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낭만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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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ㆍ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나의 산수


화성인들은 좋겠다. 그해 여름은 너무 무더워, 나는 늘 그런 상념에 젖고는 했다. 상고의 여름방학은 생각보다 길어서, 그런 상념에라도 빠지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137).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물론 세상엔 수학 정도가 필요한 인생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삶은 산수에서 끝장이다. 즉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듯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 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기 마련이다. 디 엔드다(140).


 


지금 열차라 들어오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상습범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상습적으로 전철을 타고, 상습적으로 일을 하고, 상습적으로 밥을 먹고, 상습적으로 돈을 벌고, 상습적으로 놀고, 상습적으로 남을 괴롭히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상습적으로 착각을 하고, 상습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상습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상습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습적인 교육을 받고, 상습적으로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이 아프고, 상습적으로 외롭고, 상습적으로 섹스를 하고, 상습적으로 잠을 잔다. 그리고 상습적으로, 죽는다. 승일아. 온몸으로 밀어. 온몸으로! 나는 다시 사람들을 밀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상습적으로(146-147).


 


아침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목격하는 일이 점점 하나의 스트레스로 변해갔다. 가까스로 문이 닫히면, 으레 유리창에 밀착된 누군가의 얼굴과 대면하기 일쑤였다. 이런 풍선을 봤나, 터질 듯 짓눌린 볼과 입술을, 또 납작해진 돼지코를 보고 처음엔 배를 잡고 웃었지만, 날이 갈수록 웃음은 사라져갔다. 좋아요, 다 좋은데 그러니까 당신이 기억하는 인류의 얼굴을 말해보란 얘기야. 화성의 누군가로부터 그런 추궁을 받는다면 나는 적잖이 고통스러울 것만 같았다(147).


 


이 부근의 어느 지붕


여름은 그렇게 지나갓다. 방학이 끝나면서 푸시맨 생활도 끝이 났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2학기가 시작된 학교는 몹시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자리가 없어, 이구동성으로 선배들인 얘기했다. 이구동성이 아니어도, 세상의 불황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자격증도 소용없고, , 정보산업고로 개명하면 취업률이 오를 거란 예상도 그러나 모두 루머에 불과한 것이었다. 선배들은 낙심했고, 여전히 구름은 흘러가고, 나는 목이 말랐다. 세상은 하나의 열차다. 한 량의 정원은 180, 그러나 실은 4백 명이 타야만 한다답답하고


 


길고, 이상한 여름은 끝이 났지만 대신 길고, 이상한 가을이 시작되었다(150).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금성인들은 좋겠다. 그해 겨울엔 혹한이 닥쳐, 나는 늘 그런 상념에 젖고는 했다. 정보산업고의 겨울방학은 생각보다 가혹해서, 그런 상념에라도 빠지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긴긴 겨울, 여전히 나는 여러 일터를 전전했다(154-155).


 


새벽의 전철은 늘 은하철도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말해도 괜찮습니까? 금성의 누군가로부터 추궁을 받는다 해도, 과연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새벽은 광활하고 캄캄했으며, 혹한의 공기는 언제나 거칠었다. 말 그대로의 천자문 집宙 집宇, 넓을洪 거칠荒. 그리고 나는, 혼자였다(155).


 


살아, 있다. 무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유사한 산수를 할 수 있단 것은 얼마나 큰 삶의 축복인가. 사라지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158).


 


 








언니의 폐경


김훈 등저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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