도 참게를 볼 수 없는 우리는 정약전보다 더 서글픈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닐까?(349)
그런데 우리와 영욕의 세월을 함께했던 황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황복은 자갈이 깔려 있고 조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에서 알을 낳는다. 때문에 산란기가 되면 이런 곳을 찾아 강물을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강바닥은 부유물로 뒤덮이고 물에서는 악취가 풍긴다. 무분별한 골재 채취로 인해 자갈밭을 찾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황복이 올라갈 강줄기를 막고 있는 보와 댐들이다. 대규모의 간척사업과 강하구에 설치되는 방조제는 황복의 출입 자체를 막아버린다. 황복의 복원을 위한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지만, 황복이 살 수 있는 환경을 갖추지 않는다면 이제 살구꽃이 피어도, 갈대 움이 터도, 황복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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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