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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사선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5.2.20
"말을 바로 해야지.
돌려주는 게 아니라
내가 되찾아 가는 거다!"
영화 <일대종사>는 엽문(양조위)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상 궁이(장쯔이)가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 대사는 '궁가 64수'라는 무술 장문의 딸로 나오는 장쯔이가 아버지를 죽인 수제자와 기차역에서 벌인 대결에서 승리한 후 던진 대사입니다. 패배한 남자 수제자는 무술의 후계자 자리가 마치 자기것인양 되돌려주겠다고 말하지만, 장문의 딸은 여자의 몸이지만 자신이 진정한 후계자라며 되찾아 가는 것뿐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무술 영화의 뻔한 대사로 넘겼을 이 말이 이번 설 연휴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며느리들이 고생하는 기간이어서 의도적인 편성이었는지는 몰라도, 올해 TV 설날 특선 영화는 유독 여성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말하는 것 같아서입니다.
<댄싱 퀸>은 물론이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들이 영화 때문에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됐다는 <와즈다>도 방송됐습니다.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고 남자들과 함부로 말도 못 붙일 정도로 아랍 사회가 보수적인 건 알았지만, 자전거까지 못 탈 정도로 남녀차별이 심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게 됐네요. 주인공 소녀 와즈다의 엄마는 자전거를 타고 싶어하는 딸에게 여자가 자전거를 타면 아기를 못 낳는다고 말합니다. 또 학교의 여자 교장은 수다 떠는 여학생들에게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안 된다며 '여자 목소리는 알몸과 같다'고 말합니다. 와즈다의 아빠는 아들을 못 낳는 엄마를 놔두고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립니다. 사실 이렇게 진지한 주제의 비영어권 해외 영화는 보통 <독립영화관> 시간에 방송되어 왔는데, 그동안의 명절 특선 영화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게 사실입니다.
한 번 생각이 그렇게 기울어서인지, 다음날 EBS에서 방송된 <피터팬(2003)> 역시 웬디가 네버랜드까지 가서 고아들의 엄마로 육아를 담당하는 영화로 보입니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웬디에게 숙모는 소설가의 아내가 되라고 말합니다. 여자티가 나기 시작한다며 숙녀 수업을 받으라면서 말이죠. 그리고 후크는 웬디에게 여자 해적이 되라고 꼬드깁니다. <아이언맨 3>에서 기네스 팰트로가 슈트를 입기도 하고, 마지막엔 괴력으로 악당을 때려 눕히는 걸 보니 여자들의 쌓인 울분이 폭발하는 듯합니다. 이러다가는 곧 방송될 <분노의 질주> 시리즈가 집에 가서 살림이나 하라는 남자 운전자들에게 분노하는 여성 운전자를 다룰 것 같네요^^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봄봄>에서도 여성들의 기구한 삶을 보게 되면서 그동안 영화 속에 이렇게 많은 남녀 불평등이 담겨 있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이쯤 되니 단지 고생하는 며느리들을 위한 의도적인 편성이 아니었다는 건 확실해졌습니다. 그럼 내 생각이 왜 그쪽으로 기울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지금 읽고 있는 <중국 문화 속의 사랑과 성>이라는 책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연휴 전에 읽기 시작했는데 설날 특선 영화를 다 챙겨 보느라 여태 읽고 있네요.) 이 책은 중국의 필기소설 중 성에 관련된 것만 모아놓고 중국 명청시대의 성풍속을 해설해 주는 책입니다. 아무래도 야한 이야기들이 중심이지만, 여성들이 얼마나 억압당하며 살았는지를 진지하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멀리 외지로 돈 벌러 나갔다가 형편이 안 좋아져 부인의 생사도 모르고 지내던 남편이 새장가를 들었더니 그 상대가 바로 원래 아내였는데 오히려 자기 생사도 모르고 재혼했다며 폭력을 휘둘렀다는 이야기, 남편과 사별하고 수절하는 게 찬양받던 문화 속에서 미혼인 여성이 이유없이 '수절'을 하겠다며 정작 약혼자와는 파혼하면서 엉뚱하게 죽은 남자에게 시집가 시댁에서 수절을 자처하는 이야기, 전족의 폐해 등 참 기괴하게 변질된 남존여비 사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죽어 경제적 어려움으로) 굶어죽는 것은 극히 자그마한 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재혼해서) 절개를 잃는 것은 지극히 큰일'이라는 남자들의 시선이 꽤나 무섭게 느껴집니다. 남자들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 중에는 남자의 성능력이 떨어지는 것과 여성의 성능력이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세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어서라고 합니다. OBS에서 방송한 <동방불패>에서 규화보전을 연마하려면 남성을 버려야 하죠. 그러면서까지 무림고수가 된다는 것은 권력 때문이구요. 남자들이 권력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테고, 결국 여성 착취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군요.
이번 설 연휴엔 같은 영화도 어떤 책을 읽고 보느냐에 따라 느끼는 게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일대종사> 속 엽문의 대사 중에 '수직과 수평'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술에서 뻗으면 지는 거고, 서 있으면 이기는 거라는 이야기지만, 저에게는 남녀의 수직 수평 관계로 들리네요. 남성이 여성에게 베풀어준다고 생각하는 도움과 휴식이 사실은 원래 여자들의 것이라는 점, 확실히 깨닫게 됐습니다.
"말을 바로 해야지.
돌려주는 게 아니라
내가 되찾아 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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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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